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에서 (국가가) 정당을 보호하도록 말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 정당은 국가가 보호하는 조직이 아니에요. 자생적인, 일종의 사조직 개념으로 생각하죠.”

경북대 엄기홍 교수(정치외교학과)는 전화 인터뷰에서 한국과 미국의 ‘정당’ 개념을 이렇게 비교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8조는 “정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정당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보조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정부는 정당 운영을 위한 경상보조금, 선거 때 지급되는 선거보조금과 추천보조금을 지급한다. 반면 미국은 정당 운영에 대한 직접적인 국고보조금 제도가 없다. 연방대통령선거(대선)에 한해 제한적으로 선거보조금(public funding)을 지급할 뿐이다.

 

▲선거보조금 거절하는 미국 대선후보들

미국은 조건을 충족한 후보자가 신청할 경우에 한해 선거보조금을 지원한다. 주목할 점은 ‘정당’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한국과 달리 ‘후보자 개인’에게 지급한다는 사실이다. 미국 연방법 제26조(국세법) H항은 대선 캠페인 자금 및 지급 대상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해당 법에 따르면, 직전 대선에서 득표율 25%를 넘긴 정당의 후보자는 선거보조금을 신청해 받을 수 있다. 5% 이상을 얻은 소수정당 후보자는 직전 대선에서 기록한 투표율에 비례한 수준에서 지원받을 수 있다. 신생정당의 후보자도 득표율 5% 이상을 기록하면 득표율에 비례한 만큼 선거비용을 일부 보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대선후보들은 선거보조금 지원을 거절하는 추세다. 선거보조금을 받게 되면 지출에 제한이 생겨서다. 선거보조금을 받은 대통령 후보는 모든 예비선거에서 최대 1,000만 달러에 생계비(COLA, cost of living adjustment) 상승률을 반영한 액수까지만 선거비용으로 쓸 수 있다. 본선거는 최대 2,000만 달러에 COLA 상승률을 반영한 값이 지출상한선이다. 이때 COLA는 매해 노동부에서 발표하는 수치에 맞게 조정된다. 개인자금 지출 역시 5만 달러로 제한된다. 일부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 개인 후원금도 받을 수 없다.

반면 선거보조금을 지급받지 않은 후보는 선거운동에 얼마를 써도 상관없다. 선거자금을 모을 능력이 충분한 대선후보들이 보조금 지원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다. 실제 2020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모두 선거보조금을 받지 않았다. 2012년과 2016년 대선에서도 양당의 주요 후보들은 보조금 대신 개인 후원금을 택했다. 2008년에는 존 매케인 후보만, 1980~2004년에는 양당의 주요 후보들 모두 선거보조금을 받았다.

▲ 대통령 선거 비용 추세(1984~2020년)
▲ 대통령 선거 비용 추세(1984~2020년)

이런 추세는 미국의 선거비용이 급증하면서 두드러졌다. 2012년을 제외하고 1992년부터 2020년까지 선거비용은 꾸준히 증가했다. 2020년 대선은 역대 가장 비용이 많이 든 선거였다. 당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약 10억 7,391만 달러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약 8억 875만 달러를 썼다. 선거보조금을 받았다면 지켜야 했을 지출상한액(약 1억 370만 달러)을 훌쩍 뛰어넘는 액수다.

 

▲ 민간 후원 입김 센 미국 선거

그렇다면 미국 대선 후보들은 정치자금을 어디서 얻을까. 주로 개인 후원자나 정치활동위원회(PAC·Political Action Committee) 등의 모금으로 마련한다. PAC란 기업이나 노동조합, 이익단체 등이 특정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후원하기 위해 만든 단체다.

지난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정치자금 재원은 후원(Contributions)이 약 76.7%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전금(Transfers from other authorized committees)이 약 22.7%로 뒤를 이었다. 후원 출처는 개인  99.9%, PAC 등 기타 위원회 0.07%, 정당 위원회(Party committee) 0.03% 순이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역시 후원이 약 60%로 가장 많았으며 이전금은 약 38.2%였다. 후원 세부 항목에서는 개인이 99.8%, PAC 등 기타 위원회가 0.2% 순이었다.

▲ 2020년 대선 당시 바이든 대통령(왼쪽)과 트럼프 전 대통령(오른쪽)의 정치자금 (FEC 홈페이지 캡쳐)
▲ 2020년 대선 당시 바이든 대통령(왼쪽)과 트럼프 전 대통령(오른쪽)의 정치자금 (FEC 홈페이지 캡쳐)

직접 후원에는 금액 제한이 있다. 누가 어디에 후원하느냐에 따라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상한선을 정하는 식이다. 예컨대 올해 후보자위원회에 기부하려는 개인은 선거당 최대 3,300달러까지 후원할 수 있다. 반면 간접적인 방식의 후원은 사실상 무제한이다. 2010년 Citizens United v. FEC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은행, 기업, 노동조합 등의 독립지출을 제한하는 기존 규제가 수정헌법 제1조(표현의 자유)에 위배된다고 봤다. 기업 등 영리단체의 정치 광고 및 홍보 활동을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로 본 것이다. 이 판결로 모금과 지출을 무제한으로 할 수 있는 일명 ‘슈퍼팩(Super PAC)’을 통한 후원이 활발해졌다.

이처럼 막대한 선거비용과 민간 후원에 의존하는 특징은 ‘돈 선거’라는 오명도 불렀다. 과도한 선거 비용이 부패나 정치혐오를 조장하고, 일부 후원자의 영향력을 키워 대표성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엄 교수는 “정치인들은 당선되면 끝이 아니라 재선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선거를 치르기 위한) 자금을 마련해야 하니 돈 많은 사람들에게 휘둘릴 위험이 있다”며 “이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100% 국가가 돈을 대는 선거공영제를 하는 거지만, 그러면 반대로 정치가 국가 조직을 장악한 이들에게 휘둘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민간 후원금과 국고 보조금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2023-2024 미 연방선거 기부제한액(FEC 홈페이지 캡쳐)
▲2023-2024 미 연방선거 기부제한액(FEC 홈페이지 캡쳐)

균형을 잡을 방법은 없을까. 엄 교수는 매칭 펀드 방식을 제안했다. 매칭펀드 방식이란 후보자가 정치자금을 모금한 것에 비례하여 일정한 공적 자금을 지원하는 제도다. 당비나 후원금 등 정당의 자체적인 모금액에 비례해 국고보조금을 받기 때문에 유권자의 의사를 정책에 더 반영할 수 있단 평이다. 실제로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지방선거에 매칭 펀드 방식을 활용해 선거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하와이, 메릴랜드, 메사추세츠, 미시간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국고보조금은) 당연히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의 자생적인 활동이 요구돼야 한다”며 “당원비를 통해서건 다른 식이건 정당이 돈을 모으는 만큼 지급을 해주는 매칭 펀드 방식으로 가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출내역 공개는 빠르고 투명하게

미국은 정치자금 사용 내역이 유권자에게 비교적 투명하게 공개된다. 엄 교수가 쓴 논문 「한국 정치자금제도에 대한 평가」에 따르면, 미국의 정치자금 투명성 점수는 총점 258점 중 248인 반면, 한국은 123점이다. 등급으로 나눌 경우, 미국은 A+인데 반해, 한국은 F인 셈이다.

엄 교수는 이러한 차이가 ‘접근성’에서 기인했다고 봤다. “정치자금 내역이 인터넷에 게재될 수 있는지”가 핵심이란 것이다. 한국의 정치자금법 제42조 2항에 의하면, 관할 선관위는 보고된 재산상황, 정치자금의 수입⋅지출내역 및 첨부서류를 그 사무소에 비치해야 한다. 선거비용에 한해 열람대상 서류 중 수입과 지출명세서를 선관위 홈페이지에 공개할 수 있다. 열람기간은 공고일로부터 3개월에 불과하다. 열람기간이 아닌 때에는 이를 공개할 수 없다.

미국은 연방선거위원회(Federal Election Commission, FEC)에서 선거자금의 수입 및 지출 내역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같은 곳인데, FEC의 경우엔 그 역할이 선거자금법 집행 영역에 한정돼 있다. 후보자와 PAC는 FEC에 정치자금의 수입 및 지출 내역을 보고할 의무가 있다.

정당이나 선거후보자들이 제출한 선거 후원금 내역은 매주 심사하고, 2주에 한 번씩 공개 심사도 이뤄진다. 유권자는 FEC에 제출된 지정서, 명세서, 보고서를 위원회 사무소에서 열람할 수 있다. 공개된 내역은 ‘오픈 시크릿(open secrets)’ 등 비영리단체들이 일반 유권자들도 알기 쉬운 방식으로 재가공하기도 한다.

▲ 비영리단체 오픈시크릿은 선거 캠페인 지출 데이터를 항목별로 분류해 공개하고 있다. (홈페이지 캡쳐)
▲ 비영리단체 오픈시크릿은 선거 캠페인 지출 데이터를 항목별로 분류해 공개하고 있다. (홈페이지 캡쳐)

지출 내역이 빠르게 공개되는 것도 미국의 특징이다. 선거 자금의 심사부터 공개까지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FEC는 접수일로부터 48시간 이내, 디지털로 제출된 경우 24시간 이내에 유권자가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 선거일부터 지출내역 공개까지 30일 이상(대통령 및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40일)이 걸린다.

지난 2021년 5월 27일, 헌법재판소는 자금지출내역을 공고일부터 3개월만 볼 수 있게 하는 정치자금법 제42조 2항의 일부 내용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헌재는 열람기간 제한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3개월인 현행 기간이 지나치게 짧다고 판단했다. “(국민이) 자료를 충분히 살펴 분석하거나, 문제를 발견할 실질적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는 바 해당 조항은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돼 알권리를 침해한다”는 게 헌재의 설명이다.

중앙선관위는 정치자금의 상시공개 필요성을 밝힌 의견서를 20대 국회에 제출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관련 법안은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도 박주민 의원, 김철민 의원 등이 일부개정 법률안을 냈지만, 행정안전위원회에 멈춰있다. 국회가 법안을 외면하는 동안, 국민의 알 권리도 표류하고 있다.

 

▣ 박찬희, 이수연 기자가 이 기사를 같이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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