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경 신도림역.
주름진 이마에 수척한 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들이 한꺼번에 지하철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하나같이 수척한 모습이 힘없고  지쳐 보인다. 지하철을 타자마자 기둥에 기대 조는 사람, 앉아서 신문을 보다 조는 사람 등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며 더부룩한 머리며 허름한 양복이 깔끔치 못한 인상을 풍긴다.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그들 사이에 서 있으려면 덩달아 우리도 침체되는 듯한 기분에 얼굴을 찌푸리게 된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식구들을 위해 산 과일이 담긴 검은 비닐봉투가 아버지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한 남자의 무능력함을 보여주는 듯해 초라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삶에 찌들고 고달파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싫어서 눈길을 돌리고 있으려면 문득 이 중년 남성들의 힘겨운 뒷모습이 우리들 아버지의 모습과 닮았음을 느낀다.

"상담을 하면서 의외로 중년 남성들이 많은 고민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걸 알았지요. 회사에서는 상사들에게 시달리고 부하직원들에게 치이고. 거기다가 일 때문에 가정에 소홀히 하다보니 아내나 아이들에겐 돈 벌어오는 기계로 낙인 찍혀 소외되죠….정말 우리나라 중년 남성들은 쉴 곳이 없어요. 물론 나도 남자지만 내가 느끼지 못한 많은 것들을 상담해오는 사람들을 통해 배웠습니다. 세상에 이런 인생도 있구나 하고요."
남성의 전화의 상담원 정수조(64·자원 봉사자)씨는 우리나라의 중년 남성들의 안타까운 삶에 대해 말한다.

"군대 가는 것 빼고는 살면서 남자이기 때문에 이렇다 할 차별을 받았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는데….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군문제가 제일 큰 불만이예요"라는 민준홍(21·서울 구로구 고척동)군의 말처럼 사실상 한국 사회에서 남자가 받는 차별은 극히 제한적이다.

하지만 남자에게도 분명히 남자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은 존재한다. 
"음…. 남자이기때문에 남자는 꼭 직업을 가져야 하고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의무감과 부담감이 있죠. 꼭 남자가 식구를 먹여 살리고 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사실 여성들도 얼마든지 남성들처럼 가족을 부양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오래 전부터 사회는 남자들에만 이러한 의무를 맡겨 왔어요."
한 가정의 가장인 김명섭(39·대구 동구 당촌동)씨는 한참이 지나서야 남자로써 느끼는 차별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이처럼 대부분의 남성들은 군문제를 제외하고서는 자신들에게 요구되는 남성다움이나 가장으로써의 의무등을 당연시하는 경우가 많다. 설사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남자라는 이유로 참는 경우가 많으며 혹시나 그러한 자신의 불만이 무능력한 자의 변명으로 비칠까봐 스스로 불만들을 억제하는 경우가 많다.

"IMF 이후로 집 나간 아내에 대한 고민, 실직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하소연을 해오는 남성들의 전화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모두들 처음에는 말을 꺼내기를 머뭇거리며 이름은 물론이고 나이까지도 밝히는 것을 꺼려하는 편이죠. 상담을 해오는 남성들은 자신이 지고 있는 책임감이나 의무감을 당연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버지의 전화(02-2208-0660)의 상담원 황인한(44)씨의 말이다. 

전통적으로 우리 문화에는 남자라면 독립적이고 강인하며, 적극적,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남자다움의 부담감'이 있다. 남자들은 집 안에서나, 특히 집 밖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모두 다 훌륭히 소화할 것을 강요받는다. 그로 인해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다움의 덫에 빠진 오늘날의 남성들은 경쟁, 성취, 업적에 따라 평가받으며 이로 인해 압박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런 스트레스들을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감추어야만 했다.
"남자다움요? 음…. 많지요. 독립적이고 책임감 넘쳐야 하고 냉정하면서 이성적이어야 하고 또 능력도 좋아야 하고…. 남자가 무슨 수퍼맨도 아니고. 그런데도 사회가 자꾸 그런 남성상을 원하니 힘들지요."
김광수(27·대구 중구 남산3동)씨의 말에서 우리 사회가 남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남자다움의 부담감'을 안겨 주었는가를 느낄 수 있다.

1995년부터 남성들의 가정, 직장, 자녀문제를 상담해주고 있는 남성 전화의 집(02-652-0456). 
이옥(49·여) 소장의 말에 따르면 젊은 남성들은 주로 '남자다움'으로 인한 스트레스나 이성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며, 중년 남성들은 가정문제와 결혼생활에 관한 문제에 대해 상담받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 소장에 의하면 매맞는 남편들의 상담전화도 3천 4백여건 중 30여 건 정도(95년 5월~96년 5월)라고 한다.

이 소장은 남성들이 사회가 부여한 아내와 자식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감 때문에 상당한 고충을 갖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에는 이혼을 당하는 쪽이 대분분 여성이었는데 시대가 변하고 여성들이 경제적 능력을 갖추게 되면서 여성 쪽에서 이혼을 원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이러한 경우 대부분의 남성분들은 자녀의 장래 문제 때문에 이혼을 원치 않지요. 남자로서 가정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한 좌절감을 느끼는 것 같고…."

남편들은 이혼 후 생겨나는 여러 가지 후유증이 두려워 부인의 외도를 보면서도 이혼을 망설이는 경우가 많으며, 남자로써 책임감을 느끼고 참는 경우도 상당하다고 한다.
"남자이기 때문에 참아야 하고, 남자라서 무능력함을 보이면 치명적이므로 망설이고…. 이러한 것들이 바로 남자들이 받는 성차별 아닐까요?"
이 소장은 남성들에게 불필요하게 부과된 과중한 짐을 이제는 조금 덜어줄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1997년 IMF 이후 우리나라 중년 남성들의 과로사도 증가추세에 있다. 근로복지공단(02-6700-300)에 따르면 과로사와 흡사한 질병으로 간주되는 심장질환자의 수는 99년 9월까지 672명으로 98년 12월까지 조사된 832명에 육박하고 있다. 또한 IMF 이후 1998년 8월까지 과로 사망자수는 한 달에 20명 꼴로 163명으로 1997년 같은 기간 146명에 비해 11%가 증가했다고 한다. 과로 질병자수는 98년 6월까지 428명으로 97년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22% 급증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가 좀더 다양한 개인을 인정하면서 남자들 스스로가 남자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 아니라 '당연함' 그 자체도 성차별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남성들의 변화추세는 미국,유럽,일본 등에서 일어난 남성해방 운동에서도 알 수 있다. 남성운동의 목적은 여성운동에 대항하자는 것이 아니다.'남성도 괴롭다는 사정을 알아달라'는 성격이 강하다.우리나라에서도 한국 남성협의회(회장 정채기)가 가해자로서만 인식되던 남성들도 사실은 엄청난 ‘역성차별’에 시달리고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작년 11월 발족되었다.

여성들에 비하여 남성들은 그들의 고민들 털어놓는 것 자체가 힘들 뿐 만 아니라 정작 고민을 이야기할 곳조차 마땅히 없다. 실제로 검색 엔진 야후에서 '여성문제'란 단어를 검색해 보았을 때 10여개의 관련 사이트를 찾을 수 있는 반면 남성을 위한 사이트는 단 1건 밖에 찾을 수가 없다.

물론 아직까지는 여성들이 신체적인 성적 희롱, 인격적인 무시, 사회적인 차별 등을 받을 때 느끼는 차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남성들이 받는 차별은 사치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부분일지라도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선택되어진 성(性)으로 인하여 누구든지 차별 받아선 안된다.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 앞으로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21세기에는 여성들뿐 만 아니라 남성들도 성고정관념에 무리하게 매여, 보다 자유롭고 생산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개성을 상실한 채 고달픈 삶을 지탱하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이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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