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어프리 자막을 만드는 예비 사회적 기업 오롯 플래닛(오롯)은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읽는다고 한다. 청각 장애인은 등장인물의 대사, 효과음, 배경 음악을 해설한 자막을 보며 영화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국내 청각 장애인은 2021년 12월 기준으로 약 41만 명, 시각 장애인은 약 25만 명이다. 배리어프리 영화는 기존 영화에 화면을 설명하는 음성 해설과 소리 정보를 알려주는 자막을 넣어 모든 사람이 즐기도록 한다. 미취학 아동과 장·노년층에게도 편하다.

하지만 2016년부터 2021년까지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CGV 등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배리어프리 한국 영화를 상영한 횟수는 전체의 1%가 안 된다.

중증 청각 장애를 지닌 이주형 씨(28)는 “영화 보는 걸 좋아하지만 무조건 자막이 있는 해외 영화로만 봤다”며 “어쩔 수 없이 국내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자막을 보는 내내 입 모양만 보고 상황 맥락을 유추해 여전히 전체 내용을 잘 모른다”고 말했다.

오롯의 최인혜 대표(26)는 척박한 배리어프리 콘텐츠 인프라에 문제를 느꼈다. 장애인을 위한 콘텐츠를 기획, 제작, 자문하고 자막 제작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오롯 플래닛을 창업한 이유다. 기자와 2월 6일 만나기 직전까지도 그는 노트북으로 영화 자막을 만들었다.

▲ 오롯플래닛 최인혜 대표
▲ 오롯플래닛 최인혜 대표

그는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뮤지컬을 좋아했다. 외국에서는 청각 장애인이 뮤지컬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알아보니, 이들의 안무는 수어를 바탕으로 했다. 또 공연 기획부터 연출, 출연까지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했다. 장애인의 문화 향유권에 관심이 생겼다.

“내가 지금 있는 공연장에 장애인이 들어올 수 있을까? 시각 장애인이나 청각 장애인은 이 공연을 어떻게 볼까? 고민했어요. 친구에게 당연하게 공연이나 영화보러 가자고 했는데, 내게 당연한 즐거움이 타인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국내에서 배리어프리 자막을 제작하는 곳은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 한국농아인협회, 오롯 등 3곳이다. 지금까지 오롯은 314편의 배리어프리 자막을 만들었다.

또 OTT 서비스 왓챠 플레이(WATCHA)와 협력해 13편의 자막 서비스를 제공했다. OTT 서비스는 인터넷망을 통해 영상 콘텐츠를 제공하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말한다.

오롯은 ‘아이 캔 스피크’, ‘독전’, ‘완벽한 타인’ 등 최신 영화를 위주로 자막을 제작한다. 배리어프리 영화에서 시각 장애인용 음성 해설이 아니라 청각 장애인용 자막에 집중한 이유는 무엇일까.

“청각 장애인과 시각 장애인이 영화를 볼 때 겪는 문제는 전혀 다르다. 배리어프리 개념이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특히 콘텐츠에 배리어프리 개념이 접목되는 것에 대한 인지도가 낮아 해결 방법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있다.”

그는 대학생 시절에 창업하면서 제작 단가를 고려했다. 비용을 덜 들여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다 보니 자막 제작을 선택했다.

배리어프리 영화를 제작하려면 별도의 대본, 사운드, 자막 제작, 연출, 내레이터가 필요하다. 한국 영화 기준으로 배리어프리 영화 제작비는 편 당 약 1400만 원.

비용 절감이 목표인 영화 제작자 입장에서 배리어프리 영화는 일종의 ‘배려’다. 음성해설과 자막을 굳이 넣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최 대표가 배리어프리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개인의 참여를 늘리려고 하는 이유다.

자막 봉사단은 이런 목표 아래 만들어졌다. 봉사단은 배리어프리 영화를 비장애인에게 홍보하면서 더 많은 영화에 자막을 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석이조다. 2022년 11월 기준 약 1200명이 참여한다.

오롯은 자막 봉사단을 운영하며 제작 효율화를 위해 웹사이트를 직접 고안했다. 기존 자막 프로그램은 이 인물이 누구인지, 여기서 나는 소리는 무엇인지를 모두 수기로 입력해 배치해야 했다.

새로 개발한 웹사이트는 등록된 등장인물을 선택하고 그들의 말을 쓰면 화면에 자동 배치된다. 자주 쓰는 상황별 소리 설명도 시스템에 있으니까 클릭만 하면 된다. 최 대표는 “중학생 대상 배리어프리 교육을 나가 자막 프로그램을 설명하면 모두 쉽게 따라 한다”고 말했다.

▲ 오롯의 자막 제작 웹사이트
▲ 오롯의 자막 제작 웹사이트

자막을 제작한 다음에는 청각 장애인 품질 관리 매니저와 직접 검수한다. 청각 장애인의 검수는 필수적이다. 한국어와 한국어 수어는 문장구조, 사용하는 단어가 달라서다.

예를 들어 ‘여론 조사’라는 단어를 수어로 표현할 때는 ‘사람’, ‘사람(남자)의 생각’, ‘사람(남자)의 조사’, 이렇게 세 단어를 연이어 표현한다. 입술 움직임으로 이해하는 구화가 익숙하면 당연한 단어지만, 수어를 제1 언어로 하는 청각 장애인에게는 일반 한국어 자막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품질 관리 매니저는 이런 부분을 발견해 자막의 질을 높인다.

덜어내기는 검수 작업의 핵심. 비장애인은 필요한 자막이라 생각했는데 청각 장애인에게는 필요 없다고 해서 고친 적이 많다.

“딱 봤을 때도 슬픈 표정으로 울부짖기, 환한 표정에 귀여운 웃음소리 같은 소리의 경우는 영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걸 굳이 자막으로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이전에는 자막이 정말 길었는데 검수 작업으로 많이 줄일 수 있었어요.”

오롯은 2019년 11월 연합 동아리 프로젝트 활동에서 시작해 지금은 4년 차 예비 사회적 기업이 됐다. 장애인의 문화 향유를 진심으로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둘 수 없는 성과다. 하지만 아직 나아갈 길이 멀다.

최 대표는 “한 때 누구를 만날 때마다 가족 중에 청각 장애인이 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며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그 그룹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맞나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다”고 했다.

연대의 마음을 담아 오롯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누구나 참여하는 온오프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배리어프리 상영회. 이곳에서 영화를 볼 때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 2019년 ‘제1회 오롯한 상영회’를 시작으로 벌써 17회까지 왔다.

▲ 제1회 오롯한 상영회(좌)와 영화 속 음성 해설 자막(오롯 플래닛 제공)
▲ 제1회 오롯한 상영회(좌)와 영화 속 음성 해설 자막(오롯 플래닛 제공)

수어와 구화를 모두 사용하고 잔존 청력이 있는 김호성 씨(26)는 “배리어프리 자막이 생기며 한국 영화를 즐겨보기 시작했다”며 “영화를 보며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다”고 말했다.

오롯의 온라인 상영회에 대부분 참여한 이주형 씨는 “오롯의 행사는 비장애인, 장애인이 수용하는 정보량이 같아 자주 참여한다”며 “이런 문화를 체험하며 사고와 경험의 폭이 넓어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배리어프리 영화나 공연, 콘텐츠 등으로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청각 장애인이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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