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보약 먹은 것보다 더 좋으네!” 노란 패딩을 입은 할아버지는 밥그릇을 내려놓으며 큰 소리를 냈다. 동트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 서울시 동대문구 밥퍼나눔운동본부(밥퍼)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새벽 거리를 비췄다.

▲ 2월 17일 새벽 6시 밥퍼나눔운동본부(밥퍼) 입구
▲ 2월 17일 새벽 6시 밥퍼나눔운동본부(밥퍼) 입구

밥퍼는 노인에게 무료로 아침과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 민간 운영 사회복지법인이다. 1988년부터 노숙인에게 음식을 제공해왔다. 35년간 봉사자와 후원자 도움으로 운영됐다. 스토리오브서울 취재진은 2월 17일 오전 6시, 밥퍼를 찾았다.

밥퍼에선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주방장 김동열 씨(62)를 포함해 3명의 봉사자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이날의 메뉴는 푹 끓인 구수한 숭늉, 소화가 쉬운 콩고기 소시지 핫도그, 그리고 잘 익은 귤.

‘이 땅에 밥 굶는 이 없을 때까지.’ 식당 앞엔 나무 명패가 걸려있다. 아침 식사는 7시부터 나눠준다. 아침에 약 100인분을 준비하면 60~70명의 노인이 온다고 했다. 식사가 시작되려면 한 시간이 남았지만, 노인 25명은 이미 식당에 앉아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 아까 3시부터 왔어. 문을 안 열어서 저기 바깥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지.” 백남열 할머니(86)는 이날 밥퍼를 가장 빨리 찾은 손님이다. 밥퍼가 문을 여는 시간은 오전 5시 30분. 무료해서 미리 와서 기다렸다고 했다.

그는 밥퍼에서 아침 식사를 주기 전에는 귀찮아서 아침을 걸렀다고 했다. 밥퍼를 찾은 지 24년. 백 할머니는 아침, 점심을 밥퍼에서 해결한다. 점심 식사가 끝나면 시장에서 장을 보고 집에서 저녁 준비를 한다.

▲ 밥퍼에서 아침 식사를 기다리는 노인
▲ 밥퍼에서 아침 식사를 기다리는 노인

민용배 할아버지(72)는 텔레비전 바로 앞에 있는 식탁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오전 6시 25분. 그는 뉴스를 보며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2월부터 밥퍼를 찾았다는 민 할아버지.

그는 밥 먹을 돈이 부족해 밥퍼에 온다고 했다. 혼자 사는 그에게 한 끼를 차려 먹는 일은 부담이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된 후로부터 밥 먹을 돈이 없어. 정부에서 돈 받으면 방세로 나가고, 남은 돈은 약값으로 나가니까.” 그는 혈압약 3알이 들어있는 약봉지를 쥐고 있었다.

주황색 앞치마를 입고 아침을 준비하는 봉사자들. 그 사이에 초록색 조끼를 입고 식자재 카트를 끄는 한 할아버지가 보였다. 그는 봉사 4년 차인 84세 노인이다. 13년 전, 가족과 뜻이 맞지 않아 홀로 살기 시작했다.

밥을 지을 줄 몰라 처음엔 돈을 주고 음식을 사 먹었다. 하지만 돈은 금세 동이 났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그는 구청과 주민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일자리를 달라고 했지만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다 지인을 통해 밥퍼를 알게 됐고, 이틀 동안 밥퍼에서 무료 배식을 받았다. 살펴보니 밥퍼엔 일손이 부족했다. 마침 집도 가깝겠다, 밥도 얻어먹겠다, 그는 일손을 돕기로 결심했다. 밥퍼에선 소정의 지원을 해준다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밥퍼에서 밥을 먹는 걸로 충분했다. 그렇게 매일 같이 새벽에 와서 일손을 도운 게 벌써 4년째다.  

▲ 아침을 준비하는 주방장(위)과 배식 받는 노인(아래)
▲ 아침을 준비하는 주방장(위)과 배식 받는 노인(아래)

오전 7시, 봉사자 2명이 더 오자 배식이 시작됐다. 노인들이 한 줄로 섰다. 두 손으로 음식을 받으며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배식에 걸린 시간은 단 7분. 2명의 노인이 숭늉을 추가로 받아 갔다.

밥퍼에선 원래 아침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점심을 먹기 위해 새벽부터 40~50명씩 줄을 서 있었다. 눈 뜨면 집이 춥고, 외로운 마음에 일찍 온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주방장 김 씨는 “따뜻한 숭늉이라도 한 그릇씩 드리려고 하다 보니 시작하게 됐어요. 우리한텐 숭늉이 간편식이고 다이어트 음식이지만 저분들껜 생명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올해 2월 1일부터 아침 식사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아침을 먹고 밖으로 향하는 노인들을 따라갔다. 담배를 피우거나, 집에 가거나, 문 앞에 놓인 따뜻한 보리차를 떠 갔다. 김계훈 할아버지(80)는 경기도 동두천시에서 지하철을 타고 왔다. 집에서 밥퍼까진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20세부터 80세까지 60년간 공장에서 경비 일을 했다. 서울 시내 안 다녀본 공장이 없을 정도. 공장에선 맛있는 밥을 잘 챙겨줬지만, 공장이 문을 닫으며 끼니 걱정이 시작됐다. 밥퍼에 다니던 한 할아버지가 같이 오자고 해서 올해 1월 1일부터 매일 오기 시작했다.

▲ 김계훈 할아버지가 따뜻한 보리차를 받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김계훈 할아버지가 따뜻한 보리차를 받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밥퍼 입구 맞은편에는 따뜻한 보리차를 담은 업소용 보온 물통이 있다. 건물 밖에 둔 이유는 따로 있다. “아사 직전인 사람이 편의점 가서 물 달라고 한다고 주겠어요?” 주방장은 굶주린 누구든 조금이나마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매일 보리차를 끓인다.

백남열 할머니는 식사를 마친 후, 빈 500ml 생수 페트병을 들고 와 보리차를 담았다. 그가 가져온 물병은 세 개. 보리차로 채운 물병을 까만 가방에 넣었다. 밥퍼에서 온기를 채워 그대로 집으로 가져간다.

양명선 할아버지(67)는 1년째 밥퍼에 온다. “난 평생을 노가다만 하면서 살았지. 나이 들어서 관뒀어.” 그는 60세가 되던 해, 막일을 관두고 주민센터에 가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덕분에 5년 동안 주민센터 청소를 했다. 65세가 되자 일을 못하게 해서 그만뒀다고 한다.

지금은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25만 원짜리 방에서 정부 지원을 받으며 살고 있다. 기초생활 수급비, 노인 기초 연금을 합해서 한 달에 약 83만 원이 통장에 들어온다. 그에게 밥퍼는 생활비를 아낄 수 있는 소중한 곳이다.

그의 일과는 매일 같다. 오전 3시에 일어나 경동 시장에 가서 커피 한 잔을 마신다. 그 후 밥퍼 근처 청량리역에 가서 텔레비전을 본다. 오전 5시 30분이면 밥퍼에 와서 아침을 기다린다. 점심까지 먹고 나면 다시 경동 시장에 가 오천 원짜리 겉절이김치 한 포기와 라면 한 봉지를 산다. 집에서 김치와 라면,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 먹고 나면 하루가 끝이 난다.

▲ 밥퍼 나눔 현수막에 ‘아침 진지’와 ‘점심 진지’ 시간이 적혀 있다.
▲ 밥퍼 나눔 현수막에 ‘아침 진지’와 ‘점심 진지’ 시간이 적혀 있다.

밥퍼는 밥만 제공하는 곳이 아니다. 외로움을 달래는 곳이기도 하다. 양 할아버지의 단조로운 일상에도 즐거움이 있다. 밥퍼를 찾는 친구들이다. 그는 아침부터 점심까지 친구와 떠들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며 웃었다.

“밥퍼는 밥을 주는 공간을 넘어서 사랑방이기도 하고, 피난처기도 해요” 김미경 밥퍼 부본부장은 양 할아버지처럼 외로움을 달래러 밥퍼를 찾는 어르신이 많다고 했다. 밥퍼에서 노인은 자식 얘기를 나누며 서로 위로하고, 다른 무료급식소 메뉴를 알려주는 등 정보 공유도 한다.

코로나19 집합금지명령으로 닫힌 밥퍼의 문이 다시 열린 날. 밥퍼 앞에서 노인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제 우리도 말 좀 하자!” 김 부본부장은 그동안 어르신들이 하루 종일 집에서 텔레비전만 봤다고 말했다. 드디어 대화할 사람이 생겨 좋아하던 어르신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김 부본부장은 큰 소리 낼 곳 없는 노인이 잠깐이라도 즐길 수 있도록 식전 활동을 만들었다. 점심 식사 전, 모두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며 “감사해요, 사랑해요”라고 외친다. “야!”하고 소리 지르며 마무리한다.

▲ 엉덩이가 시릴까봐 봉사자들이 붙인 은박 돗자리 방석
▲ 엉덩이가 시릴까봐 봉사자들이 붙인 은박 돗자리 방석

밥퍼엔 5인용 원형 테이블 8개, 3인용 직사각형 테이블 17개가 입구 쪽에 놓여 있다. 건물 안쪽엔 직사각형 테이블들이 줄지어 있다. 점심땐 이 테이블이 가득 찬다. 모든 의자엔 은박지로 만든 방석이 붙어있다. 봉사자들은 어르신들의 엉덩이가 시릴까봐 걱정했다. 하지만 방석을 살 돈은 부족했다. 차선책으로 봉사자들이 은박 돗자리를 모든 의자에 붙였다.

오늘 처음 아침 식사를 하러 왔다는 한경흠 할아버지(70). 아침을 챙겨 먹기 힘들어 안 먹는 게 버릇이 됐다. 그는 밥퍼 덕분에 간만에 아침 식사를 했다. “오늘 먹어보니까 좋으네. 메뉴도 괜찮고, 든든해.”

 한 할아버지는 연금을 받으면 보험료로 다 나가서 생활비가 부족하다. 부족한 생활비는 어쩔 수 없이 친척의 도움을 받아왔다.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광경을 보고 밥퍼에서 무료 급식을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밥퍼는 그에게 희소식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취재진과 대화하던 한 할아버지는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으니 크게 말해달라고 했다. “한쪽 귀가 아예 안 들리는데 수당을 받으려니까 계속 서류를 떼오래. 서류 떼는 것도 몇만 원씩 나오는데, 과정이 복잡해서 그냥 안 받기로 했어.”  

아들이 여기 오는 걸 알면 안 된다며 자리를 피한 할아버지, 주변 사람들이 본인의 상황을 몰랐으면 한다는 할아버지, 생계가 어려워 20년째 밥퍼에 오고 있다는 할아버지 등. 많은 사람이 밥퍼를 찾았다.

▲ 봉사자가 점심 수제비 반죽을 만들고 있다.
▲ 봉사자가 점심 수제비 반죽을 만들고 있다.

오전 9시 17분, 7명의 봉사자가 수제비 반죽을 칼로 썰고 있었다. 점심은 600~700인분을 준비해야 해서 봉사자가 많이 필요하다. 그중 앳된 얼굴이 눈에 띄었다. 봉사자 조동형 씨(24). 경상북도에 살고 있다. 2주에 한 번 서울에 있는 병원에 치료받으러 오는데, 그 전에 봉사한다고 했다. 이날도 오전 6시부터 주방장의 일을 돕고 있었다. 힘들지 않냐는 물음에도, 딱히 힘들지 않다며 점심 배식 전까지 묵묵히 일했다.

이날 밥퍼 점심 메뉴는 쌀밥·수제비·무나물·김치·오징어볶음. ‘무조건 고기는 있어야 한다.’ 밥퍼에서 메뉴를 정하는 원칙이다. 김 부본부장은 “여기서라도 어르신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면 해요”라고 했다.

식재료는 모두 후원받는다. 기업에서 직접 식품을 제공하거나, 기부금으로 식자재를 구매하는 방식이다. 식재료는 시장에서 사는데, 밥퍼가 무료 급식소라는 사실을 아는 상인이 덤을 주거나 가격을 깎아주기도 한다.

김 부본부장은 일주일 넘게 노인이 오지 않으면 방문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때 작성한 출입명부로 이름과 주소지 확인이 가능하다. 오래도록 오지 않는 할머니 집을 찾았을 때, 쓰러져있는 할머니를 발견해 병원으로 모시고 간 적도 있다.

▲ 전염병(사스·메르스·코로나)이 돌 때 누구든 쌀을 퍼갈 수 있도록 외부에 마련한 쌀통.
▲ 전염병(사스·메르스·코로나)이 돌 때 누구든 쌀을 퍼갈 수 있도록 외부에 마련한 쌀통.

최 아무개 할아버지는 7층 건물을 소유했지만, 밥퍼를 찾았다. 밥 먹을 돈이 없다고 했다. 다른 노인들은 최 할아버지를 손가락질했다. 알고 보니 자녀들이 빌딩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할아버지가 매달 대출 이자를 갚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결국 건물은 넘어갔다. 건물이 있어 복지 혜택은 받지 못하지만, 생활비가 부족한 최 할아버지. 그에게도 밥퍼는 열려있다.

한 끼 아껴 부자가 되려고 밥퍼를 찾는 사람은 없다. 김 부본부장은 최 할아버지처럼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을 돕고 싶다고 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밥을 주는 곳이 필요해요. 사람이 최소한의 삶을 살게 보장하는 건 사회의 몫인데, 사회가 그런 역할을 못 하니까 우리라도 밥을 드리고 싶어 운영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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