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최선열 교수

세월이 흘러흘러 수 천년, 아니 수 만년이 지났다고 가정하자.  우리의 머나먼 후손인 고고 인류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한반도 남쪽 곳곳에서 수없이 발굴되는 반짝이는 파편들을 보면서 어리둥절 해 할 것이다. "도대체 20-21세기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이토록 많은 거울조각들을 다 무엇에 썼을까......" 

얼마 전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외국인 교수가 서울 생활에서 느낀 점을 쓴 글에서 나는 흥미있는 두 가지 사실들을 발견하였다. 그가 서울에서 특이하게 느낀 점은 공공 건물 곳곳에 거울이 너무 많다는 것과, 이와 대조적으로 공공 장소에 시계가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그가 살아왔던 유럽에는 공공 장소 곳곳에 시계가 많이 있고 반대로 거울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 정말 그렇구나. 나는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 보니  공공 장소에 거울은 정말 많았고 시계는 별로 없었다.  공공 장소에 더 많은 시계가 걸려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우리들은 간혹 손목 시계를 안차고 나온 날 다 "내탓"으로 돌리면서 불편을 감수해 왔다. 그러고 보니 미국 대학에서의 유학시절  교실, 복도, 어디에나 큼지막한 시계들이 걸려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아예 건물의 일부로 들어가 있는 아름다운 시계탑들을 수없이 많이 보면서 감탄했던 기억도 난다.

그 외국인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모에 너무 신경을 쓰기 때문에 공공장소 어디에나 거울이 달려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은근히 지나치게 외모를 중시하는 우리 문화를 꼬집었다.  그리고 공공 장소에 시계가 별로 없는 것이 "코리안 타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해주었다. 나는 그가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일상 생활에 그렇게도 중요한 시계가 공공 장소에 별로 없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거울이 그렇게도 많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외모 중시 풍조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 외국인 뿐 만 아니라 다른 많은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모에 너무 치중하는 것에 놀라워한다. 세계 어느 도시에도  그토록 공들여 화장하고 최신 유행을 따라잡는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가보면  배우같고, 패션모델 같은 멋쟁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외모보다는 사람됨됨이를 더 중요시했던 순수의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나같은 기성 세대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보여주는 심한 외모 콤플렉스에 실망하게 된다. 기성세대의 가치관으로부터 해방되어 무척 자유로울 것 같은 신세대들이 아주 심각한 외모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은 실망과 함께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많은 청소년들이 여름 방학을 성형외과, 정형외과, 단식원, 미장원에서 보낸다는 언론의 보도에 마음이 착잡했기 때문이다.  작은 얼굴, 긴다리, 날씬한 몸매,  큰 눈,  높은 코를 위해 그들은 아낌없이 돈을 쓰고 거리낌없이 수술대에 올라간다니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그동안 우리 사회가 사회적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긍정적 방향으로 서서히 진보되어 왔다고 믿어온 나는  건강한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외모를 갖고자 하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청소년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진보는커녕 퇴보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90년대 초 외국에 나갔을 때 일본인 들을 구별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당시 그 들은 얼굴에 두껍게 하얀 분칠을 하고 샛빨갛게 입술을 바르고 다녔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인가 일본인들은 그 두꺼운 "가부끼" 화장을 걷어내고 자연스럽고 세련된 모습이 되었다. 그들이 서양인들에 대해 갖고 있었던 콤플렉스를 진한 "가부끼"화장으로 감추었다가 자신감을 얻게 되면서 가면과 같은 화장을 걷어내고 꾸밈없는 일본인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가부끼" 화장법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여전히 퇴조하지 않고 있으니 안타깝다. 그런 진한 화장을 연예인부터, 가정주부, 대학생, 식당 종업원 너나 할 것없이 따라하고 있으니 한심하지 않은가. 얼마전 한 외국인이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나라 식당 종업원들의 너무 진한 화장을 보면 밥맛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는데 그의 말에 공감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 최고 명품 화장품회사들에게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황금시장이었다.  아무리 비싸게 가격을 매겨도 팔리는, 아니 더 잘 팔리는 특이한 시장, 매출 신장률이 기이하게 높은 요술시장을 보기위하여  외국 화장품 회사 중역들이 줄지어 오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장품회사의 중역(불란서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자기나라 여성들은 우리나라 여성들처럼 그렇게 많은 시간을 화장하는데 소비하지 않는다고 은근히 우리나라 여성들을 비웃으면서, 화장품 회사 중역의 입장에서 공들여 화장하는 한국여성의 부지런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하고 갔던 기억이 난다.

 여성들만 외모 콤플렉스에 빠진 것이 아니다. 사실 젊은 남성들의  키에 대한 콤플렉스는 여성들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키는 간단한 성형수술이나 화장으로 쉽게 고쳐질 수 없기 때문에 키가 작은 남성들은 정신적으로 더 심한 고통을 받는 것 같다.  얼마전 텔레비전에서 명문대생 부모 살인 사건에 대한 심층취재 프로그램을 보고 나는 이 문제가 보통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그 대학생의 살인범죄에는 여러 가지 심리적인 문제가 복합적으로 깔려있었지만, 그가 작은 키 때문에 매우 심각한 콤플렉스에 빠져있었고 부모가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이 매우 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명문대에 합격할 정도의 지적능력이 있는 그 청년이 작은 키로 인해 그토록 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도대체 키가 뭐길래  사람들은 남에게 그토록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는 것인가. 

왜 우리 젊은이들이 이렇게 심각하게 외모 콤플렉스에 빠지게 되었는가?  많은 사람들은 매스 미디어, 특히 텔레비전을 주범으로 꼽는다.  연예인 왕국처럼 되어버린  공중파 텔레비전이 연예인을 닮고자하는 청소년들의 외모에 대한 관심과 욕망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많이 보는 코메디 프로그램에서 뚱뚱한 사람, 다리가 짧은 사람, 얼굴이 큰 사람, 눈이 작은 사람, 코가 낮은 사람들은 노골적인 조소의 대상이 되어왔다.  바로 그런 저질 프로그램들이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  외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키워주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매스 미디어의 책임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남성성, 여성성에 대한 왜곡된 고정관념, 상업주의가 가져온 가치관의 경박성, 피상적인 인간관계 등 우리사회의 총체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들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어차피 외모는 나이가 먹으면  하향 평준화되기 마련인데, 이 엄숙한 진리를 젊은이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 청소년들을 외모 콤플렉스로부터 해방시키는 진지한 사회 운동이 필요한 것 같다. 우선 공공장소에서 불필요한 거울을 떼어 내고 대신 시계를 거는 작은 운동부터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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