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북구의 형제복지원은 1960~90년대 폭행, 노역, 성폭력이 있었던 곳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로 1차 191명, 2차 146명에 대한 진상을 규명했다. 그러나 영화숙과 재생원의 진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국제신문 신심범 기자는 형제복지원 이전에 영화숙과 재생원이 있었다는 기사를 2022년 11월 1일 보도했다. 보도는 경남 양산의 프레스센터에서 시작됐다.

손석주 씨(61)가 그해 10월 26일 이곳을 찾았다. 국제신문 김성룡 기자는 손 씨와 대화하고 신 기자에게 소개했다.

손 씨는 신 기자를 만나 50년 전, 재생원에서 있던 일을 전했다. 10평 채 안 되는 방에 약 50명이 모로 누워 잤다, 완장을 찬 원생이 원생을 때렸다, 물 같은 강냉이죽이나 보리밥 두 끼로 하루를 견뎠다, 죽은 아이들은 야산에 묻었다….

▲ 신심범 기자
▲ 신심범 기자

기록도 없는 50년 전의 일을 한 사람의 증언만 믿고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신 기자는 “남의 이야기를 하며 있었던 일을 있었던 일로 만들어 달라고 우는 사람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취재를 시작했다.

먼저 1970년대 신문에서 영화숙과 재생원의 흔적을 찾았다. 또 부산 부랑인 수용시설에 대해 논문을 썼던 서울대 김일환 박사와 전화하고 자료를 받기도 했다. 김 박사가 보낸 자료와 증언을 대조하지 피해 시기, 공간, 양상이 일치했다. 그렇게 첫 기사를 내보냈다.

보도가 나가자 같은 곳의 피해자라며 5명이 제보했다. 그중 유수권 씨(71세·가명)가 있었다. “나도 영화숙 피해자다. 손석주에게 밥 한 끼 사주고 싶다.”

신 기자는 유 씨에게 시설의 과거 위치를 알려달라고 했다. 부산 지하철 1호선 동매역에서 만나 함께 걸었다. 유 씨는 사하소방서부터 사하경찰서까지 휠체어를 타고 위치를 되짚었다.

“이 길은 쓰레기장이었고 어릴 때 이곳을 똥통이라 불렀다. 매립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물이 들어가 땅이 흐물흐물해지면 이곳에 죽은 애를 막대기로 꾹 눌러 가라앉혔다.”

유 씨는 울면서 이야기했다. 사하경찰서 뒤에 있는 자동차학원 안쪽에 평평한 비탈길이 시설 운동장이었다고도 말했다. 신 기자가 학원 부지에 들어가니 유 씨 말처럼 평평한 땅이 있었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두 사람이 지나온 곳은 부산 사하구 신평동 569-34번지. 사하구청에 확인한 1970년대 주소는 부산 서구 장림동 121번지였다. 과거 법인대장에 적힌 영화숙 위치와 같다. 증언과 기록이 일치했다.

신 기자는 “그때 처음으로 기록에서 (증언이 사실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국제신문은 2022년 11월 1일부터 2023년 3월 2일까지 보도를 이어갔다.

▲ 피해자 증언
▲ 피해자 증언

신 기자가 기록을 찾는 동안 피해자들은 연대모임을 만들었다. 첫 시작은 손 씨와 유 씨의 만남이다. 유 씨는 “석주를 처음 볼 때 찻길에서 둘이 엉엉 울었다”며 “그 시절 아픔은 시설 사람들만 안다”고 말했다.

국제신문 보도로 추가 피해자가 나오고 11월 30일 부산인권센터에서 피해자가 처음 모였다. 그렇게 만든 영화숙·재생원피해자협의회에는 피해자 16명이 있다.

탈시설운동단체인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도 함께했다. 이정하 활동가는 “진실화해위원회에 제출할 개인 진정을 돕고 피해자 직권조사를 함께 요청한다”고 말했다. 대부분 70~80대인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는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협의회는 올해 1월 3일과 3월 14일에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부산시의회 송상조 의원이 2월 24일 ‘부산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명예회복 및 지원에 관한 조례 전부개정조례안’을 발의했다. 피해지원을 영화숙·재생원과 같은 시설로 확대했다.

송 의원은 “지역신문을 통해 영화숙, 재생원 사건을 접했다”며 “피해자 및 관련 자료의 발굴을 통해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상담을 통한 심리치료 의료 및 생활안전 지원 추념사업 등으로 피해자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조례개정안을 발의했다고 밝혔다. 개정안은 3월 17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피해를 말하기까지 왜 50년이 걸렸냐는 기자의 질문에 손 씨는 “진실을 알리고자 했지만 사회에서 받아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1983년 영화숙에서 부산 소년의집으로 옮긴 장병문 씨는 책 ‘잃어버린 자식들’에 당시 영화숙 모습을 담았다. 1998년 김백수 목사는 아침마당 한가위 기획 ‘그 사람이 보고싶다’에 출연해 영화숙 수용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유 씨도 1987년 억울한 마음에 시청을 찾아가 영화숙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시청 직원은 “그런 곳이 어디 있었냐”며 업무 방해로 유 씨를 파출소에 신고했다. 유 씨는 15일 구류처분을 받았다.

신 기자는 “자신의 피해를 인정받고 싶었던 손석주 씨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 보도가 공론화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한국기자상을 수상한 국제신문 기자들(출처=한국기자협회)
▲ 한국기자상을 수상한 국제신문 기자들(출처=한국기자협회)

이 보도로 국제신문 신심범 김성룡, 정지윤 기자는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한국기자협회 심사위원회는 “형제복지원에 묻혀서 드러나지 않았던 부랑인시설 ‘영화숙, 재생원’ 수용자들 피해 실태 심층 보도를 통해 1960~1970년 사회복지시설의 사회적 약자 착취 실태에 대한 체계적인 진상규명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신 기자는 이번 일이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목표는 영화숙과 재생원에 관련된 부산시 공문을 찾는 것이었다. 입소한 아이들 명단이 반드시 찾아야 할 자료였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1987년도에 알려지고 진상규명이 가능했던 이유는 사건을 입증할 입소기록 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 기자는 “영화숙과 재생원이 부산시로부터 양곡을 받았다면 (입소아동 명단이 적힌) 문서가 분명 부산시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 씨와 유 씨 역시 “(조례안은) 집을 짓는 데 기둥 하나 세운 격”이라고 말했다. 법적 토대만 마련됐을 뿐 진상규명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의미다. 유 씨는 이렇게 말했다. “(산에) 묻혀있는 사람들, 부산시에서 알아주는 거, 진상 조사해서 피해가 밝혀지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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