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는 진짜 타고난 기자예요. 아마 다시 태어나도 기자 할 거예요.”

이상기 아시아엔 발행인은 이충재 기자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상기 발행인은 1988년 한겨레 기자가 되고 이충재 기자와 30년 넘게 알고 지냈다. 경찰, 교육부, 국방부를 함께 출입했다. 그는 초년병 시절의 이충재 기자를 “가장 부지런했던 기자”로 기억한다.

“공무원보다 먼저 출근했어요. 내가 그 친구보다 일찍 출근한 적이 없어서 (정확한 시간은) 모르는데, 다른 공무원한테 듣기로는 오전 7시쯤이면 이미 출근해 있던 적이 많았다고 해요.”

이충재 기자를 5월 12일 서울 성북구의 카페에서 만났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와서, 의자에 앉기도 전에 질문을 계속했다. 카페에는 언제 도착했는지. 저널리즘스쿨에서는 뭘 배우는지. 무슨 인터뷰를 해서 어떤 기사를 쓰겠다는 건지….

대답을 듣더니 “(나는) 별로 닮고 싶은 기자가 아니니까 이 인터뷰는 실속이 없다”면서 웃었다. 닮고 싶은 기자란 어떤 기자여야 하는지 미국 기자를 예로 들면서 10분간 말했다.

“미국 기자는 저널리스트인 동시에 스페셜리스트거든요. 자기만의 분야에 대한 상당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언론사를) 나와서도 그 역할을 꾸준히 해서 책도 많이 내잖아요.”

한국 기자의 책은 취재 뒷얘기만 주로 담지만, 미국 기자가 쓰는 책은 깊이가 있다고도 덧붙였다.

이충재 기자는 1987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사회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을 거쳐 2020년 7월 주필에 취임했다.

2021년 3월부터 ‘이충재의 인사이트’ 뉴스레터를 쓰겠다고 자청하고 직접 제작했다. 새벽 3시 반쯤 일어나 그날 신문에 실린 칼럼과 사설을 모두 읽고 5시에 출근했다. 7시까지 구독자들에게 보낼 칼럼을 썼다.

▲ ‘이충재의 인사이트’ 홈페이지
▲ ‘이충재의 인사이트’ 홈페이지

그는 2022년 11월 한국일보 고문이 됐다. 지금도 같은 이름의 칼럼을 웹사이트(chungjae.com)에 무료로 게재한다. 2023년 6월 1일까지 126건을 썼다.

메일로 받아보는 구독자는 1200여 명이다.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도 이 글을 싣는다. 뉴스레터를 계속하자고 제안했던 이성규 미디어스피어 대표는 “중단되는 게 개인적으로 많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퇴임 후에도 여전히 칼럼을 쓰지만, 일상은 달라졌다. 자는 시간이 1시간 반 늘었다. 요즘 이 기자는 오전 5시에 하루를 시작한다.

“주필은 사설 뭐 쓸지 어떻게 쓸 건지 정하고, 데스크도 봐야 하고, 칼럼도 봐야 해서 할 일이 많아요. 그걸 같이 하려니까 그랬던 거고, 요새는 (일이) 없으니까. 오전 5시에 일어나서 모든 신문에 실린 사설과 칼럼을 먼저 다 보죠. 그래서 뉴스레터를 작성해서 보내고, 그러고 나서는 다시 신문을 다 봐요.”

신문을 마저 읽으면 오전 9시쯤, 서울 성북구 아리랑도서관으로 간다. 보고 싶은 책이 너무 많다고 했다. 기자 생활하면서 제일 후회되는 게 책을 많이 못 본 거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책 좀 많이 보려고 하는데, 또 이게 시력이 안 따라주네.”

책을 읽다가도 휴대전화로 뉴스를 틈틈이 본다. 그러면서 칼럼 주제를 고민한다. 다른 기사나 칼럼과 어떻게 차별화할지 생각한다. 아이템을 고르고 기자 시절 알고 지낸 정치인이나 전문가를 취재한다.

다음날 아침 보낼 글에 하루를 온전히 쓴다. 만 35년간 몸담은 신문사를 떠났지만, 그의 일과는 여전히 조간신문에 맞춰졌다,

▲ 이충재 전 한국일보 주필 (출처=한국일보 홈페이지)
▲ 이충재 전 한국일보 주필 (출처=한국일보 홈페이지)

그는 글을 쓰면서 두 가지 원칙을 지킨다. 첫 번째는 팩트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관계가 왜곡되거나 틀리면 주장의 근거가 힘을 잃기 때문이라고 했다. 팩트 없는 글은 선전 선동에 불과하다고도 말했다.

“팩트가 잘못되면 신뢰가 무너지니까요. 독자들이 언론에 신뢰를 갖지 않으면 (언론의) 존재 가치가 없잖아요. 지금 언론이 불신당하는 것도 그런 거 아니에요? 주장만 강하고 팩트가 약하기 때문에.”

두 번째는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해야 한다는 점이다. 20년 넘게 칼럼을 쓰면서 그의 펜촉이 진영을 가리지 않고 역대 대통령을 모두 겨눴던 이유다.

2015년 6월 26일 칼럼에서는 “정부가 제출한 법안 몇 개 통과시켜주지 않는다고 국민을 들먹이는 건 억지”고 “논리적 비약일 뿐 아니라 독선”이라고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직격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 9월 14일 칼럼에서는 “부동산 정책 실패와 ‘입법 독주’ 등 정권의 무능과 오만이 불쏘시개가 됐다”고 썼다.

가장 큰 권력이 제 역할을 하도록 감시하고 비판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라고 이 기자는 믿는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비판할 거 있으면 하고, 윤석열 정부에서는 윤석열 정부 비판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 힘이 있기 때문이에요. 검찰 같은 경우는 그게 항상 문제잖아요. 죽은 권력만 수사하니까 ‘하이에나’라는 비판을 받잖아요. 언론도 똑같다는 거죠.”

한국일보 편집국장 시절(2011년 6월~2012년 4월)에도 두 가지 원칙을 강조했다. 기계적인 중립이 아닌, 한국일보만의 고민과 판단이 담긴 기사를 쓰자는 것. 적극적이고 개혁적인 중도의 자세다.

“그냥 저기는 이렇게 얘기했고 여기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쓰면, ‘어쩌라는 거냐?’ 이렇게 되는 거죠.” 치열하게 취재한 팩트를 중심으로, 사안의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가리는 신문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사회부장 자리에서는 9개월 만인 2004년 10월 물러났다. 사회부 기자들이 특종 보도(제152회 이달의 기자상)했던 최태원 SK 회장 기사를 계속 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다. “위에서는 가급적 (기사를) 줄이고 못 쓰게 했다. 그래서 나를 논설실로 보낸 것이다.”

편집국장 자리에서도 열 달 만에 내려와야 했다. 회사는 광고 매출 하락 등 경영 실적이 부진을 이유로 들었다. 임명 당시 편집국 기자의 95%가 지지한 국장의 마지막은 씁쓸했다.

그는 오히려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석사 학위를 땄다. 일간지 전·현직 편집국장 14명을 인터뷰해 학위논문(종합일간지 편집국장의 편집권에 대한 인식 연구)을 2015년에 썼다.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는다고 표현했던 논설위원으로 번번이 발령받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쨌든 뭐 사회부장도 편집국장도 되고 주필도 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게…. 나는 내 기자 생활에 있어서 큰 후회는 없어요.”

못내 아쉬운 게 있다면, 자본과 권력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론 지형을 만들지 못한 일. 이 기자가 “후배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이유다. “그나마 언론을 지키려고 했던 선배”로 기억되고 싶다는 바람도 드러냈다.

인터뷰 말미, 책 얘기로 돌아갔다. 이 기자는 2021년 8월 <기자협회보> 인터뷰에서 “능력만 되면 책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책을 쓸지 정했냐고 물었다. 그는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써보자고 했던 걸 거절했다고 답했다.

“과거에 있었던 얘기를 쓰는 정도로는 별로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아서요, 스스로. 그렇다고 뭐 엄청난 전문성이 있는 글을 쓸 자신도 없고. 할 수 있는 게 이런 식의 논평 정도, 그 정도 하는 거죠, 뭐.”

이어 그는 “이런 게(뉴스레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냐”고 기자에게 질문했다. 그러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의자를 당겨 몸을 앞으로 바짝 기울이고 눈을 빛냈다. 그렇다고 말하자 재차 확인했다.

“이렇게 신문사 주필 출신이 직접 쓰는 논평은 없는 거죠? 어쨌든 제 뉴스레터가 좀 특이하긴 하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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