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죽자!!"
6월 29일 밤, 「크라잉넛」의 공연이 한창인 홍대 앞 라이브 클럽 「드럭」. 좁고 허름한 지하실을 가득 메운 젊은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몸을 사정없이 부딪힌다. 무대 앞은 마구잡이로 뒤엉켜 과격한 충돌과 점프를 반복하는, 슬램을 즐기는 이들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크라잉넛 팬클럽 회원인 이철구 군(17)은 이 날 입안이 찢어져서 피를 뱉었다. 그러나 태연한 표정으로 "안아퍼요"라고 말한다. 무대 위에까지 올라가 운집한 슬래머들 위로 몸을 던지는 프리 다이빙을 시도한 중학생정도로 보이는 한 남학생도 "재밌잖아요. 신나요"라며 전혀 거리낌이 없다. 

지난 해 서태지의 공연 뮤직비디오를 본 사람이라면 무대 바로 앞에서 음악에 맞춰 펄쩍펄쩍 뛰어 오르던 관객들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사실 이들은 대중 앞에 다시 등장한 서태지가 새롭게 내세운 하드코어 음악에 '제대로 노는 법'을 보여주기 위해 전격 투입된 슬래머들이다. 1994년부터 홍대 근처에 자리잡기 시작한 10여 개의 라이브 공연장에서는 서태지 훨씬 이전부터 지금까지도 이런 슬래머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음악 들으며 아무런 느낌이 없는 사람과는 다른, 우리니까요"

슬램이란 음악을 듣고 반응하는 자유로운 신체의 표현 양식 중 하나로 90년대 후반 펑크락, 하드코어의 대두와 함께 발생했다. 주로 고개를 흔들어대는 헤드벵잉은 강하고 빠른 비트의 데쓰,헤비메탈 음악에 어울린다면 몸 전체를 이용해 높이 뛰어 오르거나 몸을 부딪히는 슬램은 좀 더 느리고 과격한 하드코어 음악에 자연스럽다.

"TV나 라디오에서 나오는 가요와는 달리 여기서는 라이브로 들으니까, 음악을 들을 때 베이스, 드럼이 쿵쿵쿵 뛰면 제 몸까지 쿵쿵 뛰는 것 같아요. 그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슬램이 나와요" 공연장을 찾은 인디 스페이스 회원 김선화(가명, 18)양은 슬램을 할 때 아무 생각도 없고 그저 신난다고 한다.

"자유는 이런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슬램에는 특별한 규칙이 없다. 지금까지 공연장에서 10번 정도 슬램을 해봤다는 정산하(12)군도 "처음에는 음악이 흥겨워 멋모르고 같이 뛰어다니다가 몇 번 주위에서 하는 것을 보고 '대충 저렇게 하는구나'라고 알았다"고 한다. 

처음 슬램을 접한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보다 위험해 보이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와서 자기들끼리 슬램할 때 한 번 잘못 걸리면 죽어요. 완전 몸싸움 같아요. 한 번 험해지면 장난 아니예요" 정산하 군의 말이다. 실제로 슬램 도중에 부상을 입는 경우도 있다.

안전을 위해서 슬래머들 사이에서는 손은 쓰지 않고 몸통만 이용한다던가, 한 명이 쓰러지면 주위에서 슬램을 멈추고 우선 일으켜 준다던가 하는 룰이 통용되고 있다. 한편, 대형 공연에는 역 슬래머, 즉 안전요원이 필수적으로 배치되어 관객을 보호한다.

과격해 보이는 슬램에서 실제로는 쉽게 다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서로 적대적으로 부딪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크라잉넛의 공연에서 실제로 넘어졌던 빨간 옷을 입은 한 여학생도 "넘어지면 우선 밟히지 않게 사람들이 잡아주니까 다치고 그런 일 별로 없어요. 그리고 내가 기분 좋은 상태에서 넘어지니까 별로 아픈 것 못느끼겠어요."라고 말했다.

오히려 스킨쉽이 있으니까 슬래머들 끼리는 친해지기 쉽다고 한다. "생 판 모르는데 슬램의 물결에 함께 휩싸여 있는 순간만큼은 10년지기처럼 느껴집니다" 김세진(25)씨는 이처럼 공연장에서 만나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친구가 많다.

"작년「메이드 인 매니아」공연에서는 밴드들의 공연순서가 끝나고 200 여명의 관객들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아 술을 마시는데, 처음 5명이 시작한 기차놀이에 나중에는 200명이 모두 함께 매달려서 공연장을 돌았어요" 당시 안전요원이었던 김세진씨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공연장 바닦에 캔 맥주 수 백 개가 즐비한 가운데 밴드와 팬들이 함께 어울린 난장파티는 하드코어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하드코어 밴드「파우더 밀」의 드러머 최준명씨(25)는 이런 관객의 반응은 항상 같은 것이 아닌 만큼 공연 자체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우리가 할 때 관객이 슬램을 하면서 열광하면 덩달아 신나죠, 저도 스틱을 부러트린 적이 많습니다" 「파우더 밀」은 올 해 7월 중순으로 예정된「하드코어 2001 록 페스티벌」에 참가 예정 밴드다. 이번 공연에서「파우더 밀」을 비롯한 10개의 인디밴드들은 지난 해 말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서태지와 실력파 인디 밴드들이 선보였던 하드코어 무대의 열기를 이어간다.

20살까지만 살고싶어요?

슬램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 있는 하드코어, 랩을 가미한 펑크나 메탈이란 음악의 뿌리는 저항이다. 따라서 슬램을 할 때도 저항과 반항이라는 사회적인 의미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댄스 음악의 경우 곡 자체가 아무리 과격해도 슬램과 같은 관객의 반응이 나오지 않는 사실을 떠올려 봐도 알 수 있다. 

다음카페「18nation(사는게엿같아음악을듣는다) http://cafe.daum.net/18nation」는 메인화면의 배경음악으로 인디밴드 「런캐럿」의 「18놈아」가 나온다.

내맘대로 하고싶고 내맘대로 살고싶고
난항상내맘데로사는데
니가뭔데날보고지랄이냐

 -런캐럿의 「18놈아」중-

대구를 주요 근거지로 활동하는 슬래머들의 온라인 모임「애국폭행개슬램단(http://cafe.daum.net/44445252)」의 메인 화면에도 런캐럿의 「18놈아」와 함께「20살까지
만 살고 싶어요」가사가 적혀있다.

내 나이 20살인데 무엇하나 해놓은게 하나 없네,
어떻게살아야할지난정말모르겠는걸
이제는
무얼하나무얼해야무얼해야먹고사나

                               -런캐럿의「20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대구 지역에 자리잡은 10여 개의 라이브 클럽에서 공연이 있을 때마다 정모를 갖는「애국폭행개슬램단」은 많게는 스무 명이 넘게 모인다고 한다. 작은 클럽 공연의 경우 수십 명이 안될 때도 있지만 큰 공연에는 수 백 명의 슬래머들이 오기 때문에 잠재적인 숫자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한다.

아이디 태양씨는 "정신이 복잡할 때 슬램을 하면 그때 그 순간만은 몸이 힘드니까 그런 생각 안 하게 되고 그런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헝겊인형씨의 경우 「18놈아」같은 노래 가사나 슬램을 통해 스트레스가 풀리기도 하지만 단순히 사회에 대한 반감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시험을 치기 전날 슬램하고 술먹는 게 버릇이지요. 그렇지만 공부는 또 다른 문제고, 다른 영역이고, 그리고 내 일이니까, 책임을 져야죠" 헝겊인형씨의 말이다.

지난 해 6월, 세계적인 하드코어밴드 「레이지 어겐스트 머쉰(RATM)」의 내한 공연에는 입장료 6만 원 짜리 단 하루 공연에 전국에서 8천 명의 관객이 모였었다. 물론 공연이 이틀이었더라도 그 이상의 관객을 모으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하드코어를 즐기는 인구와 더불어 슬래머들도 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음악 들으며 아무런 느낌이 없는 사람과는 다른, 우리니까요" 한 슬래머의 말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슬램을 통해서 함께 음악을 느끼고 주체적으로 즐기고 있다. 난장판으로 보이는 슬램의 물결 속에서 슬래머들은 오히려 하늘로 날아 오를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끼는 듯 했다. 아니, 이미 날고 있었다. 

김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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