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이요? 저는 직업반에 대학가려고 왔어요." 
동화고등학교 3학년 최보연양은 취업할 것이냐는 질문에 절대 아니라며 두 손을 내젓는다. 그는 대학에 가겠다는 인문계 고등학교 직업반 학생이다.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대학 갈 가능성이 더 많다고 해서 왔을 뿐이죠. 그런데 자격증만으로는 안된다는 말을 듣고, 요즘에 단과학원 다니면서 수능 공부해요.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학교에서 공부 할 것 그랬죠?"

그는 직업위탁기관인 요리학원에서 조리사자격증을 취득하면 대학에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격증은 수능 성적이 좋을 경우 가산점이 될 뿐, 5~6개씩 취득해도 특별전형 자격이 되지 않는다. 하물며 일 년 내내 자격증 시험을 공부해도 졸업할 때까지 한식과 양식, 두 과정만 마칠 수가 있으니 대학 진학의 길은 사실상 없다.

그의 주변에는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이 많다. 직업반이 본래 입시생이 아닌 취업희망자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취직하겠다는 학생은 전체의 10%도 되지 않는다. 직업학교에 직업반이 없는 셈이다.

직업학교는 졸업학교?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칠 때쯤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은 가정통신문을 받는다. 취업을 희망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직업반을 모집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지원자는 한 반에 평균 2~3명 꼴이다. 수능시험이 1년이나 남았는데 대학을 포기할 아이들은 없기 때문이다.

취업을 원하는 학생들도 부모의 허락을 받아내기가 쉽지 않다. "솔직히 대학 가려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왔는데, 어느 부모님이 반대 안 하시겠어요." 종로산업학교 정준영(배문고등학교 3학년)군은 부모님을 설득하는게 가장 어려웠다고 털어놓는다.

지원자가 많지 않으면 담임교사들은 성적이 좋지않거나 말썽부리는 학생들을 직업반으로 보낸다. "직업반에 왜 왔냐구요? 학교에서 가라고 해서요. 공부 못하는 애들은 직업반에 가서 졸업이나 하래요." ㅇ고 김동훈군의 말이다. 이런 학생들에게 직업학교는 곧 '졸업학교'인 셈이다.

직업학교 한 관계자는 "공부해서 대학갈 수 있는데도 취업을 하려고 들어온 애들은 10%도 안돼요. 잘리기 싫어서 희망 없이, 목적 없이 밀려온 애들이 많습니다. 학부모들도 인문계에 있으면 잘리게 생겼고 골치만 썩이니까 졸업이나 하라고 보내죠"라며 혀를 내두른다.

"문제 있는 아이들을 맡아 가르치는 곳이 직업학교는 아니죠."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문제아들을 그런 식으로 몰아내선 안된다고 덧붙인다. 이들에 대한 징계권이 본교에만 있어 지도하기도 어렵다. 장기 결석으로 처치곤란인 학생을 돌려보내도 본교에서는 다시 받아주지 않는다. 중간고사 이후에 돌아온 학생들에 대해서는 성적처리를 할 방법이 없다는 명분이지만 직업학교측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우리가 왜 학교의 불청객인가요?

직업반 학생들은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5일간 직업교육을 받고 월요일엔 소속학교로 돌아가 수업을 한다. 고교졸업에 필요한 최소학점을 이수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는 떠밀듯이 보낸 이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선생님들이 별로 안 좋아해요. 바깥에서 생활하니까 복장도 단정치 못하고 다른 애들한테 악영향 줄까봐 걱정스럽데요." ㄷ고 박유나양은 2학기가 되면 한 달에 한 번만 등교하라는 선생님들이 원망스럽다고 덧붙인다. "우리는 교실도 없어요. 학교 가면 운동장 시멘트 바닥에 앉아있어요. 덥다고 했더니 그늘에 가서 앉으래요." 지난 5월에는 예고도 없이 중간고사를 봤다. 8시에 등교하자마자 시험 볼 내용의 프린트를 받아 바로 한시간 후에 시험을 봤는데 성적이 잘 나왔을 리 없다. 그는 학교측의 이러한 처사가 공부하지 말라는 말과 똑같다며 학교에 거는 기대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처음 직업반을 선택할 때, 대학에 쉽게 갈 수 있다며 설득했어도 학교는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배우는 과목이라고는 수능시험에 나오지 않는 한문이나 교련, 체육같은 것 뿐이다. 이 과목들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문제다. 직업반 학생이 3명뿐인 파주 종합고등학교는 이 학생들에게 영어회화, 한문, 농업을 가르친다. 하지만 정작 시험을 본 과목은 기술과 문학이다. "선생님들이 그냥 잘 보래요. 공부할 프린트라도 달라고 했더니 없다는데요." 서진수(가명)군은 처음에는 놀랐지만 이제 그러려니 한다.

"취업이요? 대학 갈 거예요!"

직업학교와 위탁교육기관에 들어온 학생들의 50% 이상은 대학에 가려고 한다. 직업반에 들어왔지만 인문계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이상 '갈 수 있으면 가겠다'는 식이다.

종로직업학교에서 일어관광통역 코스를 밟고 있는 대원고등학교 3학년 마혁민군은 "어차피 본교에서는 공부하기 힘들 것 같아 왔어요"라며 대학에 갈 생각이라고 말한다. 일어자격증으로 전문대에 진학하거나, 현재 소속된 직업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일본 대학으로 유학 가는 것이 꿈이다. 그러나 모든 학생들에게 대학에 가는 길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어차피 4년제 갈 것도 아닌데 전문대 가려면 직업반 하는게 유리하다고 해서 왔어요."
동남고 김수민(가명)양은 "속아서 왔다"고 표현한다. 직업학교에서도 그렇고 담임선생님들도 직업반에 가면 대학에 쉽게 갈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막상 들어와 보니 수능성적이 좋지 않으면 대학에 갈 수 없는게 현실이다. 주변에도 직업반을 졸업하고 재수하는 선배들이 여럿이다. 결국 자격증 취득과 수능공부를 이중으로 해야하는 어려움만 남았다.

종로 수도요리학원 현광진 원장은 교육기관의 홍보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면허증만으로 어떻게 대학에 갑니까. 아이들이 대학 가기를 기대하니까, 취직해서 일정기간 근무하고 산업체 특별 전형으로 전문대학에 가라고 말하는 형편입니다."

대학진학과 취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

직업반 아이들은 입시를 고려하지 않는 환경에서 공부하기 때문에 대학진학이 쉽지 않다. 뒤늦게 취업으로 진로를 바꿔도 대학을 목표로 했던 학생들은 실습이 부족해 취직하기가 힘들다. 결국 '직업반 아닌 직업반' 학생들은 대학진학과 취업, 이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다가 둘 다 놓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직업학교 한 학년 450여명 중에 1~2명뿐이다. 종로산업학교 이종만 진로상담부장은 전문대 진학까지 합해도 그 비율이 희망자의 10%도 안된다고 말한다. 취업률도 높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1년 동안 자신이 공부한 전공을 살려 직업을 갖는 학생이 전체의 10%뿐이다. 전혀 다른 분야에 취직하는 경우까지 포함해도 취업률은 40%에 그친다. 나머지 아이들은 대학에도 가지 못하고 취직도 되지 않는다.

김유준 서울산업학교 상담부장의 말에는 인문계 고등학교 직업반 아이들의 현실이 담겨있다. "책도 펴기 싫어하는 아이들이라 이쪽으로 왔는데 어떻게 대학에 가겠어요. 취업교육도 기껏해야 1년이니 실업계를 따라갈 수 없는 실정이죠." 학벌위주의 사회가 직업반 아이들을 사회의 왕따로 만들고 있다.

 

정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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