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8일 오후 6시 15분,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촌역 플랫폼. 안전문마다 약 10명의 승객이 열차를 기다렸다. 키가 156cm인 기자가 크게 13걸음을 걸을 때마다 1대씩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이대역 방향으로 가는 내선 순환 열차가 들어온다는 방송이 나왔다.

기자는 스피커 2대 사이에 서서 안내방송을 녹음하고 AI 음성인식 프로그램에 넣어봤다. ‘지금 이 방으로 가는 내성 수만 남자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열차가 들어온다는 내용은 인식했지만, 역 이름과 방향은 명확히 나오지 않았다.

 행정안전부는 지역축제 인파 사고 등 신종재난에 대비하는 국가 재난대비 훈련 기본계획을 3월 5일 발표했다.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많은 인파가 한 곳에 몰리는 상황에서, 대피 안내를 명확히 전달받는 게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였다.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 3일에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다중밀집 인파 사고 예방 안전관리 대책 마련을 위한 특별팀 회의’를 열었다. 지하철 역사 등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고 예방책을 논의했다. 지하철에서 재난이 발생하면 안내방송을 명확히 알아듣고 대피할 수 있을까.

기자는 2월 28일과 3월 3일, 지하철 안내방송의 명료도를 측정했다. 갤럭시 S23 휴대전화로 녹음했고, AI 음성인식 프로그램인 네이버 클로바노트를 이용해 글자로 변환했다. 비상 방송설비의 소리 명료도를 주제로 논문을 작성한 정정호 방재시험연구원 수석연구원과 김영선 서울대 교수(음악과)에게 측정방법을 자문했다.

▲ 명료도를 측정한 역사의 스피커
▲ 명료도를 측정한 역사의 스피커

기자는 지하철역 17곳에서 측정했다. 2호선이 12곳(강남역 구로디지털단지역 사당역 삼성역 서울대입구역 선릉역 신도림역 신림역 신촌역 역삼역 잠실역 홍대입구역)이고, 3호선이 5곳(고속터미널역 남부터미널역 신사역 압구정역 양재역)이다.

여기서 AI 음성인식에 성공한 곳은 4개 역(강남역 사당역 신도림역 신촌역)이었다. 13곳은 음성을 변환할 수 없는 수준, 3호선 5개 역은 모두 음성인식에 실패했다.

음성인식에 성공한 4개 역에서 신도림역만 승강장 한 곳에 두 방향 열차가 들어오는 양방향 구조(섬식 승강장)였다. 일방향 승강장(상대식 승강장)인 강남역 사당역 신촌역은 진행 방향까지 음성인식에 성공했다.

양방향 승강장인 신도림역에서는 다음 역 이름이 인식되지 않았다. 지하철 정기권을 사용하는 윤봉오 씨(50)는 “열차가 들어온다는 말은 들리는 데 역 이름이 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 음성인식에 성공한 플랫폼 안내방송 결과
▲ 음성인식에 성공한 플랫폼 안내방송 결과

양쪽 열차가 같이 들어오는 상황에서는 안내방송을 알아듣기가 더 어려웠다. 3월 3일 오전 11시 40분, 신림역 승강장에 신대방역 방면 열차와 봉천역 방면 열차의 안내방송이 9초 간격으로 비슷하게 나오자, AI 프로그램이 음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열차 소음도 안내방송을 듣는 데에 방해가 되는 요인. 3호선 남부터미널역 승강장에서는 교대역 방면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와 겹친 안내방송 초반부는 인식되지 않았다. 김 교수는 “스피커에서 발생한 직접음이 벽에 반사돼 돌아오는 반사음과 섞이면 소리의 명료도가 떨어진다”며 “공간의 크기가 클수록 소리가 섞일 때 인식이 어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3호선을 이용하는 고아영 씨(31)는 “주변 소음 때문에 (안내방송이) 안 들렸던 경험이 있다”며 “사람이 많거나 출퇴근 시간에 그런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정휘민 씨(30) 역시 “안내방송을 잘 못 들었던 기억이 많다”고 이야기했다.

▲ 신림역과 남부터미널역 음성 인식 결과
▲ 신림역과 남부터미널역 음성 인식 결과

구로역 사당역 서울대입구역 선릉역 잠실역은 승강장의 전광판 광고 소리가 크다는 공통점이 있다. 5개 역 중 음성인식에 성공한 역은 사당역 1곳이고, 나머지 4곳은 음성인식에 실패했다.

주변 소음이 커질수록 음성이 명료하게 들리지 않는 상황에 대해 김 교수는 “광고 소리가 안내방송을 마스킹(Masking)해서 생기는 현상으로 보인다”며 “광고 음량의 크기를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하거나, 안내방송이 나올 때는 광고 소리를 무음으로 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마스킹은 소음이나 잡음으로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현상이다.

지하철 열차 안의 안내방송 명료도도 측정했다. 2호선(낙성대역 대림역 서울대입구역 신림역)과 3호선(고속터미널역 남부터미널역 압구정역 잠원역)에서 도착 안내방송을 녹음했다. 지하철 소음에 따라 음성인식 정도에 차이가 있었다.

안내방송과 지하철 운행 소음이 겹친 고속터미널역 서울대입구역 잠원역에서는 음성인식에 실패했다. 비교적 지하철 소음이 적은 나머지 5개 역은 정도에 차이가 있으나 음성인식에 성공했다.

3호선을 이용하는 유찬빈 씨(26)는 “(다음 역이) 어느 역인지를 확인하지 못한 경험이 많다”며 “지하철에 사람이 많으면 전광판 가리는데, (안내방송도) 잘 들리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서울교통공사는 지하철 안내방송이 잘 들리지 않는 상황에 대해 “2022년 초 ‘발 빠짐 주의’라는 안내방송이 ‘발 빠진 쥐’로 들린다고 해서 한번 개선한 적이 있다”며 “(안내방송의 명료도와) 관련한 문제는 없다고 판단해 개선 방안이나 계획은 없다”는 입장이다.

▲ 음성인식에 성공한 열차 내 안내방송 결과
▲ 음성인식에 성공한 열차 내 안내방송 결과

비상 상황에서는 안내방송을 명료히 전달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정 연구원은 “화재 등 재난 상황에서는 당황스럽고 판단도 안 된다”며 “소리에 집중하기 어렵기에 안내방송이 정확하게 들리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비상방송설비의 화재안전기준(NFSC 202)은 비상방송설비의 설치 및 안전관리에 필요한 사항을 명시한다. 전관 방송설비, 즉 일반 안내방송은 이 기준을 사용한다. 제4호 음향장치 조항에 따르면, 비상 방송의 소리 크기를 의미하는 음성입력 수준을 3W(와트) 이상으로 규정한다.

정 연구원은 “해당 기준에는 음성이 명료하게 전달되는지를 다루는 부분은 없다고 본다”며 “스피커의 소리 크기와 실제로 사람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다르다”고 설명했다. 비상방송설비의 화재안전성능기준(NFPC 202) 역시 비상안내방송의 명료도를 기준으로 두지 않는다.

비상방송이 명료하게 들리지 않으면 시각장애인에게 더욱 위험하다. 정승원 장애인인권대학생네트워크 명예위원은 “인파나 소음에 묻혀 지하철 안내방송이 작게 들렸던 경험이 있다”며 “상황을 면밀하게 지켜보고 대처할 수 없어서 안내방송이 명확히 들리지 않는다면 불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인 역시 안내방송을 명료하게 듣기 어렵다. 정 연구원에 따르면 안내방송은 주로 고음인데, 노화할수록 잘 들리지 않는다. 2호선 승객 임남월 씨(80)는 “플랫폼에서는 (안내방송이) 흐릿하게 들린다”며 “사람 많은 지하철 안에서는 더 잘 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NFSC 202는 수평거리로 25m 이하마다 스피커를 설치하도록 규정한다. 공간에 사용된 자재나 층고에 따른 세부 내용은 명시하지 않는다. 정 연구원은 “스피커가 모든 공간에 똑같이 설치되는 게 문제”라며 “공간마다 성능 평가를 다르게 해서 스피커를 설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음성 전달 지수(STI)를 이용해 비상 방송의 음성 명료도 평가를 제안한다. 국제표준기구(ISO)는 화재 경보 시스템의 성능 기준으로 STI를 표준화했다. 국제전기표준회의(IEC)는 명료성을 고려해 음성을 평가하는 객관적인 방법으로 STI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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