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경 애(소설가)

내가 뉴욕에서 4개월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 온 것은 서기 2000년 1월 5일 이었다. 사람들은 천 년 만에 돌아온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어쨌든 난 이십세기의 마지막 넉 달을 미국의 한 대학에서 그야말로 젊디 젊은 이십 대에게 뺑 둘러 싸여 지냈던 것이다.

지금 내 나이가 벌써 20대의 두 배는 넘는 나이이지만 항상 20대 못지 않게 젊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나였다. 그러나 알고 보면 오히려 20대를 현실도피적 철학자처럼 회의 속에 푹 빠져 지냈었고, 30 대에 와서는 그것이 후회스러워 더욱 젊게, 40대에서는 더더욱 젊게 살아오다시피 했던 것같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다음 소설의 자료 수집도 할 겸 나는 20세기 마지막 몇 달을 미국 뉴욕주의 한 대학 도서관 귀퉁이에 앉아 본의 아니게 미국 20대의 학창 생활을 엿보며(?) 지낼 수 있었다.

한 가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미국의 20대들, 즉 젊은이들은 그들의 옷차림이나 외모, 장신구, 화장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더 좋은지 어떤지는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진짜 거지처럼(?)' 허름한 청바지에 모직 파카 같은 것을 걸치고 발에는 굽이 높은 신발보다는 납작한 단화나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특히, 여대생들의 화장을 하지 않은 해맑은 얼굴이 그렇게도 신선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역시 간편한 차림의 남학생들은 남학생대로 매우 당당해 보였다.

옷이나 화장뿐이 아니었다.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미국의 젊은이들은 남녀의 구별조차 없어 보였다. 크고 무거워 보이는  낡은 쌕을 메고 다니며 도서실과 카페테리아, 심지어는 낙엽 진 벤치 밑에 몇 시간씩 앉아 책을 보며 연구와 공부에 몰두하는  미국의 젊은이들을 보며 그 나라의 저력에 새삼스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인간에게 있어 20대는 꿈의 산실이다. 20대가 지나면 우선 부양가족이 딸리게 된다. 기억력은 감퇴되고, 독서, 어학 등을 할 시간도, 여유도 없어진다. 새로운 꿈을 꿀 시간도 한정되고, 또 주위가 그렇게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뒤늦게 30대, 40대에 꿈을 꾸고 있다면 사회의 낙오자가 되기 쉽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의 몸은 이 젊은 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바삐 움직이고 돌아 다니는 로봇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래 젊은 날 많은 꿈을 꾸고 보람 찬 생각을 많이 해둔다면 평생을 생산적으로 육신을 움직일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20대에 꿈꾸었던 작가의 꿈을 뒤늦게 40대에 실현시키고 있는 늦깎이다. 30대는 외국에서 보내고, 신문사 기자, 번역 등을 하다보니 어느덧 40대가 되어 뒤늦게 막차를 탄 느낌이다. 다행이 소설이란 것이 내 과거의 꿈과 경험과 상상력을 토대로 하는  것이어서 나름대로 큰 후회없이 살고 있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주로 '몬타나 6·25', '장진호' 등의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이야기를 썼다. 미국에서는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라고들 한다. 너무나도 끔찍하고 잘못된 전쟁이기에 하루 빨리 잊고 싶어 정말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단지 미국의 국립묘지에 적힌 전사자나 행방불명자의 명단이 너무 긴 것에 그들은 의아해할 뿐이다.

미국의 20대에게 한국전쟁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고개를 젓는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의 할아버지나 나이 많은 이웃집 아저씨들이 한국전쟁에 갔다 왔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 할아버지나 나이 많은 이웃집 아저씨들에게 물어보니 '그들이 새파란 20대'일 때 한국이라는 멀고도 알 수 없는 나라에서 전쟁이 났었다고 했다. 

"같이 갔던 몇 녀석은 못돌아왔지…."

새파란 20대를 한국의 땅 속에 묻고 영영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 그들의 꿈 역시 차디찬 땅 속에 묻혀 버렸으리라.

20대의 특권은 꿈꾸는 것이다. 아무쪼록 21세기의 20대는 인류평화를 위해 한 차원 높게 꿈꾸며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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