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정당 정책연구소가 있다면 독일에는 정당재단이 있다. 현재 독일 의회에 진출한 정당은 8개로, 이들 중 7곳은 연계된 정당재단이 있다. 기독민주당(기민당·CDU)과 기독교사회연합(기사련·CSU)은 의회에서 연합으로 활동하지만, 별개의 정당재단을 운영해 기사에서는 개별 정당으로 봤다. 연방의회 선거에서 2번 연속으로 의회 그룹(30명 이상의 의원)에 속한 정당은 재단을 지정해 국가 지원금을 요청할 수 있다. 정부에서 공적 지원금을 받는 정당재단은 모두 6곳이다.

「정당 싱크탱크의 다양성과 유형화」 보고서는 독일의 정당재단을 ‘공공재단형 싱크탱크’로 분류하고 있다. 이념을 같이 하는 정당과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민주시민교육과 시민의식 제고 등 보다 일반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는 이유에서다. 정당 국고보조금으로 운영돼 ‘당파형 싱크탱크’로 평가받는 한국의 정당 정책연구소와 달리 공익적이고 독립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이 기사에서는 독일 정당재단의 활동과 역할, 운영 시스템 등을 살펴보고 한국 정당 정책연구소와의 차이점을 비교한다.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한국사무소의 토마스 요시무라 대표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한국사무소의 토마스 요시무라 대표

취재팀은 지난 4월 19일 종로구에 위치한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KAS) 한국사무소를 방문했다. KAS는 독일 초대 총리인 콘라드 아데나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단체다. 독일의 대표적 중도우파 정당인 기민당과 연계되어 있다. 1956년 설립돼 현재 110여개의 해외 사무소를 운영한다. 한국 사무소는 1978년 독일 정당재단 중 가장 먼저 문을 열었다.

한국의 정당 정책연구소는 해외 사무소가 없다. 반면 독일의 정당재단 다수는 세계 각국에 해외 사무소를 두고 활발한 국제교류 활동을 벌이고 있다. KAS 외에도 한스 자이델 재단(기사련),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사민당), 하인리히 뵐 재단(녹색당) 등이 해외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독일 정당재단이 해외에 사무소를 두는 이유는 뭘까. 토마스 요시무라 KAS 한국사무소 대표는 “민주주의를 육성하는 것이 기본 목표”라고 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 회복 과정을 겪으면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국제 협력과 원조의 필요성이 대두됐다는 것이다. 그는 “독일 기관과 시민들이 (해외사무소가 있는) 현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종의 대사관 같은 역할”도 한다고 덧붙였다.

▲ KAS의 해외 사무소 현황 (출처=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2022년 연례보고서)
▲ KAS의 해외 사무소 현황 (출처=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2022년 연례보고서)

 

▲ 독일의 미래 고민하는 정책⋅교육 싱크탱크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은 정치 연구와 자문 등 씽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다.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2022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작년엔 독일 연방군의 미래,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 에너지 의존, 디지털 혁신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연구 및 자문을 진행했다. 해외 사무소에서는 국제협력사업을 진행하거나 주재국의 정치 사회 연구 등도 수행한다. KAS 한국사무소 홈페이지에는 ‘국민의힘 전당대회 분석 보고서’ 등 한국 정치 현안을 연구한 자료들이 올라와 있다.

시민의 정치 참여를 늘리기 위한 민주시민교육도 진행한다. 전문가와 시민 간 토론회를 공동 주최하거나 정책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우리는 시민에서부터 정책이 시작돼야 한다는 강한 신념이 있어요. (그래서) 지역 정치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정치가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예산 운영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고 있죠. 정책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시장이 직접 설명하는 세미나를 열기도 해요.” 대학에서 민주주의와 국제안보 등을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한다.

정당재단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익적인 정치교육에 폭넓게 참여할 수 있는 것은 각 재단이 보이텔스바흐 협약(Beutelsbacher Konsens)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 협약은 1976년 만들어진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지침으로,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정치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

▲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한국사무소 내부. 정치 사회 연구 자료들이 비치돼 있다.
▲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한국사무소 내부. 정치 사회 연구 자료들이 비치돼 있다.

KAS는 젊은 정치인을 위한 트레이닝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독일뿐만 아니라 해외 사무소를 둔 현지의 정치인도 참여할 수 있다. 요시무라 대표는 “고위급 정치인과 교류도 하고, 정치 전문가들로부터 소통 방법이나 선거운동 방식 등을 배운다”고 설명했다. 작년에는 독일 기민당·기사련 청년조직 '영유니온 연방이사회'가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들은 영유니온 조직의 운영 방식을 공유하고 디지털화된 한국의 선거운동 방식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장학금 사업도 활발하다. 작년 한 해동안 3,358명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1965년 이후 KAS의 후원을 받은 장학생은 총 17,117명에 달한다.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KAS에서 2022년 한 해동안 주최한 행사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포함해 총 1,772개다.

 

▲ 독립운영 가능케 한 분리 재정 

KAS의 공식 SNS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재단 예산이 가장 많이 사용된 곳은 국제 프로젝트로, 예산의 53.5%를 차지했다. 나머지는 인건비 18.6%, 국내 프로젝트 16.9%, 기타 11.0% 순으로 쓰였다.

이 예산은 어디서 왔을까. 정당재단의 예산은 90% 이상이 연방정부 지원금으로 채워진다. 요시무라 대표는 “KAS의 재원 98~99%가 공적 자금”이라며 연방 정부뿐 아니라 지방 정부에서도 지원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2021년 기준 KAS는 약 2억2천3백 유로를 보조금으로 받았다. 이 중 96.1%가 연방 정부 보조금이었다. 그 뒤로 기타 보조금이 2.4%, 지방 정부 보조금이 1.5%를 차지했다.

▲ KAS의 2021년 수입구조(출처 = KAS 2022 연례보고서)
▲ KAS의 2021년 수입구조(출처 = KAS 2022 연례보고서)

요시무라 대표는 KAS 등 정당재단이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배경으로 분리된 자금구조를 꼽았다. 그는 “조직의 모든 구조는 분리돼 있고 의사 결정 역시 재단 스스로 결정”한다고 했다.

“이런 독립성은 별도의 자금에서 비롯돼요. 운영 자금이 얼마가 될지를 결정하는 것도 CDU에서 정하는게 아닙니다. 정당 예산의 일부가 아니라 각 부처를 통해 제공되는 별도의 예산이 있어요. 물론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결국 의회의 결정에 기초하죠.”

정당재단은 1968년 7월 14일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판결(BVerfG 2 BvE 5/83)을 설립 근거로 두고 있다. 판결에 따르면 정당재단의 활동은 헌법에 부합해야 하며 재단도 법률적, 실효적으로 독립되어야 한다. 각 정당재단이 이념을 같이 하는 정당으로부터 일정 정도의 거리를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은 정치자금법 제28조 제2항에 따라 경상보조금의 30% 이상이 정책연구소로 가도록 하고 있다. 법적으로 정책연구소 예산을 어느정도 보장하고 있긴 하지만, 정부가 정당재단을 직접 지원하는 독일과는 차이가 있다. 한국의 경우 모정당이 지급받은 국고보조금 예산에서 정책연구소 운영자금을 떼어주는 구조다.

반면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은 기민당과 가깝지만 분리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둘은 같은 정치적 가치를 공유하고 물리적으로도 가깝다. 현 재단 이사장도 기민당 출신의 전 연방의회 의장인 노르베르트 람머트다.

요시무라 대표는 “인적 연결성은 있다”면서도 “헌법재판소 판결로 정당과 재단 사이에 (존재하는) 사실적이고 법률적인 독립성이 재확인됐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독일은 정당재단이 특정 정당과 관련해 직접적인 선거운동이나 정치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우리는 선거에서 그들(CDU)의 패배와 승리를 분석하고, 뭔가를 다르게 했어야 한다거나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비판해요.”

▲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조직도 일부 (출처 =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 홈페이지 캡처)
▲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조직도 일부 (출처 =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 홈페이지 캡처)

한국 정당 정책연구소는 독일보다 인적 연결성이 더 강하다. 민주연구원(더불어민주당)과 여의도연구원(국민의힘)의 이사장은 당대표가 맡고 있다. 원장은 당대표가 지명하고 이사회 등의 승인을 받는 구조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홈페이지 조직도는 각각 민주연구원과 여의도연구원을 산하조직으로 표시하고 있다.

“한국의 정당 정책연구소도 해외 사례들을 고려하여 정당과의 직접적 연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정책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들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덕성여대 조진만 교수 연구진이 2019년 선관위 연구용역보고서 『해외 국가 정당의 정책연구소 운영 현황과 한국에의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에서 지적한 내용이다. 정당의 관여와 개입에서 벗어나 독자적 활동을 진행하는 해외 연구소에 비해 한국의 정당정책연구소는 독립성과 자율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당 정책연구소가 흔히 ‘당파형 싱크탱크’로 칭해지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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