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돌이 푸와 나폴레옹을 섞어놓으면 어떤 그림일까? 배가 나오고 어벙한, 그러나 너무나 사랑스러운 푸. 날카로운 눈빛의 키 작은 황제 나폴레옹. 쉽게 떠오르지 않는 합성 그림은 성우 이윤선(50) 씨를 만나면 해답이 나온다. 프리랜서 성우로 최근에는 '곰돌이 푸' 'X-파일' '텔레토비'에서 활약하는 그는 젊었을 때 해태 나폴레옹 꼬냑 CF의 모델이었다.

연기의 한 길, 연극배우와 성우

"흑백 텔레비전에서 칼라 텔레비전으로 넘어오는 시기였죠. 그 당시에 내가 양주 모델을 했었어요. KBS 들어오기 전에 원래 국립극단 정식 배우였거든. 그러다가 결혼 때문에 성우로 들어왔어요. 여자 쪽에서 연극배우를 불안하게 생각했거든. 아무래도 국립극장 배우보단 KBS 다니는 게 그 쪽에선 맘에 드니까, 시험 봐서 들어왔죠." 가만 되새겨 보면 꽤 파란만장한 반생일 듯 싶다. 그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때를 돌아보며 작아지는 눈은 오히려 웃는 모습이다.

"그 땐 상당했어요. 80년인가, 극단 산울림에서 공연한 '여우와 포도'로 한국연기상을 받았었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상식을 했어요. 중계도 되고. 그 다음 해에 미스코리아 심사위원도 했지, 상 받았다고. 근데 우리같이 게스트로 간 사람은 짜가야, 별로 참작이 안 되는 거 같아요." 히쭉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개구쟁이 소년이다. '연극배우와 성우는 똑같은 연기의 길이 아니냐'고 퉁기자 다시 금세 진지한 얼굴이 됐다.

"둘은 같죠. 같아요. 보람은 이거나 그거나 마찬가진데 연극이 땀을 흘리는 농도가 더 짙다고 할까…. 처음 KBS 들어올 때 각오는 그랬지. 월급쟁이 생활이 끝나고 프리랜서가 되면 많은 작품을 하면 되지 뭐. 그런데, 좀 챙피한 얘기지만 일을 안 하고 나가서 작품을 두세 달씩 할 수가 없더라구요. 가계에 엄청난 손해가 오니까. 그렇게 미루다 보니 많이 미뤄졌지 이젠."

그는 성우라는 직업에 푹 빠져 있는 듯 했다. 성우로서 힘든 일을 묻자 한참을 생각한다. "라디오 쪽에서 성우로서 어려운 건 소리로 극을 만들어야 된다는 거죠. 청취자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연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또다른 어려움이 있어요. 텔레비전에선 시청자가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잖아요. 정장에 넥타이 매고 비싼 구두 비싼 시계, 그러면 부자 사장님 회장 재벌2세… 떠오른다고. 그 사람이 대사하면 부자가 얘기하는 건데, 라디오에선 그게 어렵지.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대사, 소리, 호흡으로 느끼게 해줘야 하니까요. 외화 더빙할 때 가장 어려운 건 내 호흡이 아니라는 것. 그 사람의 말투와 호흡에 맞춰서 연기를 해줘야 하거든요." 몇 가지 힘든 점을 이야기하더니 그 다음은 이내 칭찬이다. "재주가 엄청 있어야죠. 성우라는 게 연습으로만으로 될 게 아니에요."

       

팬들과의 접점, 악당의 휴머니티

요즘 어린 아이들에게 그의 목소리는 보라돌이다. "엄마들이 애들 데리고 텔레토비 녹음실에 견학을 많이 와요. 내가 '어이구, 내 팬들' 그러면 애들이 뒤로 숨어요. 엄마들 말이 더 웃겨. '무섭게 생겼어도, 사실은 순한 아저씨야∼.' 또 저번엔 통나무집에 엠티를 갔다가 아침에 맨손체조 하러 나갔어요. 근데 옆방 대학생들이 알아보는 거야. '와∼ 이윤선 아저씨다∼.'" 추리닝에 등산화를 신은 험한 차림이라 쑥스러웠다며 웃는다.

물론 자기를 알아보고 웃어주는 팬들은 좋다. 때론 무서울 정도인 팬들의 질책이나 성화도 재미있고 고마운 자극이다. "'달타냥의 모험' 할 땐가? (리슐리외 추기경이) 아주 사악하고 드라이한 소리를 내는 성격이었어요. 퍽퍽하고 허스키하고 갈라지면 끝장이죠. 컨디션이 굉장히 좋아야 했어. 한번은 목이 잠긴 상태에서 두 개를 녹음했는데 하나는 나갔고 하나는 다시 했어요. 하나가 나갔는데, 막 빗발치는 거야. 아니 배우가 목이 갔으면 쉬어다 하든지 컨디션을 봐야지 무조건 집어넣고, 시청자를 우롱하는 거냐, 그러면서. 대단하죠 팬들이."

그는 'X-파일'에서 몇 년 째 스컬리를 짝사랑하는 프로하이크 박사를 맡고 있다. 'X 파일'의 거대 매니아 집단이 그를 주시하지 않았을 리 없다. 꼼꼼한 모니터링과 예리한 지적은 기본. 팬들의 힘은 성우의 스타일도 바꿀 정도다. "'X 파일'을 재작년에 하고 작년 가을에 하니까 성격이 좀 바뀌었어요. 처음엔 아주 더티하게 갔거든. 그런데 2탄 나올 때 보니까 그게 아냐. 그 사람이 원랜 배우가 아니고 스탭이에요. 아 이 사람이 깡깡이 배우가 아니구나 하면서 멋있게 했지. 그런데 동아리에서 한 번 왔었어. 소주 먹으러 갔는데 나한테 집중적으로 뭐라고 그러는 거야. 그 전 거 좋았는데 맘대로 바꾸시냐고. 우리는 그거 용납 못하겠대. 그래서 영화부 가서 그 때 해놓은 거 다시 보고, 해서 바꿨어요."

온라인에 올라오는 성우 이윤선에 대한 평은 '껄렁거리는 스타일' '악당인데 귀엽다' 등이 부분이다. 그의 캐릭터론은 팬들의 평과 꼭 들어맞는다. 주연보다는 강한 성격의 조연을 즐겨 맡는 그는 '악당의 휴머니티'에 대해 이야기한다. "악질을 악질로만 그리면 드라마가 안 돼요. 그렇게 하면 범죄 다큐멘터리가 돼지. 악당 자체의 고뇌가 언제든지 들어있어요. 잠깐 동안이라도 후회한다든가 어린애를 보고 차마 못 죽이고 돌아간다든가. 그런 요소들을 조금씩 넣어주는 거죠. 악당도 매력이 있어야지 그 놈만 보면 지겨워지고, 그럼 누가 보겠어요."

배우는 간신이 되어야

성우 생활 23년. 안정된 캐릭터와 팬층을 가진 고참배우인 그에게 사람들은 '나중에 가면 소리가 변하지 않겠냐'고 묻기도 한다. "사람 신체 구조에서 마지막까지 안 변하는 게 소리예요. 호흡은 나중에 가면 딸리겠죠, 폐기능이 약해지니까. 소리는 안 늙어요. 패티김이 칠순이 되도 노래하는 건 똑같잖아요." 그는 나이를 먹는 것보다, 호흡이 부족해지는 것보다 의식이 늙는 것을 경계한다. "시리즈는 십 년 후 에도 나오고 그렇잖아요. 십 년 후에는 의식이에요. 생각이 늙는 걸 가장 무서워한다고. 생각이 늙으면 늙은 사람 대사가 나와요."

"젊다는 건 'young'이라기보단 시대에 맞춰갈 수 있는 배우가 되야 한다는 거죠. 요즘 젊은이들이 가진 의식을 내 머리에 집어넣을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사람을 접하고 얘기하면서 요즘 애들은 어떻고 생활습관은 어떻고 하는 걸 자기 것으로 소화해야 요즘 시대에 맞는 대사를 할 수 있고 대화법을 할 수 있고." 그래서 그의 결론은 "부단히 시대에 영합하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는 것. "옛날에 정승 판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시대에 영합하면 간신이지만 배우는 간신이 돼야지." 자못 비장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간신의 휴머니티'를 읽었다.

조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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