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울진군 신화 2리 화동마을. ‘고물 삽니다’ 소리를 내는 흰색 포터가 좁은 도로를 지나갔다. 버스가 하루 3번 오가는 작은 동네. 마을을 둘러싼 산에는 시커먼 나무 밑동이 가득했다. 기둥이 검게 그을린 나무도 산등성에 듬성듬성 보였다.

마을 초입 표지판을 지나 500m쯤 걸었다. 흰색 컨테이너 6채가 나타났고, 그 뒤로 1층짜리 벽돌 건물이 보였다. 신화2리동회관(마을회관). 건물 앞에는 ‘산불예방! 산과의 약속입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마을회관을 4월 21일 찾았다. 신발 20여 켤레가 놓인 현관을 지나 문을 열었더니 거실, 부엌, 작은방, 화장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널찍한 거실에는 공기청정기, 에어컨, 텔레비전, 노래방 기계가 보였다.

마을회관에는 주민 14명이 있었다. 오전 11시. 할머니 3명이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했다. 눈이 마주친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엄 할매! 이리 와보소. 할매 막내 딸 닮았네.” 그러자 답이 돌아왔다. “아이고, 불탄 이야기 들으러 왔나 베?”

마을회관은 매일 북적인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주민들이 이곳에서 점심을 함께 먹는다. 원래 이웃끼리 가까웠지만 지난 1년은 안 모인 날이 드물다. 2022년 3월 4일 마을을 할퀸 산불 때문이다.

▲경북 울진군 신화2리 화동마을
▲경북 울진군 신화2리 화동마을

지난해 봄, 경북 울진 등 동해안 일대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신화 2리는 주택 28채 중 22채가 불탔다. 집을 잃은 이재민에게 정부는 컨테이너로 된 약 8평 크기의 임시 조립주택을 제공했다.

신화2리에 있는 임시 주택은 20동. 주민들은 2022년 3월 30일부터 한 달 간 임시 주택으로 입주했다. 그 후 1년. 이들은 여전히 컨테이너에서 지낸다.

“회관이 없었으면 안 됐지, 회관이 효자레이.” 할머니들이 입 모아 말했다. 큰불에도 타지 않고 남은 마을회관이 주민의 보금자리가 됐다.

이복자 할머니(83)도 매일 마을회관에 온다. 처음 집을 잃고 밥을 거르고 잠을 못 잤다. 앞날이 막막해 눈물만 났다. 혼자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매일 마을회관에 갔다. “여럿이 어울려서 밥도 해 먹고, 시시껄렁 농담도 하고 그러면 기분이 좋지.” 마을회관은 재난의 기억을 치유하는 공간이었다.

▲ 할머니들이 신화2리동회관에 모였다.
▲ 할머니들이 신화2리동회관에 모였다.

밥상 2개에 밥, 김치, 씻은 김치, 미역 줄기, 시래기국이 올라왔다. 쌀과 김치, 미역 줄기는 종교 단체에서 보낸 구호물자다.

“이것도 인자 마지막이야. 1년 지나서 안 보내 준다대.” 이 씨가 반찬을 가리키며 말했다. 1년이 지나 지원이 끊긴다는 얘기다.

더 필요하지 않냐는 물음에 이 씨는 눈을 크게 뜨고 손사래 쳤다. “다른 데도 난리 났다는데 거기도 받아야지.” 그는 지난달 산불이 난 강릉을 언급했다. 한 달 지난 지금이 제일 막막할 거라면서 매도 먼저 맞은 사람이 낫다며 허허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할머니들은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마셨다. 어느 할머니가 마시던 커피를 흘리자 두루마리 휴지가 툭하고 떨어졌다. 옆에 앉은 할머니가 다리로 등을 치며 말했다. “턱에 구멍 뚫렸는교?”

“아 참, 요새 아들은 휴대폰으로 녹음하더라. 지금도 녹음하고 있는 거 아니제?” 누워서 TV를 보던 노인회장 주미자 할머니(79)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주 씨는 1년간 많은 매체와 인터뷰했다. 그래야 빨리 집을 지을 수 있단 얘기를 기자에게 듣고 취재에 열심히 응했다. 지역 신문부터 KBS까지 여러 매체에 얼굴이 나왔다. 그는 “아이고, 죽기 전에 우리 집에서 발 뻗고 누워보면 좋겠네”라며 다시 누웠다.

“나는, 불나던 날이 우리 시아비 제사래.” 엄석 할머니(84)의 말에 마을회관이 웃음바다가 됐다. 시아버지 제사상에 떡을 올리고,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내고 있는데 뒷집에서 ‘언니, 언니, 불났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식탁에 고기를 올려놓고 헐레벌떡 나오니까 집이 탔지.” 엄 씨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불이 나고 마을의 명절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전에는 시끌벅적했다. 서로 자녀와 손자 얼굴을 다 알고 지냈다. 누가 오면 마을회관에 모여 수박, 사과나 과자를 나눠 먹었다.

하지만 지난해 추석과 올해 설날은 조용했다. 마을에서 8남매를 키운 이계수 할머니(88)의 자녀는 대부분 하루만 있다 가거나, 오지 않았다. 와도 잘 곳이 마땅치 않아서다. 그는 “집이 저런데 어떻게 오겠냐”고 했다.

주민들만의 잔치는 열린다. 4월 28일에는 엄석 할머니의 생일잔치가 있었다. 오전 11시 20분 회관에 들어서자, 할아버지 2명과 할머니 14명이 외출 준비를 했다. 주민들은 엄 씨 자녀들이 예약한 오리고기 식당 ‘동치골’로 향했다.

▲엄석 할머니 생일잔치
▲엄석 할머니 생일잔치

“건강하게 살아요.” 할머니들은 4명씩 모여 앉아 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고기를 굽겠다며 집게를 찾았다. 양념이 없는 훈제 오리고기를 2시간 동안 먹고 마을로 돌아가는 봉고차에 탔다.

할머니들은 ‘엔돌핀은 사랑의 메시지’, ‘내 나이가 어때서’ 등 트로트를 따라부르며 손뼉을 쳤다. 창밖 도로에는 약 3m 간격으로 ‘산불 조심’ 현수막이 걸려있다.

할머니들은 집이 아닌 마을회관으로 돌아갔다. 건강검진 예약을 단체로 하기 위해서다. 거실에 휴대폰 하나를 놓고 빙 둘러앉아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간호사가 평소 먹는 약을 묻자, “갸는 당뇨랑 관절염 있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알고 지낸 세월만 50~60년. 누가 어디가 아프고 건강검진을 언제 받았는지 정도는 꿰고 있다. 10명이 예약하는데 30분이 걸렸다.

화재로 삶의 터전을 잃었지만, 할머니들에게는 여전히 굳건한 공동체가 남았다. 재난으로 인한 피해자 상처와 아픔은 시간이 간다고 저절로 치유되지 않는다. 이들은 1년 동안 서로를 일으켜 세우면서 고난의 시기를 슬기롭고 유쾌하게 이겨냈다.

▲ 주미자 할머니의 임시 주택
▲ 주미자 할머니의 임시 주택

주 씨가 고사리 정리하러 간다며 일어섰다. 그를 따라 임시 주택으로 갔다. 도어락 번호를 누르는 할머니 옆으로 수건 3개 널린 건조대가 보였다.

건조대를 두면 꽉 찰 만한 좁은 거실. 그 옆의 작은방 구석에 전기장판이 깔려있다. 발을 딛을 때마다 울림이 느껴졌고, 바닥은 차가웠다. “이래 가지고 살아, 별 거 없지예?”

1년을 지냈지만 컨테이너에는 정이 들지 않는다. 걸어 다닐 때 쿵쿵 소리가 나고, 빨래할 때는 전체가 흔들린다. 벽이 얇아 겨울엔 춥고 바람이 든다. 남향난 할머니(88)는 집에서는 잠만 잔다. 컨테이너에 있으면 가슴이 갑갑해서, 일어나자마자 마을회관으로 향한다.

언제쯤 컨테이너를 떠날까. 집 지을 계획을 묻자 할머니들은 모른다고 했다. 지난해 정부는 산불 이재민에게 정부지원금과 성금을 합해서 보상금을 지급했다. 주택 면적과 피해 규모에 따라 5000만 원부터 1억 2000만 원.

주 씨는 “요즘 집 지으려면 기본이 1억, 2억 넘어가는데 우리들이 돈을 버는 것도 아니라 힘들다. 올해 안에는 집을 지어야 할 텐데…”라고 말했다. 이들은 추가 지원을 기다린다.

저녁 5시 20분. 화동마을 민둥산 서쪽에 해가 걸렸다. 마을에서 읍내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마을회관 앞에 멈췄다. 할머니들도 보행 보조기를 밀며 그늘이 내린 컨테이너로 돌아갔다. 고요한 밤이 화동마을을 다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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