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0208

텔레비전에 새까만 사람들이 잔뜩 나왔다. 할아버지부터 내 나이만큼 되어보이는 조그만 남자애까지, 모두 꽃목걸이를 목에 걸고 만세를 하고 있었다. 뭐 하는 사람들이지? 궁금했는데, 아나운서 언니가 설명을 해줬다. 응? 뭐라구?

"엄마! 저 사람들 북한에서 왔대!!!!"

옆에 있던 엄마는 조용히 하라며 이마를 찡그렸다. 그렇지만, 북한 사람들이라니! 빨갱이들이 왜 군화도 안 신고 초록색 군복도 안 입고 총도 안 들고 있는 거야? 난 완전히 당황해버렸다. 텔레비전에선 한 아저씨가 "남조선엔 거지들만 득실거리는 줄 알았다"는 둥 선생님에게서 들은 거랑 똑같은 얘길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뭐야, 머리에 뿔도 안 달렸고 얼굴이 빨갛지도 않은데….

"저 아저씨는 김만철씨라고 하는데, 가족들이랑 북한에서 도망나온 거야."
"아!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 착한 사람들이 도망친 거구나. 으음."

나의 이 빠른 이해력. 역시 저 사람들은 빨갱이들에게 총 맞아 죽는 걸 피해가며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 여기까지 온 거였다. 대단하다.

"그래 뭐, 그런 거지. 저기 저 애는 너랑 비슷해 보이지? 근데 우리 나라 학년으로 하면 5학년이래. 너무 조그맣지, 김광호군."
"꽝호∼ 헷, 정말. 그럼 오빠잖아."

무서운 빨갱이들한테서 도망친 저 가족들은 이제 아무 걱정없이 잘 살 수 있겠지? 여기는 "따뜻한 남쪽 나라"니까. 광호 오빠도 밥 많이 먹고 키가 쑥쑥 자랐으면 좋겠다.

# 19870710

별로 덥지도 않고, 화창한 날씨의 금요일. 마루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는데 문득 커어다란 고궁캔디가 먹고 싶어졌다.

"엄마, 나 고궁사탕이 먹고 싶어요! 고궁, 고궁."
"오늘은 나가서 놀면 안돼. 막 눈도 맵고 코도 맵고…."

언젠가 공원에 놀러 갔다가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 들어온 적이 있었다.  소독약차처럼 순한 연기도 아니어서 마구마구 쫓아다닐 수도 없었다. 오늘도 그렇게 연기를 막 쏘아대는 날인가 보다. 왜 사람들은 머리도 아프고 눈도 매운데 계속 걸어다니고 소리를 지르고, 그러는 걸까.

"저번 달에, 사람들이 시위를 하다가 이한열이라고, 오빠 한 명이 굉장히 많이 다쳤거든…. 오늘로 꼭 한 달이 되는데 아마 다들 모여서 시위를 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집에 가만히 있으라구."
"으윽, 또 매운 연기를 뿌리면서 싸우고 있는 거야?"

정말, 어른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싸우다가 다치면 아픈데도 그런 걸 왜 그만두지 않는 거지! 덕분에 간만의 고궁캔디도 먹을 수 없게 됐잖아. 징징징.

# 19870905

어째서인지 요즘은 학교에 앉아만 있어도 '오대양', '오대양' 하고 수근대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오대양'하는 소리가 빠지지 않았다. 이상한 눈빛과 함께. 나만 몰라! 오대양이 뭐지? 꽃게로 만든 오양맛살도 아니고, 김우중 할아버지가 말한 5대양 6대주도 아니고, 그냥 오대양.

"엄마, 오대양이 뭐예요? 애들은 막 오대양거리는데 나만 몰라."
"흠…. 그거 무서운 이야기야. 엄마가 이야기해주면 너, 밤에 잠도 못 잘 텐데?"

핫, 무서운 이야기를 일단은 좋아하지만 밤에 자꾸만 생각나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이미 궁금해져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초롱초롱 눈빛으로 엄마를 말끄러미 올려다봤다.

"에, 그게 뭐냐면 사람들이 떼로 죽은 사건이야. 오대양 주식회사에서 일어난 일이거든. 그래서 '오대양'이라고 하는 거구."

그 오대양 회사는 사이비 비슷한 거였는데, 교주랑 서른 명이 넘는 사람이 천장 위에서 나란히 죽은 채로 발견됐다고 한다. 약을 먹고 한꺼번에 픽픽 쓰러지다니. 정말 무시무시…. 그 사람들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강시처럼 콩콩 달려들면 어떡하지?

# 19871118

"빠밤­ 빠라바라바라바라 빠밤빰- 빠밤- 빠라바라바라바라 빠밤빰- 빰, 빰, 빰, 빰!"
"우와아∼ 가요 톱 텐이다!"

동생과 나는 소파로 달려들어 방방 뛰기 시작했다. 오늘은 누가 1위를 할까? 어떤 가수가 나올까? 동생과 꺄악꺄악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더니 금방 피곤해졌다. 광고가 나오는 동안에는 소파에 쓰러져 잠시 휴식.

"아, <개똥벌레>다. 내가 재미있는 거 가르쳐 줄게."

난 성당 교리 선생님이 가르쳐 준 <개똥벌레> 동작을 동생에게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나는∼ 개똥벌레, 친구가 없네. 노래하던 새들도 멀리 날아가네. 나는∼ 개똥벌레, 어쩔 수 없네. …아 헷갈린다. 넘어가. 가지 마라, 가지 마라, 가지 말아라. 나를 위해 한 번만 노래를 해 주렴. 라라∼ 라라라라∼ 쓰라린 가슴 안고, 오늘 밤도 이렇게 울다 잠이 든다."

우리는 한 시간 내내 실로폰을 들고 소파에서 달리며 기타 치는 흉내를 내고, 조은풀과 꽃병을 들고 마이크인 척 비명을 질렀다. 대망의 1위를 발표하는 시간, 어느새 완전히 지쳐 버린 동생과 나는 하이라이트를 무시하고 소파에 주륵 늘어져 잠이 들었다.

# 19871214

엄마 아빠를 따라 우리 학교에 갔다. 학교 운동장에서 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자기를 찍어달라고 하는 걸 구경하러 간 거다. 엄마는 우리 나라의 반장을 뽑는 거랑 똑같다고 했다. 운동장 구령대는 교장 선생님 자린데 웬 할아버지들이 서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모여있는 사람들은 운동회 때보단 적은 것 같기도 하고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운동회보다는 분명히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분위기였다.

"앗 아빠, 저기 왜 술이 있지?"

김장할 때 쓰는 통만큼 커다란 통에 뿌연 막걸리가 가득 들어있었다. 어깨띠를 두른 아저씨들이 한 잔 하고 가라며 아빠를 붙들었다. 학교에서 술이라니, 선생님한테 혼나려고. 나는 아빠 옷자락을 잡아당겨 벌써 자리에 앉아 있는 엄마에게로 끌고 갔다.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반장 선거를 할 때도 실내화를 벗어들고 철썩철썩 교탁을 치며 "이 실내화가 마르고 닳도록 우리 반을 위해 열심히 뛰겠습니다!"라고 하는 애가 있는데. 그래도 그 중에 1번이 제일 웃겼던 것 같다. 마지막에 씨익 웃으면서 "이 사람, 믿어주세요"라고 하는데 억양이 신기했다. 나를 빼놓고는 아무도 웃지 않았지만. 또 "보통 사람입니다"라는 말도 했다. 교장 선생님 자리에 서 있는 주제에 보통 사람이라니… 농담도.

"엄마, 엄마는 누구 뽑을 거야?"

집에 오는 길에 슬쩍 물어봤지만 엄마는 비밀이라고만 했다. 하긴 특별히 뽑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 아아, 선거는 언제 하는 거야. 궁금하다 궁금해. 집에 돌아와서 나는 동생이랑 오백원짜리 뽑기 하나를 걸고 내기하기로 했다. 나는 웃겼던 노태우 1번, 동생은 행운의 숫자 김대중 3번을 걸었다. 누가 이길까?

 조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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