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르비우의 이동식 주택 단지. 이곳에 사는 10살 소녀 베로니카는 전쟁으로 집을 잃었다. 도네츠크 크라마토르스크가 고향이다. 2022년 4월, 러시아군의 집속탄 공격을 받았던 곳. 피란민이 몰린 기차역이 폭발해 민간인 50여 명이 숨지고 300여 명이 다쳤다.

SBS 장선이 기자는 우크라이나인 중에서 베로니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터전을 잃고도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소녀는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강조하며 한국에 꼭 보도해주길 부탁했다.

▲ 장선이 기자와 베로니카(출처=SBS)
▲ 장선이 기자와 베로니카(출처=SBS)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지 1년이 넘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 침공으로 시작했다. 현장은 어땠을까. 취재기를 듣고자 3월 16일, 서울 영등포구 카페에서 장 기자를 만났다.

그는 한국 기자 중에서 가장 오래 우크라이나와 접경지역에 머물렀다. 2022년 4월 12일부터 5월 14일까지 33일이다.

외교부가 2007년 8월부터 여권법에 따라 취재기자에게 여행 금지 제도를 시행하면서, 한국 언론은 루마니아와 폴란드 등 주변국만 취재했다.

전쟁 한 달이 지나서야 일부 취재진이 정부 허가를 받고 우크라이나에 입국했다. 그마저도 수도 키이우와 500㎞ 넘게 떨어진 서남부의 체르니우치만 갈 수 있었다. 비교적 평화로운 지역이다. 하루 4명 이내, 방문 기간은 3일 이내만 가능했다.

제대로 된 취재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유럽 특파원을 포함한 한국 언론인은 현지 취재를 보장하라는 성명을 냈다. 지난해 4월 25일, 외교부는 르비우 등 4곳으로 방문 가능 지역을 확대했고 기간을 5일 이내로 늘렸다.

르비우는 우크라이나의 서부 거점 지역이다. 체르니우치보다 공격이 잦고, 폴란드로부터 군수물자를 전달받는 곳이라 전쟁 상황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장 기자는 방문 허가 소식을 듣자마자 취재를 자원했다. 르비우까지 직접 가보자는 마음에서였다. 루마니아 부크레슈티를 시작으로 루마니아 시레트·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루마니아 이삭체아를 순서대로 거쳤다.

이삭체아에서 부크레슈티로 다시 옮겨갔을 때 외교부가 르비우 취재를 허용했다. 장 기자는 부크레슈티에서 폴란드를 거쳐 5월 7일, 한국 기자 최초로 르비우에 들어갔다.

한국 언론은 5월 26일이 돼서야 수도 키이우에 들어갔다. 외교부가 방문 가능 지역을 11곳으로 확대했고 기간은 2주, 인원은 20명 이내로 늘렸다. 장 기자는 허가가 나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키이우에는 가지 못했다.

전쟁 취재는 자원해야만 갈 수 있다. 위험한 일이라서 회사가 강제할 수 없다. 장 기자는 우크라이나 취재 인력을 모집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애초 기자를 꿈꾼 이유가 종군기자가 되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 걸프전을 보도하는 종군기자를 보며 전쟁 취재에 호기심이 생겼다. 전쟁은 무엇인지, 기자가 되면 현장을 실제로 볼 수 있는지 궁금했다. 베트남전 참전용사인 아버지 경험담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유럽 일부 방역 규정에 따르면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취재원만 입국할 수 있었다. 장 기자는 체질 문제로 백신을 맞지 못했다. 그렇게 특파가 무산되나 싶던 찰나, 코로나19에 감염됐다.

회사는 감염 환자의 재감염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판단해 장 기자를 특파원으로 뽑았다. “취재를 정말 가고 싶었는데, 기회가 다시 주어진 거죠.” 장 기자는 그때를 떠올리며 웃었다.

절차는 복잡했다. 먼저 한국 외교부가 발급하는 예외적 여권 허가서를 받아야 했다. 우크라이나에 도착하면 르비우와 키이우의 미디어센터에서 취재 허가증을 또 받아야 했다. 어디를 가든 취재 허가증과 신분증을 보여줘야 현지 취재가 가능했다.

취재 허가증에는 주의사항이 있었다. 군복과 헷갈릴 수 있는 녹색 옷은 입지 마시오, 항복을 뜻하는 백기를 지참하시오, 구급약을 항상 휴대하시오, 우크라이나 군은 전투지역에서 당신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장 기자는 매일 저녁 8~9시 사이에 잠들고 새벽 2시 30분 일어났다. 보도를 많이 하고, 특히 생중계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당시 뉴미디어 뉴스부 소속이라 저녁 리포트에 담지 못한 현지 상황을 긴 뉴미디어 콘텐츠로 만들려고 했다.

보도하려면 우크라이나어를 영어로, 이어서 한국어로 바꾸는 이중 통역이 필요하다. 뉴미디어 콘텐츠가 길어서 인터뷰 원본 분량이 최소 30분이었다. 취재와 중계로 바쁜 와중에 긴 인터뷰까지 이중으로 통역하려니 잠잘 시간이 부족했다.

일찍 잠들고 새벽에 일어나 인터뷰를 통역하고 현장으로 갔다. 한국 시각 저녁 8~9시 사이에 생중계하려면 현지 시각 오후 2시쯤 중계차를 타야 했다. 장소를 섭외하고 통신 상태를 점검하다 보면 점심은 거의 먹지 못했다.

오후에는 현지를 돌아다니며 추가로 취재했다. 저녁이 돼서야 식사하고 기사를 썼다. “듣기만 해도 힘들다”는 기자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장선이 기자
▲ 장선이 기자

우크라이나에 있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일까. 장 기자는 르비우에서 취재한 전사군인 장례식을 꼽았다.

2022년 5월 11일 오후 3시(현지 시각), 르비우 시청 앞 성당. 조화를 든 시민과 군인, 유가족이 모였다. 고향을 떠나 전사한 군인의 합동 장례식이 매주 열린다. 보안 때문에 군인은 촬영할 수 없었지만, 당국이 취재를 허락했다.

그곳에서 장 기자는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의 관에 어머니가 입을 맞추는 모습을 봤다. 함께 간 영상취재기자와 같이 울었다. “아이 둘을 둔 엄마로서 그 심정이 너무 이해됐고, 가슴 아프더라고요.” 이 말을 하는데 장 기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르비우에서는 전쟁 성폭력 피해 여성의 이야기도 들었다. “빙산의 일각만 드러났지만, 굉장히 끔찍한 범죄가 있었다. 취재하면서 화가 났다.”

한국 취재진이 들어갈 수 없는 키이우 부차에서는 러시아군의 성폭력 범죄를 고발하는 외신 보도가 쏟아졌다. 장 기자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외신을 인용하지 않고 현장에 직접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여행 금지 지역을 방문할 수 없어서 르비우에서 취재할 곳을 찾았다. 전쟁 성폭력 피해 여성을 지원하는 우크라이나여성변호사협회 본부가 르비우에 있었다. 장 기자는 르비우에 가기 전부터 일주일가량 텔레그램과 메일로 연락했다.

본부에서 해리스티나 대표를 만났다. 협회는 지난해 4월부터 러시아군에게 성폭행당한 여성을 위해 심리 상담을 하고 치료를 돕는다.

피해 여성은 2차 가해를 우려해 인터뷰를 거부했다. 다만 사실을 보도해달라는 의지만은 강했다. 여성 25명을 지하실에 가둬놓고 성폭행한 일, 집단 매장지에서 성폭행당하고 살해된 여성 시신이 무더기로 발견된 일…. 여성은 협회를 통해 실상을 알렸다.

전쟁 취재라서 힘든 점은 없었는지 묻자 장 기자는 “없었다”고 했다. 쪽잠을 자고, 끼니를 거르고, 공격에 대비해야 하는 모든 상황을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오히려 외교부 제약으로 키이우 같은 전쟁 중심지를 방문하지 못해서 취재가 힘들었다고 한다.

전쟁 취재를 위한 체계적 매뉴얼이 없었던 점도 고충이었다. 현장에서 모든 일을 스스로 준비하고 대비해야 했다. 장 기자는 이를 “현장 박치기”라고 표현했다.

열차를 타고 이동할 때는 안전에 신경 썼다. 집중 공격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안전 장비를 착용하지 않았다. 전쟁 취재는 보여주기식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 장선이 기자가 르비우 변전소 지붕에서 중계하는 모습(세르게이 씨 제공)
▲ 장선이 기자가 르비우 변전소 지붕에서 중계하는 모습(세르게이 씨 제공)

가족은 보도를 어떻게 봤을까. 아버지 장석보 씨(79)를 서울 영등포구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커피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

딸의 우크라이나 특파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걱정이 컸다. 전쟁을 직접 겪었기에 누구보다 위험성을 잘 알았다. 그는 1966년 무렵,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나트랑에서 약 1년간 머물며 고엽제 후유증을 얻었다. 신장을 이식받았고 아직까지 오른쪽 귀가 잘 안 들린다.

딸이 우크라이나로 간다고 하자 여러 차례 말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체에 무차별 공격을 퍼부어서 안전 지역이 없다고 생각했다.

“베트남전은 한국전쟁 때처럼 전·후방이 따로 없었어요. 베트콩이 국토 전체를 공격하니까 아주 위험했죠. 우크라이나도 베트남전처럼 안전지대가 따로 없어 보여서 걱정이 많이 됐어요.”

외교부가 허락한 안전 지역에서만 취재한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폭격을 맞은 르비우 변전소에서 중계하는 딸의 모습을 보며 가슴을 졸였다. “혹시 공격이 또 있을까봐 너무 걱정됐죠.”

그럼에도 기자로서는 꼭 해야 하는 보도였다고 말했다. 딸의 보도를 어떻게 봤는지 묻자 “현장을 심도있게 잘 담았다”며 “가치있는 보도”라고 했다.

취재에 동행한 이재영 영상취재기자는 현장 진입 자체가 위험했다고 말했다. 공습경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울렸고, 외곽 지역에는 미사일이 불시에 떨어졌다. 생중계 10분을 남겨두고 공습경보가 울려 대피한 적도 있었다. 이 기자는 그런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현지인을 보며 장 기자와 함께 마음을 다잡았다.

이 기자 역시 취재를 자원했다. 현장 경험이 풍부했고, 디지털팀 소속이라 전쟁 보도 콘텐츠 제작의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장 기자는 “이재영 선배가 없었으면 우크라이나 취재를 못 했을 것”이라며 “경험이 워낙 풍부한 베테랑이라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와 접경국에 갈 때마다 노란 유채꽃이 가득 폈다. 이 기자는 누구도 그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 유채꽃이 지고 다시 흐드러지게 폈을 텐데, 전쟁이 여전히 끝나지 않은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 장선이(오른쪽) 이재영 기자와 현지 취재원 세르게이 씨(세르게이 씨 제공)
▲ 장선이(오른쪽) 이재영 기자와 현지 취재원 세르게이 씨(세르게이 씨 제공)

체르니우치 주민 세르게이 씨(32)는 지난해 4월 중순, 장 기자를 만났다. 시의회 어느 부서의 부책임자 자리를 그만두고 전쟁 피해를 지원하기 시작한 때였다. 전쟁을 끝내려면 실상을 최대한 많이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 기자의 취재 요청을 받아들인 이유다.

두 번째 만남은 5월, 르비우에서였다. 러시아 공격이 심해지자 세르게이 씨는 키이우나 드니프로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곳에서 국제의료단체(Medical Teams International)를 도와 부상자 치료를 지원한다.

그는 장 기자를 “사람에 집중하는 기자”라고 설명했다. 누구를 만나든 존중했고 예의를 갖췄다고 했다. 또 장 기자를 “감정에 집중하는 기자”라고 표현했다.

예를 들어 장 기자는 취재할 때 과거 이야기로 마음의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했다. 집을 잃은 이들이 비극적인 얘기를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 기자의 이런 노력이 담긴 질문 덕분이었다.

“제가 아는 장선이 기자는 허가만 있었다면 며칠이 아니라 몇 주를 현장에 머물렀을 거예요.” 한국 외교부의 취재 제한 때문에 쉬지 않고 일했다고 장 기자의 모습을 설명했다.

세르게이 씨는 폭격을 맞은 르비우 변전소 이야기를 꺼냈다. 울타리가 높아 현지인조차 손을 못 쓰는데, 장 기자가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서 취재했다. 세르게이 씨는 “이건 그냥 예시 하나일 뿐”이라며 그곳의 우크라이나인 모두가 장 기자의 노력을 높이 샀다고 했다.

세르게이 씨는 한국 언론에 대한 감사 표시도 덧붙였다. 지금은 위험지역인 자신의 고향에 위험을 무릅쓰고 와줘서 감명했다고 전했다. “전쟁 상황을 취재하고 널리 알려서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우크라이나에 왔을 거예요.”

▲ 러시아 공격을 받은 키이우 보로얀카(왼쪽)와 부차(세르게이 씨 제공)
▲ 러시아 공격을 받은 키이우 보로얀카(왼쪽)와 부차(세르게이 씨 제공)

장 기자는 제20회 한국여성기자상 취재부문상을 올해 1월 10일 받았다. 심사위원회는 르비우 현장 보도를 “요즘 많은 기자가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에 의존해 취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장 취재의 진수를 보여준 수작”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해외의 전장에서 한국 기자로는 최장 기간 체류하며 전쟁의 참혹함과 반인륜적 성폭력 범죄를 치열한 기자 정신으로 고발했다”고 했다.

장 기자는 전쟁 보도 준칙과 대비 시스템이 생기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분쟁지역 전문기자를 양성하고, 주요 분쟁지역의 사정을 잘 아는 이들과의 연결망을 평소에 잘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장비와 무기, 억류됐을 때 행동 요령, 위험지역 이동 요령 같은 정보를 사전에 교육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는 현장에서 오래 취재하기를 희망한다. 기자 생활을 2007년 시작해 올해로 17년차. 주말에는 후배 기사를 검토하는데, 현장에 나가지 못해서 아쉽다고 했다. “기자로 있는 동안에는 현장을 뛰고 싶어요, 어디든. 현장에 가야 한다면 언제든 손을 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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