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지수 높이기

   - ‘인간적인 삶’을 생각하다

영화 <맹부삼천지교>에서 동태 장수 맹만수(조재현 분)는 외아들을 서울대에 보내려는 일념 하나로 산다. 맹렬 아버지의 정성에 동네 사람들 불러 놓고 뽕짝 부르던 아들도 마이크 대신 펜을 든다. 전교 1등 하는 아들은 아버지의 자랑이건만 한 강남 아줌마 왈, “그래봤자 강북 아니겠어?” 결국 만수는 사채를 내 강남의 8학군 대치동으로 ‘출혈 이사’를 한다.

열심히 일한 당신, 더 열심히 일해야

만수에게 ‘서울대’는 ‘출세’의 다른 이름이다. 과로로 응급실에 실려간 아들에게 처음 한다는 말이 “서울대 가는데는 이상 없지?” 이 부자(夫子)는 왜 이토록 피곤하게 살아야 하나. 자식 교육을 위해 ‘원정 출산’부터 ‘기러기 아빠’까지. 어디 그 뿐인가. 이 땅에서 피곤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美 클린턴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내고 현재 브랜다이스大 교수로 있는 로버트 라이시는 그의 책 <부유한 노예>에서 한국인들의 ‘전쟁 같은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라이시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이른바 ‘新경제’는 전례 없을 정도의 많은 기회와 일자리를 제공하지만, 개인적인 삶은 그만큼 피곤해진다고 말한다. “미국인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매우 역동적인 시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매우 높이 올라갈 수도, 아니면 아주 낮은 곳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얼마나 높이 혹은 낮게 우리의 위치가 변할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앞으로 어떤 기회가 올지, 또 언제 그런 기회가 올지 예측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이런 상황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해 현재 우리 자신을 매우 세게 밀어붙이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과거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것은 성패에 따른 득실의 폭이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경제적인 면에 더 관심을 두는 것도 앞으로 거둘 경제적 보상이 과거보다 더 커졌고, 반대로 부(富)를 성취하지 못했을 때의 결과는 과거보다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긴 자가 전부 가지는 사회다. 그러니 억울하면 출세하고, 출세하려면 피곤하게 살 수 밖에 없는 모양이다.

웰빙(well-being), 하십니까?

한편, 치열한 현실과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웰빙’(well-being) 문화가 새로운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 명예, 권력, 부 등의 외재적 가치보다 건강, 안정, 여유, 행복, 자아 실현 등을 우선하면서 마음껏 즐기고 살겠다는 것이다. 그들 삶의 유형도 다양하다.

슬로비족은 ‘천천히 그러나 더 훌륭하게 일하는 사람’(slow but working people)을 일컫는다. 여피족이 개성과 물질을 중시했다면 이들은 물질보다는 마음을, 성공보다는 가정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 속에서 느리게 사는 삶의 여유를 찾으려 한다. 코쿤(cocoon)족도 있다. 코쿤은 누에고치란 뜻으로,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공간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추구한다. 이들은 쇼핑ㆍ문화 생활 등을 인터넷과 첨단 장비를 통해 집에서 모두 해결한다는 특징이 있다. 유목민을 뜻하는 노마드(nomad)족도 있다.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가치를 창조하며, 늘 영역을 옮겨 다닌다. 당연히 여행을 즐긴다. 일본에서는 2~3개의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남은 시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젊은이들, 일명 프리터족들이 늘고 있다. 정규직이 보장하는 안정적이나 틀에 박힌 생활보다 적게 벌더라도 자유롭고 싶다는 사람들이다. 한국 사회의 웰빙 바람은 소비 문화에 영향을 미쳐 몸과 정신 건강에 좋다는 상품과 서비스들, 가령 유기농 제품이나 요가 등이 인기다. 집단에 매몰돼 있던 ‘개인’의 가치가 삶의 전면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 對 ‘인간적인 삶’

사실 출세 지향적 사람들이나 웰빙족이나 추구하는 바는 매한가지다. 방식과 스타일, 중심 가치의 무게 비중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의지는 상통한다. 이 때 전자를 현실주의자(혹은 속물)이라고, 후자를 개인주의자(혹은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이고 생리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또 모든 인간에게는 ‘행복 추구권’이란 기본권도 있다. 그러나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남는다. 우리 각자가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이뤘다 하자. 그래서 개인의 행복 지수가 100%라고 치자. 궁금하다. 과연 사회 전체의 행복 지수도 그에 비례할 수 있을지. 자기 실현을 인생의 주요 가치로 삼는 문화는 먹고사는데 불편하지 않고, 불만도 없는 ‘인간다운 삶’을 가져다줄 순 있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의 삶에 대한 진지한 의무에는 무관심하다면, 사랑과 나눔의 ‘인간적인 삶’과는 거리가 있다. 그리고 그 ‘봉사하는 삶’은 ‘소비하는 삶’ 보다 더 깊고 멀리 오래 향기를 남기지 않을까.

2004년 4월말 북한 용천역 열차폭발사고가 터졌다. 이번 폭발은 1t짜리 폭탄 100개가 한 지점에 떨어진 것과 같은 위력으로 약 5,500억원의 재산 피해를 냈다. 무엇보다 폭발 열기와 유리ㆍ돌 파편을 온몸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은 어린이들의 치료가 시급하다. 하지만 사고 발생 사흘이 지나고도 병원으로 옮겨진 것 외엔 별 다른 치료를 받지 못하는 실정이 전해졌다. 4월 27일자 한 일간지는 침상도 모자라 캐비닛 위에 눕혀져 있는 그을리고 데고 찢겨진 어린이들의 사진을 보도했다. 그리고 끔찍해 싣지 않는 사진도 있다고 덧붙였다. 같은 날 낮 12시 구호물품을 실은 ‘한광호’가 인천항을 첫 출발, 남포항으로 향했다. 육로든 해상이든, 정부든 국제기구든 민간단체든 北으로 가는 정성은 계속 돼야 한다.

 
 
정순화 기자 <likemaria@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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