통장 하나에 커플이 정기적으로 돈을 넣는다. 이 돈으로 데이트 비용을 낸다. 일명 ‘데이트 통장’이다.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미혼남녀 500명(남 250명·여 250명)을 대상으로 3월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4명 중 1명(남 28.4%, 여 25.6%)이 데이트 통장을 사용한 경험이 있거나 현재 사용 중이다.

안정은 씨(26)는 스물한 살 때, 데이트 통장을 썼다. 월 20만 원씩 부담. 데이트 비용이 부족해 5만~10만 원을 더 넣는 달도 있었다. 그는 “남자친구가 군에서 받은 월급과 나의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데이트 비용을 부담했다”며 “돈 관리가 편해서 (사용하기) 좋았다”고 말했다.

김수정 강남대 교수(교양교수부)는 “데이트 통장 문화는 젊은 세대의 남녀평등 인식과 함께 이들의 관계 맺기가 자본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커플은 자신들의 상황을 고려해 데이트 통장에 입금 금액을 6 대 4 혹은 7 대 3으로 배분한다”며 “젊은 세대는 연애 관계를 유지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이 적절한지, 이러한 금액 분배가 합리적인지 혹은 공정한지를 끊임없이 따져 묻는다”고 말했다.

돈이 없으면 연애도 못 한다는 요즘, 청년은 데이트 비용을 주로 어디에 쓸까. 기자는 2019년 8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스무 살 동갑내기 커플이 실제 사용한 데이트 통장을 받았다.

여기에는 요즘 데이트의 공식이 그대로 나온다. 결제 금액을 볼 때 이들의 연애는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밥 먹고 카페에 가는 패턴이 계속 나타났다.

▲ 데이트 통장에 나타난 ‘밥 먹고 카페 가는’ 공식
▲ 데이트 통장에 나타난 ‘밥 먹고 카페 가는’ 공식

이 커플은 2019년 8월 8일 ‘모모스테이크’에서 저녁 식사 비용으로 2만 8000원, 성격분석 상담을 겸하는 카페 ‘힐링카페멘토 강남점’에서 1만 7000원을 썼다. 10월 4일 역시 저녁 식사를 하는 데 1만 9600원, 이후 카페에서 1만 8500원을 사용했다.

카페 지출이 식사 비용과 맞먹는 수준이다. 9월 6일에는 케이크 전문 카페 ‘키에리’에서 지불한 비용(1만 4500원)이 ‘홍콩반점’에서 먹은 짜장면(1만 원)보다 많았다.

양진웅(24·남) 씨는 “요즘 카페는 음료 한 잔에 5000~6000원을 쓰는 게 기본이라 돈이 아깝다고 생각했다”라며 “자릿세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만 데이트할 때 다른 놀거리가 있으면 굳이 카페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데이트 통장에 나타난 집 데이트
▲ 데이트 통장에 나타난 집 데이트

통장에는 ‘밥, 카페’만큼 자주 등장하는 패턴이 있다. 주로 밤 시간대의 편의점 지출이다. 밤 12시에 가까운 시간대에 5000원에서 1만원 대까지의 소액결제가 대부분이었다.

통장 사용자는 “둘 다 자취를 해서 집 데이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자취를 하지 않았다면 데이트 비용이 훨씬 더 부족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편의점에서 먹을거리를 사서 서로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데이트 통장의 유행이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과거에는 남성이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는 게 일반적이었다면, 최근에는 연인이 또래이면 더치페이를 한다. 남녀가 정확히 반반을 부담하는 게 아니더라도 남성이 모든 비용을 내는 경우는 드물다.

안정은 씨 역시 “(제가) 좋아하면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어 하는 성격”이라며 “연애 초기엔 연인보다 데이트 비용을 더 많이 지출했다”라고 말했다. 데이트 통장은 남자친구가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기성세대의 반응은 어떨까. 이경래 씨(51)는 데이트 통장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며 기발하다고 했다. “우리 때는 대부분 남자만 돈을 벌어서 더치페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 가부장적 시대에서 자랐으니 데이트하면 돈은 당연히 남자가 내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김수정 교수는 “데이트 통장은 연인 사이의 더치페이가 진화한 버전이라 볼 수 있다”며 “한 명이 밥값을 냈다면 나머지 한 명은 커피값을 내는 식의 더치페이는 과거 남성이 모든 데이트 비용을 내는 것이 불평등하다는 젊은 세대의 성평등 인식이 발현된 결과”라고 밝혔다.

또 김 교수는 데이트 통장이 눈치 보기 싫고 손해도 보기 싫은 마음에서 기인한다고도 분석했다. “연애라는 공동의 과업을 달성하는데 들어가는 나와 너의 기여가 동일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데이트 통장은 상호 기여의 동일성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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