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5일 낮 12시. 부차시청의 행정 담당 공무원인 드미트로 합첸코는 동료들과 함께 곧 마을로 들어올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닷새 전인 10일부터 인도 회랑이 열렸고, 그 길로 구호품을 실을 버스가 들어와 물건을 내리고 빈자리에 동네 사람들을 태우고 떠날 예정이었다. ‘버스가 언제 오나’ 생각하던 차였다. 러시아군 30여명이 시청 담을 넘었다. “거기, 당신!” 한 러시아군이 드미트로를 불러 세웠다.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당신, 여기서 일하나?” 러시아군이 물었다.”

지난 6월 15일, <“사람들이 죽었다. 이유 없이, 너무 간단하게”>라는 제목으로 한겨레에 올라온 기사 일부분이다. 노지원 기자가 취재한 우크라이나 부차(Bucha) 대학살 르포 기사다. 총 49편으로 구성된 연재기사 <우크라이나를 가다>의 기사 중 하나이기도 하다. 

▲ 노지원·김혜윤 기자의 연재기사 '우크라이나를 가다' (출처=한겨레)
▲ 노지원·김혜윤 기자의 연재기사 '우크라이나를 가다' (출처=한겨레)

<우크라이나를 가다>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전쟁을 겪어내는 ‘사람들’의 흔적이다. 대학에서 발레를 가르치다 국토방위군이 된 스비트라나, 여성과 어린아이에게 무료 교통편을 제공하는 캐나다인 수잔, 난민들에게 집을 내어주는 사람들, 전쟁 트라우마 치료를 돕는 사회치료 위기센터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노지원·김혜윤 기자가 총 4주간 우크라이나 접경지역과 현지를 취재한 결과물이다.

이들은 3월 5일부터 2주간 폴란드 프셰미실 등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을 취재했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취재하기 위해서다. 약 3개월이 지난 뒤인 6월 13일, 취재 제한이 풀려 우크라이나 현지로 다시 2주간 출장을 떠났다.

먼 나라의 전쟁을 우리나라에 보도하는 과정이 궁금했다. 세계사에 기억될 우크라이나 전쟁의 취재기를 들어보고자, 지난 10월 14일 노지원 기자에게 인터뷰 요청 메일을 보냈다. 8시간 뒤 “네, 다만 제가 이틀 뒤에 유럽 특파원을 나갈 예정입니다.”라는 예상 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물리적 거리의 한계로 인해 약 1달간 메일을 주고받으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노 기자는 동아일보에 입사해 정책사회부(교육)에서 1년 8개월 근무했다. 한겨레로 회사를 옮긴 뒤 정치부 통일외교팀, 정당팀, 경제산업부 경제팀 금융 담당, 국제부를 거쳤다. 현재는 베를린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다. 

▲ 노지원 기자의 네이버 기자홈
▲ 노지원 기자의 네이버 기자홈

- 전쟁 취재 매뉴얼과 교육의 부재

3월에 폴란드로 떠난 첫 출장에서는 한국 정부의 여행 금지 조치 때문에 우크라이나 현지가 아닌 접경지역만 취재할 수 있었다. 노 기자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현장을 직접 취재하고 싶다는 마음에 회사의 출장 제안을 받아들였다. 접경지역으로 난민이 많이 들어오는 상황이었기에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 기자는 의미 있고 필요한 출장이었지만, 우크라이나 현지를 취재할 수 없었던 점이 아쉬웠다고 얘기했다. “당시 미국, 유럽 등의 언론은 전쟁 직후인 3월에도 수도 키이우로 들어가 취재했다. 외신에서 생생한 전쟁 현장을 보도하는데 똑같은 기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가보지 못하는 현실이 매우 아쉬웠다.”

한계가 있긴 했지만, 노 기자는 폴란드 코르초바, 바르샤바 등 접경지역을 취재하며 우크라이나 난민의 상황을 글과 영상으로 한국 독자에게 전달했다. 가족을 두고 피난을 떠나는 아이와 엄마, 생업을 포기하고 난민을 돕는 폴란드 시민들 등 기사 속 내용은 급박했던 전쟁 직후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어 취재 제한의 아쉬움과 함께 ‘전쟁 취재 매뉴얼’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안전장치나 차량, 현장에서 안내해 줄 코디네이터가 없는 상태로 무작정 전투 현장을 취재하는 것은 위험하다. 한국 언론도 이런 종류의 취재를 위한 매뉴얼을 개발하거나 교육을 시행하고, 실제 현장을 취재하는 방식으로 경험을 꼭 쌓아 나가야 한다.” 전쟁 취재 매뉴얼이나 기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등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은 한국 언론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 전쟁을 겪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

6월에는 외교부에서 예외적인 여권 사용을 허가해 한겨레를 비롯해 일부 언론의 우크라이나 현지 취재가 가능했다. 그러나 이때도 키이우 외에 동남부 지역을 취재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에 노 기자는 우크라이나 현지 취재는 ‘지난 3월에 러시아가 도시를 점령했을 당시에 발생한 전쟁 범죄’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부차 대학살’이다. 

지난 3월 러시아는 키이우를 포위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도시인 부차에 한 달가량 머물렀다. 이후 부차에서 수백구의 시신이 발견되고, 러시아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이 드러났다. 

부차 시민들은 노 기자에게 “누군가 차를 타고 가다가 러시아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길가에 시체 5구가 버려져 있었다.” 등 끔찍한 일들을 증언했다. 노 기자는 “제한된 지역만 취재할 수 있었지만, 부차 대학살같이 중요한 지점들을 취재했다.”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역사를 기록한다는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부차 대학살을 현지 취재하는 노지원 기자 (출처=한겨레)
▲ 부차 대학살을 현지 취재하는 노지원 기자 (출처=한겨레)

지난 3월 첫 출장을 다녀온 후, 노 기자는 한국기자협회와의 인터뷰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2명을 꼽았다. 러시아의 공격으로 집이 있는 하르키우를 떠나 딸과 함께 폴란드로 피난 온 줄리아와 남편과 남동생의 생사를 SNS 접속시간으로 확인하는 안나다. 

6월에 다시 한번 출장을 다녀오고 또 다른 기억에 남는 사람이 생겼는지 물었다. 그러자 ‘옥사나’라는 이름 세 글자와 함께 기사 링크를 보내왔다. 한겨레 기사 <“쿵! 하늘에서 떨어진 폭탄이 내 아파트를 날려버렸다”>에 따르면, 옥사나는 남편 그리고 두 딸과 함께 부차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폭탄이 옥사나의 아파트를 덮쳤다. 다행히 가족 모두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옥사나 가족은 집을 잃었다. 이 폭격으로 옥사나는 육체가 아닌 마음의 상처를 얻었다. 

▲ 한겨레 기사 '“쿵! 하늘에서 떨어진 폭탄이 내 아파트를 날려버렸다”' (출처=한겨레)
▲ 한겨레 기사 '“쿵! 하늘에서 떨어진 폭탄이 내 아파트를 날려버렸다”' (출처=한겨레)

“아직도 잠을 잘 못 자요.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갔더니 알약을 주더라고요. 안정제랑 수면제, 항우울제를 먹기 시작했어요. 시에서 집이 아니라 돈으로 보상을 해주면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싶어요. 부차에 살기 싫어요. 자꾸 그날이 떠올라요.” 

옥사나에 대해 노 기자는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을 경험한 뒤에도 꿋꿋하게 현실을 살아나갔다. 기자를 만나 자신이 겪은 일을 차분히 설명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라고 말했다. 취재하며 만난 우크라이나 사람들 대부분이 옥사나처럼 강인했다고도 덧붙였다. 

노 기자는 지난 6월 22일 키이우의 사회치료 위기센터를 취재해 <전쟁이 가져온 ‘마음의 병’…인내와 희망으로 이겨낸다> 기사를 썼다. 알코올 중독자들의 재활 센터였지만, 6월 초 전쟁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센터로 바뀐 곳이다. 친척의 죽음과 아들의 국토방위군 합류를 지켜보며 거식증에 걸린 여성, 전쟁으로 직업을 잃은 사람들 등 마음의 상처를 얻은 사람들과 그들을 치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사에 담겨있다.

▲ 한겨레 기사 '전쟁이 가져온 ‘마음의 병’…인내와 희망으로 이겨낸다' (출처=한겨레)
▲ 한겨레 기사 '전쟁이 가져온 ‘마음의 병’…인내와 희망으로 이겨낸다' (출처=한겨레)

사회치료 위기센터를 언급하며, 노 기자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전쟁 트라우마를 우려했다. 어쩌면 그들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더 큰 어려움을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전쟁을 보고, 겪은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면에는 깊은 불안과 트라우마를 안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취재를 시작하기 전, 인터뷰에 나서고 싶지 않은 이들을 무리하게 설득하지 않고 욕심을 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가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전쟁, 그리고 저널리즘

전쟁 국가 취재를 통제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우크라이나 취재는 경험하기 힘든 일이다. 노 기자에게 총 4주간 현장에서 취재하며,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에서 저널리즘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느꼈는지 물었다.

그러자 ‘나침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그 공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언론도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당국의 발표에만 의존해서는 정확한 사실을 전할 수 없다. 노 기자는 취재를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상황도 분명하기에, 확보 가능한 최대한의 ‘사실’을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동시에 어떤 부분을 주목해서 봐야 하는지에 대한 나침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노 기자가 생각하는 전쟁 속 저널리즘의 역할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최대한의 사실을 전하기 위해 취재원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된 사람을 만나고, 실제 무너진 도시에 들어가면 기자도 심리적으로 여러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노 기자는 지난 10월 16일 새로운 도전을 위해 독일로 향했다. 한겨레가 새로 신설한 베를린 특파원으로 1년 동안 일할 예정이다. 네이버 기자홈의 소개 글도 “베를린 특파원으로서 유럽을 취재하고 있습니다.”로 바뀌었다. 필요한 경우 유럽 곳곳을 다니며 취재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정치부 통일외교팀에서 3년간 지내면서 한국의 외교 안보를 포함해 국제 관계에 관해서도 관심을 두게 돼 ‘베를린 특파원’이라는 길을 택했다고 한다. 노 기자는 ‘좋은 저널리즘을 실천하는 좋은 기자’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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