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출근. 이현정(29. 살로만스미스바니 증권회사 홍보팀)과장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신문을 읽는다. 책상 옆에는 그 날의 10여 개 주요 일간지와 6개의 경제지, 2개의 영자지가 놓여있다. 두 대의 컴퓨터 중 한 대의 모니터에는 연합통신의 속보가 계속 올라온다. 외국계 증권 회사에 대한 정부 규제 등 회사와 관련된 기사를 모니터해서 상사에게 보고해야 한다. 그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창 밖으로 인왕산과 청와대가 시원하게 보이는 신문로의 한 고층빌딩. 30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를 비웃기라도 하듯 사무실은 서늘한 냉기로 가득하다. 정확히 약속 시간에 나온 그는 많이 기다렸냐면서 시원한 주스를 건네는 여유를 보인다.

막연한 기대감으로 시작한 APR

지난 2월, 이현정 과장은 한국 여성 최초로 미국 홍보인증자격증(APR. Accredited Public Relations)을 취득했다. APR는 1964년 제정된 이래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홍보분야 자격증이다. 전 세계에 6천명 가량이 소지하고 있지만 한국인으로는 신호창 교수(이화여대)와 김장열 사장 (코콤 피알)등 단 4명뿐이었다. 이현정씨는 국내 5번째이자 최연소 합격자이기도 하다. 국내에 APR 소지자가 지나치게 적은 것에 대해 그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한다. 요즘 각광받는 AICPA(미국 공인 회계사 자격증)과 달리 APR은 대학에서 홍보를 가르치거나 또는 홍보 업계에서 5년 이상 일한 사람만이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현정 과장이 APR에 응시하게 된 계기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보도자료를 작성하거나 행사를 준비하면서 고객이나 기자, 소비자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나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지요." 전문가 자격증 있으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서강대 언론대학원 광고 홍보학과(야간)에 진학했다. "우연히 ARP이라는 자격증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때 당시 경력이 3년 밖에 안돼서 2년 기다린 후 5년이 되던 해 가을에 시험을 봤지요." APR은 다른 미국 자격증과 달리 한국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자격증처럼 소지자가 몇 천명이 되는 것도 아니고 전문 학원도 없었다. 그는 미국PR협회(www.prsa.org) 사이트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다행히 외국인 회사에서 일했기 때문에 회사가 쉬는 토,일요일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이미 자격증을 취득한 선배들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도 전문가라는 생각이 자긍심을 키우는데 도움을 주었어요." 미국 같은 경우 이 자격증을 취득하면 명함에 Ph.D 라고 쓰는 것처럼 APR이라고 쓸 수 있고 연봉도 30~50% 오른다고 한다. 자격증 취득 후 그는 홍보 대행사에서 시티 그룹 계열의 살로만스미스바니 증권회사로 스카우트되었다.

사실 그는 영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대학도 이화여대 영어교육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대학 공부를 하면서 정신적으로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도 학생들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이 크거든요. 인성 교육과 관계없는 성인대상 교육이면 모를까. 그냥 취업하기로 했어요." 졸업 전 미국계 buying office에서 1년 반정도 일하다가 우연히 조선일보에 난 공고를 보고 홍보 대행사에 지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무슨 정신으로 지원했나 싶어요. 하지만 점점 이게 내 적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대 위에서 남을 높여주는 사람

"세상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기업에서 여자가 뭐가 되면 최초라는 개념이  붙어요. 여성의 지위가 그만큼 높지 않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요?" 그는 사회적 위화감을 상대적으로 덜 느끼고 여성으로서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야가 홍보라고 말한다. "홍보대행사의 경우는 여성이 전체의 60~70%를 차지합니다. 다른 회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우수하다고 생각해요" 홍보는 연극으로 보면 연출가고 무대 뒤에서 남을 높여주는 일이다. 자기를 낮추면서 남을 배려할 수 있는, 눈치껏 잘해주는 어머니 같은 모성애가 필요하다.

체험으로 얻은 교훈

홍보 실무자로서 근무하다보면 많은 위기상황을 접한다. 그는 기억에 남는 위기 상황이 없냐는 질문에 7년 전 모 외국 항공사를 대행했던 시절을 떠올린다. "어떤 사람이 비행기를 폭파시킨다고 위협한 적이 있었어요. 갑자기 기자들이 들이닥쳐 사실이냐 아니냐 하면서 물어보는데 당황했어요." 일단 연락 창구를 단일화해서 상황에 정통한 사람만 답할 수 있게 했다.  "사건이 좀더 발전되어서 사실이다, 아니다가 판명되면 항공사의 공식 입장을 나타내는 보도 자료를 작성했습니다. 필요하다면 기자회견도 했어요." 그는 이런 경험을 통해  위기가 발생했을 때 침착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다고 한다.

이현정 과장은 요즘도 가끔 "좋은 자리가 있는데 오실 생각 없어요?"하는 헤드 헌터의 전화를 받는다고 한다. 그때마다 회사 옮긴지 석 달 밖에 안됐다며 여유있게 넘어간다. 인기가 좋다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박사 과정을 밟을 예정이다. 영문학이나 사학처럼 전통 있는 학문과 달리 홍보는 '위기관리란 무엇인가'하는 수업만 받아서는 감이 안 온다. 즉 체험하는 게 중요한 실험적 학문이다. "실무자 입장에서 과연 공부만 한 사람이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홍보 자체가 워낙 실용적이고 실전에 응용되는 학문이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돈 받고 일해본 사람이 가르칠 수 있는 학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의 핸드폰 액정에는 '촌스럽게도' Hyun Jung Lee라는 영어이름이 적혀있다. 아무리 외국인 회사에서 근무한다지만 약간은 멋이 없어 보인다. 요즘 젊은이들이 경쾌한 벨소리 음악으로 자기 핸드폰을 무장하는데도 그는 여전히 '띠리릭'이다. "화려한 호텔에 자주 가고 세미나 가는 것에 대한 피해의식인지 꾸미는 것 별로 안 좋아해요"하며 웃는다. 한국 여성 최초, 최연소라는 화려한 타이틀이 잠시 흔들리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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