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경 국회 방청·참관 신청 부스 앞. 열 대여섯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다. 이중 대학생들도 몇몇 눈에 띈다. 사람들은 신분 확인 및 필기도구와 가방을 모두 로비에 두도록 하는 등의 까다로운 검사 절차를 거친 후 회의가 열리는 장소로 향했다. 5명 이상 함께 참관할 경우 방청절차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최준식(22·중앙대)군은 경실련에서 왔지만 개인자격으로 방청을 신청했다. 2층 방청석에 입장한 그는 표결하러 온 국회의원들 못지 않게 진지한 모습이다.
 
40분이 지나서도 회의는 시작되지 않았다. 급기야 한나라당에서 민주당 의원들의 지각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불거져 나왔다. 이만섭 국회의장이 "알았어, 알았어, 이제 끝났대" 라며 투덜거리는 의원들을 달랬다. 예정시각 보다 늦게 회의가 진행된 탓에 몇 가지 의제들이 서둘러 부결되었다. 드디어, 이 날의 핵심사안인 '부패방지법안'이 상정되자 소곤거리는 등 산만하던 의원들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회의에 집중했다. 최준식군을 비롯한 부패방지시민연합(이하 부방연대) 회원들 얼굴에도 긴장감이 감돈다.

부방연대가 오늘 국회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 방청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들은 오늘 국회의원들의 표결내용을 기록하러 왔다. 현행 국회법(112조)에 따르면 법안 표결방식은 전자투표에 의한 기록표결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국회는 전자표결 장치 장비의 교체작업을 이유로 기립표결 방식을 택하고 있다. 기립표결을 하면 국회의원 개개인이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에 관해서 기록이 남지 않아 정치인의 무책임한 결정에 대한 책임을 물을 길이 없어지게 된다. 이에 여러 시민단체가 소속되어 있는 '부패방지시민연합'은 어느 의원이 어떤 안에 찬성을 하였는지 직접 기록하기로 했다.

오늘 표결에 부쳐진 부패방지법은 원안과 두 개의 수정안, 모두 세 법안이다. 30명 남짓 되는 시민기록관들은 정치인들의 좌석을 9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다. 표결이 시작되자 이들은 각 의원들의 이름과 자리가 표시된 회의장 좌석이 그려진 종이 위에 맡은 의원의 표결내용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하원상(26)씨도 처음이지만 함께 온 시민단체 회원의 도움을 받아 빨간 펜으로 열심히 O,X를 그린다.

회색 유니폼의 여직원들이 숙련된 기술로 뒤에서부터 종종 걸음으로 훑고 지나가며 순식간에 일어난 의원들의 수를 헤아린다. 잠깐 사이에 한 명의 의원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잔뜩 신경이 곤두선 시민기록관들의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인다.

표결이 끝났다. 두개의 수정안이 모두 부결되고 '특별검사제도', '공직자 윤리 개정안'이 모두 빠져있는 '부패방지법 원안'이 통과되었다. 결과가 발표되자 '시민기록관'들은 재빨리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1구역 맡은 사람! 2구역 맡은 사람!" 각자 맡았던 구역들의 의원 표결 기록을 모으고 결과를 내기 시작했다.

두 개의 수정안에 모두 찬성하지 않은 의원들이 집중 공략의 대상이 됐다. 회원들은 이들 의원들은 부패척결 의지가 없다고 보고 명단을 공개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외에도 개혁의지가 약하거나, 비양심적인 의원들을 가려내기로 했다. 박근혜 등 한나라당의 불출마 의원 3명과 기권의원들도 구설수에 올랐다. 모든 정리가 끝나고 공개할 정치인들의 명단이 결정되고서야 소란은 진정되고, 회원들은 해산하였다.

이날 시민기록관으로 참여한 손성태(21·고대)씨는 "또 껍데기만 있는 법만 만들어 진거죠. 오늘 다시 한번 한국의 국회의원의 지적, 양심적 불치병을 재확인 했습니다다"며 허탈해 했다. '특검제'와 '공직자 윤리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여러 시민단체들의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함량미달의 '부패방지법'이 채택되었다. 이 법안이 개정되기 위해선 또 다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까?

 

이기정 . 김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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