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뉴스 여성앵커라는 자리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의 대명사처럼 굳혀진지 오래다. 그래서 각 방송국의 저녁 뉴스 앵커우먼이 바뀔 때마다 세간에서는 말들이 많다. 화제의 한가운데에 있는 뉴스 여성 앵커 1호 역할을 해 냈던 박찬숙씨를 만났다. 훤칠한 키에 자연스럽게 빗어 넘긴 짧은 웨이브 머리, 새하얀 색 바탕에 조그마한 하늘색 꽃무늬들이 그려진 복고풍 원피스와 시원스러운 눈매가 한눈에 그를 알아보게 했다. "안녕하세요. 시사웹진 DEW에서 오셨죠?" 여유있는 걸음으로 멀리서부터 눈인사를 하며 다가온 박찬숙 앵커의 환한 첫인사다.

그 동안 각계의 전문가나, 정치인들 앞에서 냉철하고 예리한 진행자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던 베테랑 앵커, 박찬숙씨는 지난 4월 서울언론인클럽의 '언론상 부문 특별상'을 수상했다. "마이크 앞에 앉은 사람이 이런 언론상을 받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에 정말 감사하고 기쁘게 받았습니다. 동시에 더욱더 큰 책임감을 느꼈구요." 여성앵커 1호에서 시작된 그의 방송 인생이 '마이크 앞의 저널리스트'로 인정받은 순간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이었던 70년대에 KBS 9시 뉴스 여성앵커로 발탁된 박찬숙씨는 시사, 뉴스 보도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다지면서 여성앵커의 선두주자의 길을 걸어왔다. "방송은 사회의 축소판이잖아요. 그래서 당시의 남성 중심적이었던 방송국의 조직 속에서 세상의 반인 여성을 대표하는 입장으로 제가 뉴스 앵커자리를 맡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성앵커 1호라는 이름에 대한 그의 말에서 노련한 방송인의 겸손과 연륜이 묻어났다.

발로 뛰는 저널리스트만이 '프로'다

요즘 젊은 여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전문직 1위로 꼽힌다는 그 여성앵커 자리도 끊임없는 자기 개발과 전문성을 기르려는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단 몇 년의 단명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다. 박찬숙 앵커는 그러한 여자 아나운서의 한계를 극복했다. 그는 1968년 KBS 공채 아나운서 1기로 시작했다. 그 후로 청주 지방 방송국에서 1년 간 수습기간을 마치고 서울 본사에 있던 중에, 대학생들과 시사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생방송 <젊은 세대>라는 프로그램 진행을 맡게 되면서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의 길을 열었다.

당시 여자 아나운서들이 대부분 노래 신청 엽서를 읽어주는 프로그램 진행이나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원고를 읽는 역할에 머물렀던 상황에서 그의 출발은 색다른 것이었다. 그는 이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서 각 대학의 교지를 모아 읽는 등 대학생들의 생각을 알아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이렇게 시작되었던 시사 프로그램과의 인연으로 그는 33년째 열정적인 방송인으로 살고 있다.

"지난 7월 25일은 현재 진행 중인 <여기는 라디오 정보센터 박찬숙입니다>를 제가 진행한지 6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참 뿌듯해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박찬숙 앵커는 내노라하는 권력, 재력,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 꼼짝 못하도록 질문 공세를 펴면서 청취자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또한 지난 4월 총선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어 갈 무렵, KBS <심야토론>은 박찬숙 앵커의 강단 있는 진행으로 시청자들로부터 인기를 한몸에 받았었다.

시사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진행해 내는 박찬숙 앵커의 감각은 하루 아침에 길러진 것이아니다. "어려서부터 시사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신문도 많이 보고, 정치인들의 선거 유세장에도 자주 갔었어요." 

방송의 균형은 시각의 균형에서 시작한다.

박앵커가 본격적으로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으면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시각의 균형'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진행자인 내가 공평한 시각에서 그것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느냐가 중요해요.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창출된 부가 빈곤한 계층에게 어떻게 분배되어야 그것이 공평한 것인지를 따질 때, 진행자가 공평한 시각을 가지면서 동시에 다양한 시각을 지닌 사람들의 생각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박찬숙 앵커는 항상 많은 책을 읽으려는 노력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요즘도 일간지와 시사 주, 월간지를 빠짐 없이 읽어가면서 시사적인 문제들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으려 한다는 그의 말에서 프로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여자라는 것보다 나이에서 우러나오는 연륜과 방송인으로서 3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인간으로서 시사프로그램 진행자의 자격을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한국의 방송에서 여성 앵커가 시사 프로그램과 같이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경우는 박찬숙 앵커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저녁 9시 뉴스의 경우에도 정치나 경제 등의 비중 있는 경성뉴스는 남자 앵커가 주로 진행하고, 사건·사고나 가십거리의 연성뉴스는 여자 앵커가 담당하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졌다. 이러한 방송가의 보수성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일구어 낸 박찬숙 앵커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방송 준비를 위해서 가능한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읽고, 그것도 부족하다 싶으면 직접 자료를 찾아 나서야죠. 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들은 제가 직접 섭외에 나섭니다." 

방송에서 보여지는 박찬숙 앵커의 모습은 언제나 세련되고 반듯한 옷차림에, 공격적인 질문들을 해내는 강하고 차가운 듯한 모습이다. 그런 평소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이라고 해야할까? 그의 수상 경력에는 동서문학상 신인상(1992)이라는 항목이 끼어있다. 그에게 동서문학 신인상 수상을 안겨준 작품은 <파꽃과 꼬리>라는 동물병원 미용사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박앵커의 감수성이 한껏 드러나는 인간적이고 섬세한 작품이다. "1980년 언론인 해직 때 우연히 소설가 이호철 선생이 하시는 문학강좌를 듣고서 처음으로 소설이라는 걸 써보기 시작했죠. 그 때는 해직되었던 언론인들의 취업이 금지되어 있던 터라 문학강좌를 들으면서, 방송에만 매달렸던 생활에서 좀 벗어날 수 있었죠." 매일매일 시간에 쫓기며 살아왔던 방송인에게 따뜻함과 여유를 안겨준 문학, 그리고 문학인들과의 만남은 시원한 청량제였으리라. 

학창시절 박찬숙 앵커는 연극배우나 영화감독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을 각색하여 올린 연극에서 리어왕 역할을 하면서 연극에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중학생으로서는 유일하게 고등학생들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 연극반에서 연극 수업까지 받았었죠." 이렇게 소녀시절부터 키워온 연극인의 꿈을 대학에서도 이어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그 꿈을 접어야했다. 오랫동안 품어온 그의 꿈 대신 지금은 방송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는 1994년부터 시작된 국립극장 되찾기 운동에도 참가하는 등 연극사랑에 열심이다. 자신의 학창시절 연극 공연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그의 모습에서 연극에 대한 오랜  사랑과 열정이 보였다.

세상을 연다, 사람들을 연다

"어떤 방송인으로 남고 싶기보다는 오늘 나의 방송이 최고의 방송이 될 수 있도록 내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방송에서 자주 인용하는 말인데요, 김건모의 핑계라는 노래인가요? 그 노래에 나오는 가사처럼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는, 뒤집어서 생각해 보는 참신한 눈과 함께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춘 후배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이제까지 박찬숙 앵커가 걸어온 33년 동안의 방송의 길 위에서 느꼈던 단맛과 쓴맛, 그 모든 것들이 그가 방송을 통해 세상을 열고 사람들을 열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방송가의 여성리더로서 균형을 잃지 않는 시각, 순발력, 그리고 서슴치 않는 비판의 목소리로  박찬숙 앵커는 오늘도 마이크 앞에 선다.  

박수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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