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최선열 교수

 작년 8월호 아침이슬 칼럼 "DJ에게"에서 나는 우리 사회의 각 분야의 유능한 인재들을 정치권이 흡수하려는 것을 우려하였다. 그 중에는 시민운동가들도 포함되었다.  물론 우려했던 것과 같은 흡수형태는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대들보같은 존재로 믿고 있던 시민운동가들이 결국 정치판을 대청소하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는 우리의 정치현실에 참담함을 느끼게 된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정치참여가 역사적 소명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 교육, 환경, 노동 등 시민생활의 중요한 분야에서 할 일이 많은 이들이  전문분야를 제쳐놓고 정치개혁운동에 뛰어드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도 없지 않다. 순수한 시민운동으로 출발하여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가 결국 기존정당과 다를 바 없이 추락한 유럽 녹색당의 전철을 밟는 것은 아닌지 괜한 걱정을 하기도 한다.

시민단체들의 낙천, 낙선 운동이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그래 올 것이 온거야' 라며 충족감에 기분 좋아하는 사람들, 정치판을 이만큼 뒤흔들어 논 것만으로도 통쾌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카타르시스인지, 대리만족인지,  신바람인지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고 할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시민단체들의 정치개혁 운동은 선거결과를 불문하고 그 출발의 여파만으로도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천 부적격자 명단공개는 사실 본의 아니게  선정적인 뉴스로 발전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소위 '살생부'니, '블랙 리스트'니 하는 명단은 사람들을 괜히 흥분시키기 마련인데 그 대상이 잘 나가던 국회의원들이고 보니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냄비언론이 연일, 사방에서 유권자 혁명, 시민혁명 등 혁명이라는 말을 성급하게 남발하며, 음모론, 역음모론을 그럴 듯하게 포장해내니 흥분이 고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비관론도 없지 않았으나 낙관론이 언론에 더 크게 부각되었기에 순진한 우리 국민들 중에는  벌써부터 샴페인을 터트리면서  유권자혁명의 성공을 축하하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언론사들의 여론조사 결과로는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이 4.13 선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선거혁명에 대한 기대가 큰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과연 지금의 낙천,낙선 운동의 결과가 선거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 것이며, 우리 정치권의 대폭적인 물갈이가 가능하고 정치개혁이 이루어질지 지금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사실 시민단체들의 정치개입 이후 대통령을 위시한 정치 보스들,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정당들의 행태는 구태의연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위해 집권당에 힘을 실어 달라는 김대통령의  호소는 과거 선거 때마다 수없이 들어온 낡은 정치 수법이 아니고 무엇인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시민운동에 슬쩍 편승하려는 집권세력이나,  각각의 이익계산에 따라 정략적으로 현사태를 이용하려는 다른 정당들도  우리를 실망시키기는 다 마찬가지다.  이런 행태를 보면  결국 지금과 같은  낙천, 낙선 운동이 과연  "카르텔 정당," "가부장적 정치"를 깰 수 있는 선거혁명으로 발전될 수 있을 지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민단체의 정치개입은 무수히 많은 이익단체들의 정치개입의 가능성을 열어 놓게 되었다.  사실 어떤 단체는 되고, 어떤 단체는 안된다는 기준을 누가 어떻게 정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미국처럼 공익단체는 물론이거니와 공익과는 무관한 수많은 이익단체들이 정치에 개입하게 될 것이다. 이익단체의 극심한 갈등으로 빗어지는 새로운 정치환경속에서 사상 유례가 없는 지역주의와 혼탁선거가 될 것이며 이를 통해 시민단체의 위상이 추락할 것이라는 비관적 견해에도 일리가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시민단체의 정치개혁운동은 이제 냉철한 상황분석에 따른 새로운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총선연대와 같은 거대한 연대 운동은  국민과 정치권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큰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부터의 시민운동은 이런 큰 정치개혁운동으로부터 벗어나 유권자 개개인을 대상으로 한 작은 혁신운동으로 전략과 전술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500여개의 시민단체가 연대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몇몇 엘리트 시민단체가 이끄는 거대한 운동은 소위 풀뿌리 유권자들과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에 장기적이고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사실  말이 연대이지 이들 시민단체들은 한 목소리를 내기에는 이념적으로나 전문성에 있어서 너무나 이질적인 집단들이다. 그나마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 추방이라는 단순 명료한 공통분모가 있었기에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열렬한 대중적 호응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유능한 여성정치인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활동을 추진하고자 하는 여성단체들이 최근 총선연대 활동전략에 반발한 예에서 보듯이 이들이 계속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각 단체들이 그들의 영역에서 유권자에 접근하여 좀 더 전문성 있고 구체적인 풀뿌리 정치개혁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정치발전을 위해서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연대운동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은 또다른 이유는 이런 식의 느슨한 연대로는 전체적으로 반대운동은 전개할 수 있을지언정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운동을 추진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나는  특정 후보에 대한 반대운동은 잡목을 솎아낼 뿐 대체할 새 묘목을 심지 못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뚜렷한 한계가 있는 불충분한 정치개혁운동이라고  본다. 현재의 인물들 중에서 문제의 인물들을 솎아내는 정도로는 국민들이 만족할 만한 정치개혁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나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누구는 안된다"는 식의 부정적 접근보다는  바람직한 인물을 발굴, 지지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 접근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불순집단으로 매도해왔던 권위주의 시대의 관행이 굳어져 온 탓인지 아직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흑백논리로 반대의견을 몰아부치고 적대시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가장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자부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런 반민주적인 사고와 행태를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지배하지만 소수가 보호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민주주의가 발달된 사회에 수없이 많은 이익집단이 난무하는 것도 소수의견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권장되기 때문이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상황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 발전은 기대하기 힘든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배척을 위한 부정적 접근보다는 지지를 위한 적극적, 긍정적접근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거법 개정과 관련한 최근의 여야합의에서 특정후보에 대한 적극적지지 운동을 금지시킨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차제에 시민단체들은 여야의 이번 담합에 반대하여  적극적 당선운동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투표는 단체가 아니라 개인에 의해 행사된다. 결국 모든 것은 유권자 개개인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대한 연대운동보다는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풀뿌리 개혁운동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실제투표에서 유권자들이 지연, 학연 등의 과거지향적인 연의 정치를 물리칠 수 있도록 신념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유권자 운동이 잔잔한 파도처럼 펼쳐 나가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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