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작가 소만(본명 천정연·40)은 2016년부터 딸 봄이를 키우며 느낀 기쁨과 고민을 에세이 만화 ‘봄이와’에 담았다. 모두 3권으로 ‘육아 빙자 인생만화’라는 설명처럼 육아 돌봄 가사노동에서 느끼는 고됨, 만화를 통한 창업과 경제적 독립, 여성의 연대를 폭넓게 그렸다.

소만 작가는 이 만화로 2021년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의 신진여성문화인상을 받았다. 그는 수상소감에서 “수많은 전업주부들, 직장을 퇴근하면 집으로 다시 출근하는 수많은 워킹맘들, 그들의 노고를 기억해주는 상”이라고 말했다. 작가를 6월 8일, 대전 소제동 카페와 옛 충남도청사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났다.

▲ 만화 ‘봄이와’
▲ 만화 ‘봄이와’

책날개의 작가 소개에는 아이만 키우기 힘들어서 만화를 그리게 됐다는 말이 나온다. 결혼 전 넘치던 에너지가 아이를 낳고 좁은 공간에 머물게 된 순간, 한곳에서 뭉쳐 폭발했다. 폭발한 에너지에서 이야기가 탄생했다.

문화생활이라고는 TV 시청이 전부였던 어린 시기에 순정만화의 예쁜 그림은 작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고등학생 시절, 놀러 갔던 친구 집 2층 다락에서 마주친 친구네 자매들의 만화살롱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만화가의 삶에 궁금증을 느꼈지만 선뜻 뛰어들 용기는 없었다. 상황과 여건에 맞춰 차선을 택했다.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뭔가를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친구들과 단편 영화를 찍고 시와 소설을 썼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 마케팅 부서에서 일했지만 1년 만에 그만뒀다. 퇴직금으로 미술학원에 등록했고, 미대에 편입해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후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또 네팔 어린이에게 교재를 지원하는 NGO 바보들꽃에서 활동하며 교재를 디자인했다.

“뭔가를 항상 만들고 있었어요.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그 작업을 하고 있을 때 결혼을 했고, 결혼하고 나서도 그 작업을 계속 했거든요. 그런데 아이를 낳으니까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자기 시간 없는 숨막힘과 답답함에 생명의 경이로움이 파고들었다. 생후 108일, 딸 봄이가 몸을 뒤집었다. 글과 그림으로 그 경이를 기록하고 싶었다. 지인이 다음 웹툰의 ‘어쿠스틱 라이프’를 권했다. 빈 페이지를 자기 방식대로 채워 넣는 웹툰의 세계를 알게 됐다. 그렇게 작가 소만은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육아로 인한 감금이 에너지를 좀 모으게 했던 것 같고. 어떤 이야기를 생산해내는 애가 옆에 꾸준히 있었고요. 1권 그릴 때는 진짜 이야기가 넘쳐나서 3, 4회 후의 것까지 미리 다 준비가 돼 있을 정도로 아이가 그냥 하루하루 펼쳐내는 모습들이 너무 새롭고 신기했어요.”

일하는 여성의 삶은 가사·육아를 수행하는 주부 역할과 상충하며 때로 대립한다. 창작 노동과 가사·육아 노동이 교차하는 지점에 그의 이야기가 있다. 소만 작가는 주부와 예술가의 공통점으로 정해진 출퇴근이 없고, 세상에 필요하지만 그 가치가 쉽게 잊히는 데다 보수를 받기도 어려움을 꼽았다.

▲ 에피소드 ‘워킹, 맘’(출처=네이버 베스트 도전 ‘봄이와’)
▲ 에피소드 ‘워킹, 맘’(출처=네이버 베스트 도전 ‘봄이와’)

그는 가부장제 아래서 여성이 가사·육아 노동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한 현실을 만화에 드러낸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시기를 고민하는 에피소드에는 엄마 계급도가 등장한다. 내 일에 집중해 아이를 어린이집에 일찍 보낼수록 계급도 하층에 자리한다.

일과 아이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고민은 오롯이 여성의 몫이어서 끊임없이 죄책감을 요구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을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1380만 원에 달한다. 하지만 주부의 노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돌봄 노동은 너무 중요한데, 말만 중요하다고 하고 보상이 안 되는 거죠. 전업주부는 노동할 기회도 잃고, 사회적으로 자기를 실현할 기회도 잃고. 그냥 ‘너희 돌봄은 아름답고 가치 있어.’ 이런 얘기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거죠. 필요한 노동이라는 걸 사회가 안다면 그 대가도 치러야 됩니다.”

2018년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소만 작가는 대전지역 여성단체에 반상근 활동가로 취업했다. 전업주부에서 워킹맘이 됐다. 다시 직장을 구하는 에피소드에 소만 작가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딸 봄이를 낳고 ‘봄맘’이 되면서 천정연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웹툰은 공감과 연결의 도구다. 소만 작가의 육아 생활과 새로운 도전에 독자는 공감과 응원을 보냈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독자는 댓글에 자신의 상황을 적고 같은 경험을 했다며 맞장구를 쳤다.

때로는 상처가 되는 댓글도 달리지만, 댓글을 통해 사람들 생각을 직접 알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한다. “작가로서 자기 세계가 너무 강해서 그것만 펼쳐내면 사실 대중적인 예술은 하기 어렵잖아요. 같이 호흡하면서 읽어갈 수 있다는 건 웹툰의 장점이에요.”

독자와 만나는 시간도 빼놓을 수 없다. 5월 27일 서울 마포구 책방 ‘조은이책’에서 북토크가 열렸다. 책방지기는 올해 초 만화진흥원의 전시에서 처음 ‘봄이와’를 알게 됐고, 여성, 엄마, 가사노동자의 다층적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북토크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조은이책의 사장 조은희 씨(61)는 직장맘 딸을 둔 독자 입장에서 만화 속 가사노동에 공감했다. “막연하게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는 데 힘도 시간도 많이 든다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목록을) 세세하게 적어서 진짜 공감을 주었습니다.”

소만 작가가 만화를 그리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연대감을 느꼈던 때다. 2019년 직접 1인 출판사를 차려 ‘봄이와’ 1, 2권을 내고 북 콘서트를 열었다. 지난해 양성평등문화상을 받은 일도 기뻤지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전시를 준비했던 순간의 감동은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둘째 출산을 앞둔 대학 후배 안혜진 씨(35)는 전시에 사용할 영상을 만들었다. 그는 소만 작가가 집에서 만화를 그리기까지의 과정을 “살기 위해서 그린다”고 표현했다. 작가의 고생을 알기에 전시회에 힘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작은 별것 아니어 보일 수도 있잖아요. 그냥 아기 엄마가 뭐 저렇게까지 시간 내서 그림 그리나 싶었던 것들이, 그 치열함이 헛되지 않았구나. 그래서 전시회 때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기록활동가 박희정 씨는 주간경향 고정 코너 ‘만화로 본 세상’에 자신의 육아 경험을 이야기하며 ‘봄이와’를 소개했다. “현실에 보통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이야기를 건네주는 책 같았고, 그래서 조금 안심했어요.”

▲ 작업실 책상에 앉은 소만 작가
▲ 작업실 책상에 앉은 소만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 일 년에 돈 500파운드와 문에 자물쇠를 채울 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만 작가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다. 첫 아이를 낳고 집에서 만화를 그리는 내내, 집은 작업공간이자 생활의 공간이었다. 중첩된 공간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둘째를 낳고 두 아이가 자라날수록 만화와 삶의 병행은 더욱 어려워졌다. 온전히 집중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대전시와 대전정보문화산업진흥원이 운영하는 대전 웹툰캠퍼스에서 입주 작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2020년 3월, 소만 작가는 작업실에 입주했다. 작업실은 그에게 주어진 자기만의 방이다. 벽에는 좋아하는 영화의 포스터와 스틸사진을 붙였고, 작업용 모니터 앞엔 작품 아이디어가 적힌 메모지가 가득했다. 아이를 아이돌보미에게 맡기고 작업실에 출근하면 온전히 만화에 마음을 쏟을 수 있었다.

“그 공간에 지인을 초대하면 특히 아이 키우는 엄마들이 부러워했어요. 아이 키우는 엄마들에게 자기만의 방을 주는 그런 프로젝트를 하면 좋겠어요. 자기만의 시간을 오롯이 가질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주어지면 좋겠어요. 여성들한테 다른 삶의 향기를 줄 수 있게.”

작업실은 마음가짐뿐만 아니라 작업 방식도 바꿔놓았다. 1, 2권이 회차별로 따로 그려졌다면 작업실이 생긴 뒤에는 전체 이야기의 틀을 정하고 각 회차를 진행했다. 그림도 붓펜으로 그려서 스캔하던 방식에서 디지털 작화로 바뀌었다.

자기만의 방은 또 다른 상상으로 이어졌다. 6월 당시 대전 웹툰캠퍼스는 옛날 충남도청사 3층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대전 개발의 역사가 남아있는 곳이다. 대전역에서 출발해 구시가지를 지나면 홀로 다른 세월에 머무는 노란색 벽돌 건물이 보인다. 입구를 지나 본관 로비로 들어가면 천장의 아치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그는 언젠가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다룬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며 두 눈을 빛냈다.

돌봄은 세계를 확장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그의 만화는 두 아이의 엄마인 봄맘, 작가인 소만, 에너지 넘치는 생활인 천정연의 이야기가 조금씩 다른 언어로 쓰인 샐러드 볼이다. 교집합 한가운데 그의 위치는 고난이자 행운일지 모른다.

나로 이루어진 세계를 깨고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순간은 때로 기쁨이 된다. 모든 돌보는 사람이 존중받기를. 그는 그런 순간을 꿈꾸며 만화를 그린다.

“꼭 아이가 아니더라도 돌봄은 확장을 일으켜주는 것 같아요. 굉장히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런 힘듦은 그래도 가치 있는 힘듦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노동을 하고 살아야 이 사회가 생명에 대해서든, 사람에 대해서든 가치를 주는 사회로 변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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