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수영 국가대표 선수 장희진(14, 서울 서일중 2)에 대한 징계파문이 한달이 지나도록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다.   지난 5월 23일 대한수영연맹은 학업을 이유로 선수촌을 이탈한 장희진 선수에 대해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 자격을 박탈하고 향후 1년간 대표팀 및 상비군 선발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장은 기말고사가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개인훈련을 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수영연맹은 특정 선수에게만 특혜를 줄 수 없다는 형평성의 문제를 들어 장의 개인훈련 요청을 거부했다.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대표팀 전체의 사기를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연맹과 선수촌 측은 선수가 올림픽에 나갈 때는 개인의 영광 뿐 아니라 나라를 대표하는 만큼 약간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지 않느냐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런 주장은 어렸을 때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장에게는 설득력이 없다. 초등학교 때 치과의사인 아버지(장덕수, 42)를 따라 미국에 간 장은 하버드대 스포츠클럽 MBM에서 3년간 체계적인 수영교육을 받았다. 한국에 와서도 1주일에 3번씩 취미삼아 수영을 하며 정상적인 학교생활과 우수한 학업성적을 유지했다. 지난 4월 동아수영대회에서는 자유형 50m 한국신기록(26초 39)을 세우며 수영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장선수 측은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좋은 기록을 유지할 수 있는데 굳이 선수촌 합숙훈련을 해야하느냐고 주장한다. 스포츠 외교관을 꿈꾸는 장에게는 운동만큼이나 공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 13세 밖에 되지 않은 어린 희진이가 격리된 선수촌에서 하루 5시간 정도의 훈련시간 이외에는 정해진 교육계획 없이 방치되고 있는 현실을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 김주연씨(37)의 설명이다. 입촌훈련을 받는 중·고교 학생선수들은 위탁수업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꽉 짜인 선수촌 일정 때문에 제대로 공부하기란 어려운 실정이다.

김씨는 또 너무 어린 선수를 합숙훈련이라는 명목 하에 과도하게 운동을 하게 해 육체적 조로와 정신적 황폐를 가져온다고 말했다. 소질이 보이는 선수를 조기 입촌시키고 무리한 훈련을 강요하여 선수생명이 단축된다는 것. 결국 15세 정도에 대표에서 탈락하면 수영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부모로서 두고볼 수 없다는 말이다.
 
 태릉선수촌은 그 동안 한국 스포츠 발전의 메카였다. 과거 어려운 시절 선수들의 숙식을 해결하고 훈련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큰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개발도상 시대의 훈련방식은 시대에 맞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다.

수영의 경우 심리적 안정이 더 중요한 개인경기라는 점을 감안할 때 선수촌의 집단훈련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평형 200m의 서민정(대방여중) 선수가 대표적인 전례다. 작년 소년체전에서 2분 43초 78을 기록한 서는 선수촌 입촌훈련 이후 올 소년체전에서 2분 47초 49를 기록해 무려 3초 71이나 떨어졌다. 조희연(대청중), 홍찬임(선덕중)선수는 선수촌에 들어가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개성을 무시하는 획일적인 스파르타식 방법은 훈련의 효과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선수를 '메달제조기'로 전락시킨다. 선수들은 오로지 메달을 위해 모든 희생을 강요당한다. '사람'은 없고 '운동'만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어린 선수들은 연습에만 매달려 자칫 그 나이에 습득할 지식과 바른 덕목들을 배우는 데 소홀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운동을 그만둔 후의 남은 인생에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엘리트 체육구조는 학교체육을 파행적으로 이끈다. 정규 교과과목으로서의 체육수업과 운동부 운영이라는 두 수레바퀴로 움직이고 있는 학교체육은 정상을 벗어나 있다. 체육수업의 경우 일주일에 1∼2시간씩 배정돼 있으나 시설미비 등 여건이 갖춰지지 않아 교육과정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더 큰 문제는 입시제도에 의한 파행운영이 구조화돼 있다는 점이다. 입시에 반영되지 않는 체육수업은 노는 시간으로 인식되고 고 3이 되면 아예 입시를 위한 자율학습이나 다른 과목 수업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학교운동부는 '운동기계' 양성소가 된지 오래다. 전국적으로 10만명에 달하는 학생 운동선수들은 한창 배우고 사회성을 익힐 나이에 오직 운동 성적 향상에만 매진한다. 이는 초등학교부터 대학 선수까지 두루 해당한다. 학교 운동부는 선수들의 인격형성이나 기본소양 교육은 도외시한 채 학교홍보를 위한 수단, 국가차원의 엘리트체육을 위한 보급기지로서만 기능하고 있다. 대학 4년 내내 한번도 출석을 하지 않아도 졸업할 수 있는 게 한국 체육교육의 현실이다.
 
그 동안 한국체육계는 체육발전이라는 명분하에 엘리트 체육을 강화해왔다. 몇몇 국가대표 선수들의 활약에 힘입은 올림픽 금메달 순위에 집착할 뿐 전 국민의 체력증진이나 여가선용을 위한 생활체육은 뒷전이었다. 그러나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을 따로 떼어놓고 봐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생활체육의 활성화는 엘리트체육의 저변을 넓혀 양쪽의 균형있는 발전을 가져온다는 것. 더욱이 소득수준이 증대하고 여가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삶의 질'에 대한 국민의 요구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 대부분 국가차원에서 생활체육을 지원하고 있다. 스포츠클럽 활동을 기반으로 취미로 스포츠를 즐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아 계속 더 높은 수준의 클럽으로 진출,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기도 한다. 특히 독일은 60년대 전후 어려운 상황에서도 '골든 플랜'이라는 종합적인 정책을 실시하여 지금까지 사회체육 모범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엘리트 체육에서도 세계 최강국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생활체육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지역 풀뿌리 체육에 기반한 새로운 체육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시급하다. 체육의 권리를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체육주권 운동을 통해 '보는' 스포츠에서 '하는' 스포츠, '소수' 중심의 스포츠에서 '다수' 중심의 스포츠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오직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운동에만 전념하도록 하는 국가 주도의 엘리트 체육은 시대를 역행하는 일이다.

 체육계는 기성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는 눈치다. 아직까지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겠다는 어린 선수의 '당연한' 주장을 완전하게 수용하지 않고 있다. 중앙대 안민석 교수는 "경기력 세계 10위 수준의 엘리트 체육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한 제 2, 제 3의 장희진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며 체육구조의 근본적인 개혁을 지적한다. 이번 사건은 한 선수의 이기적인 돌출행동으로 넘길 것이 아니다. 한국 스포츠가 한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자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때다.

윤주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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