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축복 받는 크리스마스 이브, 클라라는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받는다. 하지만 동생의 장난으로 인형은 부서지고, 울다 지쳐 잠이 든 클라라는 꿈속에서 왕자로 변신한 호두까기 인형과 함께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를 경험한다. 1892년 러시아에서 초연된 `호두까기 인형'은 100여 년 간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아온 발레의 고전이다. 특히 연말이면 항상 무대에 올려지는 호두까기 인형은 이제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발레공연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만화와 현실이라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살아가는 두 소녀에게 발레라는 마법을 건 작품이기도하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 발레를 하는 친구를 따라 처음 발레공연을 보러 간 "토슈즈"의 주인공 쿠루미. 이 날 쿠루미가 본 공연이 바로 '호두까기 인형'이었다. 무대를 누비는 귀여운 별사탕 요정에 반해 발레의 매력에 빠져드는 쿠루미의 모습이 만화의 도입부를 장식한다. 그리고 쿠루미처럼 '호두까기 인형'에 반한 또 한 명의 주인공,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씨(22). 그가 발레를 시작하게 된 때는 쿠루미보다 조금 이른 나이인 10살의 어느 날이었다.

"AB형이라 변덕이 심해요. 호기심이 많아서 누구 모 한다고 그러면 한번 해보고…그런 식으로 이것저것 해봤죠. 하지만 다 1년을 못 가고 싫증이 났어요." 이런 그녀를 발레리나의 길로 단단히 이끈 계기가 친구 집에서 비디오로 본 미국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의 '호두까기 인형' 이다. 그 때의 감흥에 대해 그녀는 '기절했다'라고 표현한다.

김지영씨는 98년 세계 4대 발레콩쿠르의 하나로 꼽히는 `USA 국제발레콩쿠르'(일명 잭슨콩쿨)에서 동상을 수상하고, 파리국제무용콩쿠르 듀엣 부분에서 김용걸과 함께 한국인 최초로 1위를 차지하면서 국내 발레의 자존심으로 주목받았다. 97년 1월 국립발레단에 최연소 발레리나로 입단한 그녀는 165㎝ 키에 긴 팔-다리 등 완벽한 신체 조건과 테크닉을 두루 갖췄다는 평을 들으며 '97년 최고의 무용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발레를 좋아하는 마음만 있다면 해낼 수 있어" 만화 '토슈즈'의 주인공 쿠루미는 역경에 부딪힐 때마다 주문처럼 이 말을 읊조린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무대에 서면 항상 밝게 웃으며 자신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쿠루미.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는 꿈을 간직하고 있는 그녀는 발레를 마법이라고 표현한다. 무대에 설 때만큼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게 하는 발레는 쿠루미에게 신비로운 마법과 같은 존재다. 그런데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도 쿠루미와 같은 마법에 걸려있는 것 같았다. 밝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하는 김지영씨의 첫인상은 천진난만한 소녀 같은 모습이었지만 사진촬영을 위해 발레 포즈를 취하는 순간 이내 표정이 진지해진다. 발레를 대하는 그녀의 진지한 모습에서 한국의 간판급 발레리나라는 타이틀을 읽을 수 있었다.

김지영씨의 하루는 아침 11시면 예술의 전당에 있는 국립발레단 연습실로 출근을 하면서 시작된다. 보통 저녁 6시까지 발레의 세계에 빠져서 지내는 그녀는 요즘 9월 초에 있을 '로미오와 줄리엣'공연 때문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연습을 많이 하면 토슈즈가 많이 닳아요. 요새는 하루에 하나 정도는 닳는 것 같아요. 그래도 재미있어요." 하루 6~8시간 동안 연습에 매진하면 힘들다고 투덜거릴 만도 한데 오히려 '재미있다'라고 말하는 그녀가 신기하게까지 느껴졌다. 연습을 통해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쿠루미와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무리한 연습은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한다. 쿠루미가 본의 아니게 피로골절로 2~3개월 동안 발레를 그만두어야 했던 것도 무리한 연습 때문이었다. 물론 김지영씨도 몸이 안 좋았던 적이 많이 있다. 특히 작년에는 허리가 아파서 고생한데다 공연까지 겹쳐서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쿠루미가 발레 연습을 당분간 그만두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에 크게 상심했던 것에 비해 김지영은 좀 더 어른스러웠다. "무용수는 항상 몸이 아픈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젠 아픈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요. 오히려 안 아프면 이상해요." 연약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당차게 말했다.

"관객들은 돈을 내고 공연을 보러오는 거니까 그만큼 좋은 무대를 볼 권리가 있어요. 제가 아픈 걸 티낸다면 오히려 제가 관객들에게 돈을 줘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아픈 것보다는 관객들의 볼 권리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진정한 프로였다.

김지영씨는 분홍색 토슈즈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동작 하나하나가 발레의 아름다운 선의 움직임을 재현하고 있었다. 동작뿐만 아니라 그녀의 겉모습도 부드럽고 여성스러웠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발레를 할 때와 같이 발을 꼿꼿이 세우고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부드러움과 함께 강인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김지영씨의 강인한 모습이 그냥 길러진 것은 아니다. 그녀도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예원중학교 3학년 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났던 순간이 그녀는 가장 힘들었다고 회상한다. "제가 너무나 원해서 간 유학이었기에 그만큼 기대가 컸죠. 하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어요." 무엇보다도 혼자라는 외로움에 더욱 힘든 유학생활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고 김지영씨는 더 클 수 있었다.

김지영씨와 쿠루미는 닮은 부분이 많은 반면 다른 부분도 많다. 그 중에서도 신체조건에서 가장 차이가 많이 난다. 쿠루미가 140cm의 단신에 불과했던 것에 비해 김지영씨는 164cm에 45kg이라는 발레리나로써 표준 몸매를 지니고 있다. 날씬한 몸매지만 그녀는 특별히 몸매관리에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사실 사춘기 시절에는 살이 찌는 게 걱정이 되어 다이어트도 많이 해봤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몸무게를 재는 것이 스트레스가 돼서 잘 재지 않는다. 그래도 항상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몸을 보기 때문에 몸이 긴장이 돼서 살이 찌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의 정론이다. "정말로 먹는 건 다 좋아해요. 가리는 게 없어요. '순대국'도 먹을 줄 아는 걸요."

 "토슈즈"의 주인공 쿠루미가 한창 사춘기를 겪는 중학생 소녀인 것에 비해 김지영씨는 78년 생으로 성숙한 숙녀라고 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올해 이화여대 무용과 3학년에 편입해서 어엿한 대학생도 됐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나쁜 학생'이라고 지칭한다.

"처음으로 한국에서 학교를 제대로 다녀보는 거니까 많이 설레었어요. 아는 언니랑 가방도 사고 공책도 사러 다녔죠. 언니는 고등학교 가냐고 하더라구요." 그때의 설렘이 다시 생각났는지 긴 팔을 휘저으며 즐겁게 얘기하는 그녀는 여전히 대학새내기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학교에 자주 갔어요. 그런데 자꾸 공연이 많아지니까 나중에는 거의 못 가게 됐죠. 거기다 저는 발레단에 매일 와야 하니까 수업도 아침에 몰아서 들을 수밖에 없었어요. 자연히 친구도 거의 사귀지 못했죠."

하지만 그녀는 또래의 친구들이 부럽지는 않다. 서로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 학교에 다니며 제일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수줍은 미소를 띄며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녀는 여타의 대학생들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이제 그녀는 발레로 명성을 얻었고 발레는 그녀의 인생에 있어 커다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주위에 있었다. "친구나 부모님, 선생님 모두 저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신 분들이었죠. 그리고 저에 대해 험담을 하는 사람들도 저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해요."이제 제법 많은 무대에서 다양한 역할을 해 본 그녀도 아직 하고 싶은 것이 많다. 모던 발레나 세미 클래식도 하고 싶고 '백조의 호수' 전막도 춰보고 싶다. 그리고 유학도 생각하고 있다. 아직 명확하게 계획을 세운 것은 없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은 언젠가는 가능한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그녀에게는 그녀가 바라는 것을 이룰 만큼의 시간이 있고 그만큼의 노력과 열정이 있기 때문에.

조수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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