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은 편집장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만가지 감정 중에 가장 강렬한 감정은 뭘까? 사랑, 우정, 행복 따위의 따뜻한 말이라면 오죽 좋으련만 듣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해지는 '증오'의 감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분노를 일으키는 이 '증오'의 대상이 많은 경우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최근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안티' 운동가들은 누구 못지 않게 의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40년 전 4.19 혁명을 촉발한 직접적인 계기도 학생들의 시민들의 분노케 한 경찰의 살인 진압이었다. 최근 AP통신의 최상훈 기자가 노근리 학살 보도로 국제언론상을 받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 사건을 처음 세상에 알리고자 한 사람은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도서출판 다리)』라는 실록소설을 쓴 정은용(78) 노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미군의 총에 가족을 잃었던 이 만행을 고발하려는 일념으로 30년이 넘게 증언을 채록하고 많은 자료를 뒤졌다고 한다.

한편 '분노'의 힘은 창작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시사 평론가 유시민씨는 최근작인 『WHY NOT(개마고원)』에서 자신의 글쓰기를 지탱해온 힘은 슬픔과 노여움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아직도 '내란을 일으키고 양민을 학살한 범죄자들을 사면'하고 '방송 민주화를 요구한 노동조합 지도자를 잡아 가두는' 자칭 국민의 정부에 분노하지만 그 크기가 줄어드는 만큼 부끄러움이 커져 간다고 말했다.

문득, 어리다는 이유로 등록금 투쟁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럽다고 한 새내기가 떠오른다. 그리고 몇 주 전 대학내일신문 기자들과의 취중진담에서 이화여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자들에게 반사적으로 옹호하는 반론을 펴던 기억이 나서 부끄러워진다. DEW가 '이대웹진'이 아니라 '시사웹진'로 불리기를 바라면서도 '나', '여성성', '우리학교'라는 기반을 극복하지 못하고 합리화했었다. 

신임 편집장이 되어 DEW 4월호의 첫 기획회의로 시작한 지난 한 달 간. 의욕만 앞서고 실천은 앞서지 못하면서 꽤 고민이 많은 척 지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고 앞으로 더 무엇을 해야 할지를 치열하게 고민해 본 건 몇 번이었을까.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벚꽃이 눈처럼 내리는 4월이 되면 극기 훈련을 가곤 했다. 자기를 극복한다는 뜻과는 상관없이 교관의 눈을 피해 놀 궁리만 했던 극기훈련. 이제 무서운 교관은 없지만 힘겹게 밤을 새우며 4월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삶이 쉽게 느껴지면 그땐 정말 끝장'이라는 노래가사를 떠올리며 어느새 설레이는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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