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소설은 유년기에서 소년기를 거쳐 성인의 세계로 입문하는 과정에서 한 인물이 겪는 내면적 갈등과 정신적 성장,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각성 과정을 주로 담고 있는 작품들을 지칭한다. 보통 이러한 소설은 주인공이 자아의 미숙함을 딛고 일어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치와 세계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성인 입문식'으로 끝을 맺게 된다.

중국내 주요 문학상을 모두 휩쓴 경력의 소설가 차오원쉬엔(曺文軒)이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쓴 '빨간 기와' 역시 성장 소설의 범주에 포함된다.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색이 들어간 제목에서부터 중국 소설이라는 느낌이 물씬 난다. '빨간 기와'는 중국의 '문화대혁명기'에 중학교에 입학한 소심한 소년 임빙의 학교 생활을 그리고 있다. '빨간 기와'라고 불리는 유마지 중학교에서 임빙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짝사랑에 가슴아파 하는 등 여러 가지 경험을 겪으면서 점차 어른의 세계에 다가간다. 소설은 어른이 된 임빙이 빨간 기와에서 보낸 나날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장 소설은 누구나 겪었을 법한 시절을 다루었기 때문에 어느 독자에게든 부담 없이 다가간다. 대부분의 성장 소설에는 짝사랑의 아픔과 친구들과의 진한 우정, 라이벌과의 경쟁에 관한 에피소드가 약속이나 한 듯 들어 있다. 이러한 '성장 소설의 공식'은 '빨간 기와'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공식 하나 - 새로운 친구와의 우정, 라이벌과의 갈등

새로운 친구들과의 만남과 우정은 성장 소설에 빠져선 안 될 중요한 요소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제제와 뽀르뚜가 아저씨의 따뜻한 우정, '어린 왕자'의 왕자와 여우와의 관계 등에서 독자는 유년시절 친구와의 소중한 추억을 되살릴 수 있다. '빨간 기와' 역시 다른 성장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 임빙과 빨간 기와에서 사귀게 된 세 친구(마수청, 서백삼, 유한림)의 우정 만들기를 맛깔스럽게 보여준다. 그리고 간간이 친구들의 성장 배경에 대한 설명과 그들에 관한 에피소드가 한 폭의 동양화같이 깔끔하게 곁들여져 있다. 

라이벌끼리의 대결 구도 역시 '빨간 기와'의 중요한 극적 장치다. 주인공 임빙은 학교의 호금(胡琴) 대표 연주자로 임명되었지만 라이벌 조일량에게 자리를 빼앗겨 좌절감을 맛본다. 최선을 다했지만 라이벌에게 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임빙의 패배감과 자괴감에 깊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저자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담임선생님의 신임을 받으며 대장 노릇을 하는 챠오안과 그의 권력을 빼앗기 위해 노력하는 마수청의 치열한 권력 쟁탈전을 묘사한다. 이문열씨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생각난다. 유년기와 성인기의 중간 단계인 청소년기를 묘사하는데 아이다운 '치졸함'과 어른의 '권력욕'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권력 쟁탈'만큼 적절한 소재는 없을 것이다.

공식 둘 - 욕, 그들만의 언어

'빨간 기와'에는 청소년들이 즐겨 사용하는 속어와 비어가 자주 등장한다. 소년들이 사용하는 욕을 보고 고상하지 못하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독자는 위선자다. 청소년기에 뜻도 모를 상스런 욕 몇 마디쯤을 입에 담아보지 않았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글쓴이가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구사한 속어와 비어는 소설에 사실감을 불어넣어 준다. 청소년들 특유의 야생마같이 길들여지지 않은 모습이 욕을 통해 잘 전달된다. 그들의 걸러지지 않은 식욕, 성욕, 배설욕 등이 거친 비속어를 통해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글이 생명력을 잃지 않도록 중국식의 욕을 적절히 한국식으로 번역한 옮긴이의 센스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10대들의 언어를 적나라하게 사용한 또 다른 성장 소설로는 J.D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들 수 있다. 수많은 속어를 거침없이 사용했기 때문에 '호밀밭의 파수꾼'은 발간되었을 당시 미국의 많은 학교가 금서로 지정했다. 심지어 역자 김욱동씨는 이 책을 '어떤 면에서 보았을 때는 미국의 속어나 비어를 모두 집합해 놓은 책'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비속어는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불안정하고 복잡한 심리를 표현하는데 더할나위없이 훌륭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공식 셋 - 가슴 아프지만 따뜻한 사랑 이야기

'빨간 기와'의 소년, 소녀들의 사랑은 불완전하다. 주인공 임빙은 읍장집의 며느리로 들어가기로 약조가 되었다는 소녀 도희를 짝사랑한다. 주변 친구들의 놀림에 화만 벌컥 낼 뿐 소심한 성격 탓에 고백은 엄두도 못 낸다.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도희에게 다가가고 싶어도 다가설 수 없다. 저자는 누구나 겪어봤을 짝사랑의 아픔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곡마단의 아름다운 소녀 가을이와 반장 서백삼의 이루어질 수 없는 가슴 시린 사랑도 눈길을 끈다. 이들의 풋사랑은 황순원의 '소나기'를 떠올리게 한다. '소나기'의 사랑은 소녀의 죽음으로 끝났지만 서백삼의 사랑은 곡마단 소녀가 떠나감으로써 끝을 맺는다. 미문(美文)을 추구하는 저자는 이들의 소박한 사랑을 투명하고 연한 색감의 수묵 담채화로 그려낸다.

이들의 사랑은 불완전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소설에 등장하는 어른들의 부도덕한 사랑보다는 훨씬 완벽해 보인다. 학교 관리인 백곰보와 남편이 있는 서무계 직원 시교환과의 불륜은 정신적, 육체적으로도 결합한 사랑이지만 소년들의 사랑에 비해서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비록 이루어 질 수 없는 반쪽짜리 사랑이지만 그런 순수한 사랑은 청소년기에만 경험할 수 있기에 더욱 아련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모범 답안 ≠ 만점 답안

성장 소설의 필수 요소를 고루 갖춘 '빨간 기와'는 성장 소설의 매력을 한껏 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빨간 기와'에는 성장기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자아 성찰'이 빠졌다. 분명 '빨간 기와'는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소설이지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보이는 소년의 진지한 자아 고민은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주인공 임빙의 자아 고민이 담겨있긴 하지만 그 깊이는 '데미안'에 비하면 한없이 얕게 느껴진다. 잔잔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저자의 세밀한 묘사력에 존재론적 고민이 함께 담겨있었으면 글에 좀 더 힘이 실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때문에 '빨간 기와'는 성장 소설의 '모범 답안'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만점 답안'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간 기와'에는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을만한 충분한 매력이 있다. 성장 소설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살려 독자를 아련한 추억 속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옴니버스 식의 스토리 텔링 역시 감성 전달에 효과적인 장치로 작용한다. 또한 저자의 생동감 넘치는 필력은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긴 분량을 읽는 동안에도 지루함을 느낄 수 없게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긴 여름밤의 끝자락을 어른 세계에 대한 동경과 실망으로 가득 찼던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 장식할 수 있었다. 고작 20살인 내가 중학교 시절의 추억에 잠긴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겐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안민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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