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21세기에는 다양성이 더 인정받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다양성을 인정받는 사회, 즉 다양한 목소리, 소수의 요구도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온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사회는 현실에서는 말만으로 존재하는 듯하다.

지난 31일 전국운송하역노조는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150여대의 컨테이너 차량과 승용차로 경부고속도로 상향선을 시속 20~30km로 운행하는 시위를 하였다. 개인적으로 그 소식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선택했다'였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한 지배적인 시각은 '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가'였다.  모 일간지 사설은 이를 '국민생활과 국가경제에 엄청한 폐해를 초래'한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자신의 요구를 위해 다른 이들과 부딪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의 이익이 다른 사람과 대치되는 제로섬적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동안 이런 상황을 '소 보다 대를'이라는 잣대로 풀어왔다. 그 대가 국가인 경우 소수의 목소리는 가차없이 무시되었다.

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공권력에 의한 제재가 아닌 이런 현실을 당연하게 여기는 일반 사람들에 생각이다. 직접적으로 나와는 관계가 없으니까 방관하는 자세로 있다가 나에게 조금의 불편이라도 생기면 바로 누구보다 완고한 암묵적인 제재자로 돌아선다.

우리와는 달리 시위 문화가 발달한 프랑스. 크게는 프랑스 운송업자들의 파업에서, 작게는  단지 수업시간이 늘어나 스포츠나 영화관람, 아르바이트 등에 할애할 시간이 없어서 하는 학생들의 시위까지, 프랑스는 하루에도 여러 곳에서 시위가 일어난다. 
이는 나도 언젠가는 나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저들과 같은 위치, 소수에 있을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새 천년 들어 낙선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시민단체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지금은 공적 성격이 강한 시민단체들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이는 앞으로 더 활발해질 시민사회를 예고한다. 더 다양한 목소리가 나올 것이고. 공적 이익이 아닌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 집단의 움직임이 커질 것이다. 물론 그만큼의 잡음이 생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잣대, 국가적 영향 등을 들먹이는 낡은 생각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이제는 나의 요구도 마음껏 개진하고 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다른 소수의 요구도 받아들이는 포용력 있는 시민의 자세가 필요한 때다.

 편집장 김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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