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아직 다 자라지도 어리지도 않은 여자아이'   <국어사전 (동아출판사. 1983)>

'소녀적 감성', '분홍빛 첫사랑', '하얀 순수', '향긋한 꽃내음', '수줍은 미소' 등 흔히 소녀를 수식하는 말들은 실제 소녀에게는 별천지 이야기다. 영화 속 소녀 주인공들의 캐릭터도 극단적인 경우가 많다. 항상 잘나가는 어여쁜 소녀,  못생기고 내성적이어서 늘 혼자인 소녀. 그래도 후자에게 동지애를 느끼기 마련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춘향뎐>의 주인공처럼 불꽃같은 소녀시대는 어디에도 없다. 

<처음 만나는 자유> (원제 <Girl, Interrupted >) 의 17살 수잔나(위노나 라이더)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고등학교 졸업생이다. 그러나 그녀는 주위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우울해 한다. 결국 아스피린 한 통을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보내진다. 수잔나의 병명은 이름도 어려운 '인격경계혼란장애'. 그 곳에는 'Daddy's girl'이라 불리는 데이지, 얼굴 화상으로 흉한 외모를 갖게 된 폴리, 거짓말쟁이 룸메이트 조지나, 탈출을 거듭하지만 끝내 병원으로 돌아오는 리사가 있다.

이들은 늦은 밤 병원을 탈출하는 자유를 만끽하면서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려 한다. 소녀들은 몰래 상담의사의 진료기록을 훔쳐보며 잘못된 내용이 많다고 불평한다. 그런 그들의 행동은 호기심을 넘어서 집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 내가 어디쯤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소녀들의 욕구를 보여준다. 리더십이 강한 리사(안젤리나 졸리)와 각별한 우정을 쌓아가던 수잔나. 데이지의 자살을 목격한 후 죄책감과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힘든 시간을 견뎌낸 수잔나는 작가의 꿈을 안고 병원을 나와 세상으로 돌아간다.

<처음 만나는 자유>의 수잔나처럼 <내 책상위의 천사>의 양배추 빨강머리 쟈넷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병원으로 쫓겨 가지만 나중에는 유명한 작가가 된다. 어린시절 쟈넷은 아빠 돈을 훔쳐서 산 껌을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해보지만 항상 혼자이다. 벽 뒤에 숨어서 운동장의 아이들을 바라보는 쟈넷.  주변 사람들은 쟈넷의 대인기피증을 그렇게 생각한다.  '쟈넷은 원래 그래.' 그녀의 유일한 도피처는 소설과 시 속에만 존재하는 문학세계. 남과 어울리지 못하고 책만 파고드는 그녀는 교원학교를 졸업한 뒤 잠시 교사로 일하지만 정신분열증이라는 오진 때문에 정신병원에서 8년 동안 전기충격 치료를 받는다. 하지만 그녀가 쓴 자서전이 주목받고 단편소설이 상을 수상하면서 쟈넷은 작가의 길에 들어선다.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의주인공 소녀 돈도 소녀시대가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다. 현실 속에서 사랑 받는 소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귀여워야 하지만 되바라져서도 안된다. 예쁘면 좋겠지만 지나친 말괄량이는 안된다. 똑똑해야 하지만 공부에만 연연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영화 속 돈은 어느 조건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두꺼운 안경, 촌스러운 옷차림의 여중생 돈은 점심시간에 같이 앉아 먹을 친구조차 없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이래저래 치이는 돈의 삶은 고달프다. 친구들은 그녀를 '레즈비언'이라고 놀려대고 선생님은 성적에나 매달리는 '치졸한 아이'라고 혹평하며 어머니까지도 발레리나 동생만을 귀여워한다.
 
돈은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까?  어디에도 탈출구는 없다. 갑자기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사랑 받거나 후에 자라서 아름다운 겉모습을 갖게 되는 해피엔딩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가출까지 감행했으나 돈은 여전히 못생긴 천덕꾸러기일 뿐이다. 그런 돈의 모습을 보고 실망해서도 안된다. 유쾌하지 못한 소녀시대의 기억을 거짓 포장할 수는 없으니까.

'이제 소녀의 시대는 가고 미지의 세계가 시작됐다'  <작은 아씨들>
 
<처음 만나는 자유> 소녀들의 무시무시하고 측은한 우울증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많은 관객들은 원인 모를 마음 속 상처와 혼자만의 비밀로 쉽사리 잠들지 못했던 밤을 떠올릴 것이다. 자신에 대한 불만, 현실에 대한 불신, 미래에 대한 불안감, 막연한 고독감... 그 나이면 으레 그렇기 마련인가?  '그 나이'는 설레는 만큼 불안하고, 꿈이 많은 만큼 악몽도 많았다.

  앞서 영화 속의 소녀들처럼 우울한 소녀시대를 보낸 것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고민과 비밀은 있었다. 과연 소녀시대는 끝났을까? 여전히 다 자라지도 어리지도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적어도 아름다운 기억만 떠올리려 애쓰며 소녀시대를 샅샅이 뒤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픔 하나 없이 분홍빛으로 온전한 소녀시대란 없다. 누구나 마음속에서 자기 자신과 싸우고 쓰러지고 또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부끄러움 없이 담담히 받아들이자. 좀 더 담담함을 배운 후에 '나는 여전히 용감한 소녀시대'를 외칠지도 모를 일이다. 

안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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