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을 잊은 경영권 싸움이 꼭 정치판 같다."

이십대 직장인으로 핑크블러드 활동을 하는 식세기(가명) 씨가 SM을 둘러싼 경영권 분쟁에 대해 묻자 한 말이다. 식세기 씨는 이름을 밝히면 나중에 팬 활동에 지장이 생기거나, 자신의 의견이 팬덤 전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오해되기 싫다며 가명을 사용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경영권 싸움에 아티스트의 컴백이 밀리는 것 아닌가란 합리적 의심이 든다"고도 덧붙였다. 소비자이자 대가 없는 사랑으로 아티스트를 응원하는 팬덤의 의견은 배제한 채 진행되는 연예기획사 분쟁을 보는 그녀의 시선을 보여준다.

▲ 핑크블러드 로고 (출처: 에스엠 엔터테인먼트)
▲ 핑크블러드 로고 (출처: 에스엠 엔터테인먼트)

핑크블러드는 SM 엔터테인먼트(이하 에스엠)의 팬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삼성직원들이 삼성의 상징 색깔인 파란색에 맞춰 "파란 피가 흐른다"라고 하는 것처럼, 핑크블러드도 에스엠의 색깔인 핑크색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지었다. 2012년 8월, 에스엠 소속 아티스트들의 단체 콘서트 SM타운에서 가상 국가 선포식이 열리고 팬들에게 SM타운 여권을 나눠주면서 이 모임이 만들어졌다.

식세기 씨는 보아부터 소녀시대, 에프엑스, 레드벨벳, 에스파까지 에스엠이 기획한 여성 아티스트들을 좋아한다.

식세기 씨 뿐 아니라 기사에 도움을 준 취재원들은 모두 같은 이유로 가명을 요청했다. 기사에 인용되는 모든 이름들은 각 취재원이 스스로 만들어 제공한 가명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팬덤 전체의 생각을 대변하지는 않는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 기사에 등장한 취재원 정보

식세기 씨는 "특히 에스파는 이수만(전 총괄 프로듀서)씨가 A부터 Z까지 기획한 그룹이다. 신인 그룹의 공백기가 반년이 넘어가는 건 비상식적인 행보다"라고 말했다. 또 에스엠 아티스트 내에서도 컴백이 밀리며 뒷방 취급을 받는다는 "레드벨벳이 여자친구와 같은 길을 갈 것 같아 두렵다"고 덧붙였다.

HYBE(이하 하이브)가 쏘스뮤직을 인수합병 할 때, 재계약 기점과 맞물린 걸그룹 여자친구는 마의 7년을 넘지 못하고 해체되고 말았다. 여자친구 멤버들은 해체 후, 솔로 아티스트, 배우, 파생 걸그룹 비비지 등으로 활동하는 중이다.

 

케이팝공룡의 등장 

▲ 하이브와 에스엠에 소속된 아티스트와 집계된 팬덤
▲ 하이브와 에스엠에 소속된 아티스트와 집계된 팬덤

위에 제시한 하이브 소속 아티스트의 팬덤은 2023년 2월 15일 기준 위버스에 등록된 멤버로 추산했으나 에스엠 소속 아티스트의 팬덤은 집계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대략의 규모라도 추산할 수 있도록 에스엠 아티스트 팬 커뮤니티 LYSN(지난 해 7월 20일 서비스를 종료하고 광야클럽과 Dear U bubble로 이관됐다) 어플리케이션의 다운로드 횟수를 확인해 사용했다. 두 회사는 모두 1년 단위로 공식 팬클럽을 모집하던 관행을 없애고 자사 플랫폼을 통한 상시 모집으로 변경한 뒤에는 더 이상 공식 팬클럽 가입자 수를 공개하지 않는다.

K-POP 공룡의 탄생. 국내외 매체들은 하이브의 에스엠 인수작업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케이팝 음원 해외 유통 및 홍보 전문기업 DFSB 콜렉티브(DFSB Kollective) 임원인  버니 조는 CNN(23.02.10) 인터뷰에서 이 두회사가 합병하면 소속 아티스트의 수와 그의 영향력, 음악 프로듀서, 자사 IT 플랫폼 등을 고려할 때, 미국 시장 “빅3 주요 레코드 레이블인 소니, 유니버설, 워너 뮤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분명 2021년 8월, 하이브가 SM 지분에 관심을 보였을 때도 강경히 거절했던 건 이수만 전 에스엠 총괄 프로듀서(이하 전 총괄)였다.

지난 2월 7일, 에스엠은 지분 9.05%(약 2171억원)를 카카오에 매각하고 카카오를 2대주주로 올리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수만씨는 곧바로 지난 10일, 보유한 에스엠 지분 14.8%를 하이브에 4288억원에 인수시키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수만 씨가 현 경영진이 지분 9%를 확보하며 2대 주주로 올라선 카카오와 손을 잡으려는 행동에 강력하게 제동을 걸고나선 셈이다.

 

개성 없는 단일화에 우려의 목소리 쏟아져

▲ 하이브가 에스엠을 인수한단 소식이 전해진 10일 오전의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 갈무리
▲ 하이브가 에스엠을 인수한단 소식이 전해진 10일 오전의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 갈무리

하이브가 에스엠의 1대주주로 올라선단 소식이 전해진 10일 오전, 각 K-POP 아티스트 팬들이 대거 포진한 SNS 트위터의 실시간 트렌드엔 '에스엠 가오', '미친 할배', '방시혁 돼지xx' 등이 올랐다. 식세기 씨의 의견처럼 소속 아티스트들의 거취를 우려하는 목소리와 하이브의 K-POP 독과점이 팬들에게는 중요한 문제로 꼽혔다.

▲ 16일 오후 이성수 에스엠 대표이사의 성명 발표 후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 갈무리
▲ 16일 오후 이성수 에스엠 대표이사의 성명 발표 후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 갈무리

에스엠 매각설이 불거진 10일 이후부터 위 키워드는 SNS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각 사의 대표진이 의견을 표명할 때마다 한 키워드 당 약 2,000개의 트윗이 올라온다. 그만큼 팬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며 지켜보고 있는 관심 주제다.

▲ 에스엠의 'Dear U', 하이브의 'Weverse' (출처: 플레이스토어)
▲ 에스엠의 'Dear U', 하이브의 'Weverse' (출처: 플레이스토어)

엔터테인먼트 업계 시가총액 1, 2위를 다투며 대척점에 있던 에스엠과 하이브가 하나로 합쳐진다면 K-POP의 다양성이 사라진단 이유에서다. 특히 에스엠은 'Dear U(이하 디어유)' 어플리케이션, 하이브는 'Weverse(이하 위버스)' 어플리케이션으로 아티스트와 팬의 소통을 주도하고 각각 SMINI, 위버스 앨범으로 디지털 앨범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기획사의 인수합병으로 인한 혼선이 예상된다는 의견도 많이 올라왔다.

약 10년간 K-POP을 좋아해온 이십대 직장인 이국빈(가명) 씨는 "(하이브가)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불리지 말고 하던 거나 잘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모아미라고 밝혔다. 모아미는 하이브 빅히트뮤직 소속 보이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 팬덤 '모아'와 방탄소년단 팬덤 '아미'의 합성어다.

이국빈 씨는 "하이브의 경영진 대다수가 엔터 출신이 아닌 IT 업계 출신이"라며 하이브의 지향점이 K-POP이 아닌 POP같다고 주장했다. "명색이 K-POP 아이돌인데 미국 시각에 맞춰 컴백하고, 영어로 곡을 발매하고, 해외 투어 위주로 활동하는 모습이 사대주의에 찌든 모습 같다"는 이유에서다.

2020년 5월, 하이브에 레이블로 인수합병된 플레디스 소속 보이그룹 세븐틴의 팬 캐럿으로 활동 중인 이십대 대학원생 아몬드(가명) 씨는 "(하이브가) 아무리 레이블을 독립적으로 운영한다해도 하이브의 색이 묻어나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음악평론가 정수민 씨는 웹진 <이즘(2021.07)>에서 2021년 발매된 세븐틴의 'Your Chice' 앨범을 "네 박의 드럼, 찰랑이는 기타 리프에서 느껴지는 록의 기조와 균일한 퍼포먼스는 (하이브 방시혁 의장이 프로듀싱한 하이브 빌리프랩 소속 보이그룹) 엔하이픈과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잔상을 앞세운다"라고 평했다.

이어 "팀의 개성을 지우고 크레디트를 채운 하이브의 작곡진을 대변하는 넘버는 대형 소속사가 일률적인 성공 공식을 만들어 북미로 나아가고자 한다는 의심을 잉태한다"고 덧붙여 하이브의 K-POP 단일화를 걱정했다.

식세기 씨는 이수만 전 총괄의 프로듀싱 가능 여부가 가장 큰 쟁점이라고 말했다. 하이브 공식입장 전문에 따르면, 이수만 전 총괄은 경영권을 행사하거나 프로듀서로서 복귀할 수 없다. 향후 3년간 해외에서만 프로듀싱을 맡을 수 있다고만 규정했다.

“광야란 SM유니버스(에스엠 소속 아티스트들이 연결된 세계관)의 포문을 연 게 바로 에스파"라고 설명한 그는 "(이수만 전 총괄이) 경영, 프로듀싱에서 손을 떼게 된다면 에스파 특유의 컨셉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걱정을 털어놓았다.

▲ 하이브의 에스엠 인수합병에 반대하는 트위터 갈무리
▲ 하이브의 에스엠 인수합병에 반대하는 트위터 갈무리

또 하이브가 주도적으로 콘텐츠의 유료화, 오프라인 행사 참여비 인상 등 고급화 전략을 꾀하고 있어 각 사의 팬덤 외에도 걱정의 목소리가 크다. 무엇보다 K-POP 독과점이 큰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해 12월 31일, 아티스트 인터넷 방송 플랫폼인 네이버의 V-LIVE(이하 브이앱)를 하이브가 자사 위버스 플랫폼에 인수한 사건이 가장 큰 예다. 강제로 K-POP 아티스트와 팬의 소통 창구를 하나로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그 뒤로 위버스에 입점되지 않은 아티스트들의 영상은 사라졌다. 이들은 유튜브, 개인 SNS 계정, 에스엠의 디어유 등을 활용해 소통을 이어 나가고 있다.

식세기 씨는 서비스 종료 공지가 뜨자마자 그간의 브이앱 영상을 백업하느라 힘들었다고 말했다. 팬들이 자발적으로 구글 드라이브에 백업 영상을 모았다고 설명한 그녀는 브이앱 인수건을 "굴러온 돌(하이브)이 박힌 돌(기존의 브이앱 사용 기획사)을 빼낸 것"이라 표현했다. "자사 아티스트가 귀한 줄 알면 타사 아티스트도 귀한 줄 알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인 그는 하이브를 황소개구리에 빗대어 표현했다.

 

소비자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 경영

▲ HYBE 공식 홈페이지
▲ HYBE 공식 홈페이지

하이브의 뿌리가 된 레이블 빅히트뮤직의 경영 철학은 팬이다. 소개문에 "글로벌 트렌드를 이끄는 '콘텐츠'와 우리의 고객인 '팬'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높은 기준과 끊임없는 개선으로 고객을 만족시키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힌다.

이러한 하이브에 대해 이국빈 씨는 "입에 발린 소리일 뿐"이라고 말했다. 한 회에 20만원을 호가하는 콘서트 티켓 값, 위버스 유료화 선언 등의 금액적인 측면과 자사 아티스트가 방송사 예능 출연 없이 자체 콘텐츠에 매몰돼 있는 행보, 오프라인 행사 추첨제 등의 운영 방식 등이 문제라고 말했다.

취재원 3명 모두 공통적으로 "아티스트를 좋아하다보면 내가 팬인지 감정있는 ATM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며 팬이 우선 순위가 된 적이 손에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팬은 원래대로 취급해도 좋으니 아티스트만이라도 잘 대해줬으면 좋겠다"고 희망사항을 밝혔다.

▲ 기획사에 반발하는 팬덤의 움직임 트위터 해시태그 총공 갈무리
▲ 기획사에 반발하는 팬덤의 움직임 트위터 해시태그 총공 갈무리

기획사의 일방적인 행보에 팬들은 해시태그 운동, 이메일 총공 등을 통해 의견을 피력한다. 2008년, 에스엠 소속 보이그룹 슈퍼주니어의 팬들이 '소액주주 팬 연합: 1팬1주 (한 팬이 한 주를 갖는다)'을 결성한 적이 있다. 슈퍼주니어는 무한 확장형 체제의 보이그룹이며 새 멤버를 추가 영입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이에 반대하는 팬클럽 회원 2만여명이 결집한 것이다.

당시 이 모임을 주도하던 정소연 씨는 한겨레(08.03.27)와의 인터뷰를 통해 “‘생쥐깡’을 고발하는 게 소비자의 권리이듯, 팬들의 의사를 무시하는 기획사의 독단에 반대하는 것도 문화 소비자로서의 권리”라고 주장했다. 이런 촉구 운동으로 에스엠은 슈퍼주니어의 중국 유닛 슈퍼주니어-M에만 새로운 멤버를 영입하는 등 팬들의 목소리를 적극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티빙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K-POP 제너레이션>을 제작한 평론가 차우진 씨는 iMBC(23.01.31)와의 인터뷰를 통해 케이팝을 "기획사, 아티스트, 팬덤 세 개체들이 균형감 있게 공존하고 있는, 밸런스가 잡힌 영역"이라고 규정했다. 차 평론가는 "무엇보다 중점을 둔 요소는, 팬덤"이라고 말했다. 팬이 없으면 케이팝이 존속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소위 '팬 장사'로 지탱 중인 산업인 만큼, 팬들의 의견을 더해 아티스트 경영을 이어나갔으면 하는 게 팬들의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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