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평구의 서북병원 53병동으로 갔다. 전에는 폐결핵 전담병원이었지만 서울시가 코로나 19 전담 치료병원으로 지정했다.

청구성심병원이 마련한 구급차를 타고 20분을 달려 ‘코로나 환자 내리는 곳’이라 적힌 곳에서 기다렸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방호복과 페이스 실드 차림의 간호사가 데리러 왔다. “안녕하세요! 장호림 환자 맞으시죠?”

병실이 있는 5층으로 향했다. 미각과 후각이 없어진 상태라 병원의 알코올 냄새를 느끼지 못했다. 병실은 3인 1실이었다. 가장 안쪽, 창가 자리로 배정받았다. 좁은 병실에서 그나마 밖을 내다볼 특권이 생긴 셈이다.

▲ 서울 은평구의 서북병원

병실은 20평 정도였다. 생활하기에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음압 기계를 통해 기압을 외부보다 낮게 만들어 항상 저기압 상태를 유지했다. 내부 기압이 높아지면 코로나 균이 밖으로 나갈 수 있어서다. 의료진과 직원만 문을 열 수 있었다.

오후 5시, 이전 병원의 진료 기록부를 병원에 제출하고 주의사항을 안내받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폐쇄회로(CC)TV가 24시간 녹화했다. 택배는 1주일에 한 번만 전달됐다.

가장 중요한 일은 몸 상태 보고였다. 방법은 간단했다. 혈압 측정기와 산소포화도 측정기, 체온계를 이용해 매일 오전과 오후 8시, 오후 1시에 혈압과 체온검사, 산소포화도를 측정했다. 그리고 침상 머리맡의 통화 버튼 장치로 간호사실에 알리면 됐다.

▲ 병실의 음압(陰壓) 기계. 음압은 대기압보다 낮은 압력 상태를 말한다.

수축기 혈압이 90~120㎜Hg, 이완기 혈압이 60~80㎜Hg이면 정상이다. 산소포화도는 96~100%가 정상이다. 96% 이하면 체내 산소가 부족한 상태여서 조치가 필요하다. 처음 측정에서 혈압은 정상이지만 산소포화도는 89%라서 간이 산소호흡기를 첫날부터 코에 꼈다.

주의사항 교육이 끝나고 병원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을 받았다. 오이 비누, 치약, 칫솔, 갑 휴지, 검은 대용량 봉투가 지퍼백에 있었다.

1시간 정도 교육이 끝나고 의사가 몸 상태를 설명했다. 나는 나이가 젊고 어느 정도 몸을 가눌 수 있으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사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우리 병원에 입원한 코로나 환자 증세 중 탑 3안에 듭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하셨어요. 진짜.”

나는 놀라서 “진짜요?”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이전 병원에서 찍은 CT 사진을 보니 양쪽 폐의 염증이 심해 온통 하얗다고 했다. 전형적인 중증 폐렴이었다. 살면서 폐렴에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서 더 충격적이었다.

▲ 치료 기간에 처방받은 약. 하루에 10봉지 이상을 먹었다.

팔에 링거를 꼽았다. 비타민이 든 수액과 코로나 19 치료제를 투입했다. 그런데도 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바늘로 찌르는 듯, 근육 마디마디가 욱신거렸다.

불안감에 인터넷 뉴스를 찾아보니 젊은 사람의 코로나 사망률은 0.02% 수준으로 굉장히 낮다고 했다. 그래도 얼마 되지 않는 확률에 내가 포함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다음날, 중증 환자에게만 투여되는 치료제(렘데시비르)가 추가로 처방됐다. 울렁거림이나 두통 등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어서 간호사 설명을 듣고 투약 동의 서약서를 작성했다.

렘데시비르는 에볼라 항바이러스 치료제였다. 코로나 19 치료에 효과를 보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처럼 혈중 산소포화도가 낮고, 폐렴이 심한 위중증 환자에게 처방한다. 개당 300만 원 정도이니 9일 정도라면 2700만 원어치를 주입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 렘데시비르, 비타민 수액, 해열제까지 세 가지 종류의 링거를 9일간 꼽았다.

링거를 팔에 3개나 꼽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낮이라 잠이 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40여 분, 눈을 붙였을까. 머리맡의 핸드폰이 울렸다. 부모님이었다. “코로나 확진이랜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확진이라니. 부모님은 2차 백신까지 맞았다. 돌파 감염 비율이 0.05%로 낮은데 확진이 됐다. 부모님도 믿기지 않아 보건소에 여러 번 문의했다.

내게 의심 증상이 생긴 9월 24일부터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간호하다가 감염된 듯했다. 아버지는 직장 생활을 했기에 10명 넘는 지인이 자가격리를 했다.

불행 중 다행은 증상이 경증에 그쳤고 집에서 자가격리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10일의 재택 격리 중 부모님은 미열과 기침이 있었지만 폐렴이나 40도 넘는 고열 증세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전화를 끊고 미안함을 느꼈다. 나 하나 때문에 모두가 피해를 봤다. 그날 밤, 죄책감에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일과는 오전 6시, 부모님의 몸 상태를 여쭈는 일로 시작했다. 다행히 부모님은 별다른 증상이 없었다.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었다.

몸 상태가 호전되며 조금씩 움직였다. 간호사는 몸 상태가 어떤지를 호출기로 종종 물었다. 수많은 환자를 담당할 텐데도 일일이 챙기는 의료진이 정말 감사했다.

서북병원 53병동은 간호사 1명이 환자 24명을 담당한다. 의료법에 따르면 간호사 1명이 환자 12명을 담당해야 하니 과로하는 셈이다.

취약계층으로 분류되는 70대 고령자가 대다수여서 환자에게서 눈을 떼거나 관리를 소홀히 하면 안 됐다. 의료진은 쉬는 시간 없이 종일 CCTV 앞에 앉았다. 그래서일까. 내가 퇴원하는 날까지 사망자는 1명도 나오지 않았다. 고령층의 코로나 치명률이 17.4%인데도.

토요일 새벽 3시경, 심한 기침 때문에 간호사실 호출기를 눌렀다. 1분도 되지 않아 받았다. 밤을 새우며, 주말까지 반납하며 환자 수십 명을 돌보는 노고가 얼마나 큰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서북병원에서 치료받은 지 10일째가 됐다. 두 번째 CT 촬영에서 폐의 염증 소견은 거의 없을 정도로 깨끗해졌다. 열은 더 오르지 않았다. 링거 역시 모두 제거했다. 족쇄를 푼 듯이 자유로운 느낌을 받았다.

▲ 병원에서 제공하는 식사

입맛이 돌아와 조금씩 먹을 수 있었다. 식사는 아침 7시 50분, 점심 12시 30분, 저녁 5시 50분, 이렇게 세 번이다. 고기와 과일을 항상 주는 등 영양소를 골고루 채우도록 구성됐다. 미각이나 후각이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았지만 회복하려고 남김없이 비웠다.

15일째 되던 날. 의사는 “아직 다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위험 고비는 넘기셨으니 내일 퇴원해도 괜찮다”고 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퇴원해도 된다니. 영원히 나가지 못할 줄 알았던 병실을 나간다는 사실에 감개무량했다.

수화기 너머로 의사의 말이 들려왔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눈물이 났다. 힘들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겨우 전했다.

10월 12일 퇴원 날, 아침이 밝았다. 나간다는 생각에 이른 새벽부터 눈을 떴다. 병실에서 같이 지내던 환자 1명은 4일 전에 퇴원했다. 간호사가 들어와서 주의사항을 말했다.

“챙겨오신 옷가지는 가지고 나가셔도 되고, 노트북이나 전자기기는 깨끗이 소독솜으로 닦아 주세요. 그리고 그간 사용하셨던 침대 커버와 베개 커버는 벗겨서 폐기물통에 버려주세요!”

모든 준비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드디어 10시 30분. 간호사가 들어와서 약 봉투를 건네고 병원 입구까지 안내했다. 간호사는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동안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길거리는 쌀쌀했다. 9월 말에 들어왔는데 달이 바뀌었으니 그럴만했다. 격리에서 해제된 부모님이 마중 나왔다. “아들, 가자 집으로! 고생했어.”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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