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병원에서 백신 1차 접종을 했다. 9월 24일 오전 10시 30분경이었다. 3시간 정도 지나자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추워졌다. 날씨가 꽤 따뜻했지만 전기장판을 켜고 누울 정도였다.

백신 이상 반응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37도의 미열에 오한만 들었기 때문이다. 병원 안내문에는 ‘열이 38~39도까지 오를 수 있고, 오한이 있을 수 있다’ ‘최소 3일간은 집에서 쉬고 이상 반응이 사라지는지 관찰해라’는 내용이 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면 괜찮을듯해서 낮잠을 청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참을 수 없는 열감 때문에 눈을 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불덩이였다. 체온계로 온도를 재니 38.7도였다. 잠자기 전보다 1도가량 올랐다.

의료계는 열이 38도를 넘기면 극심한 두통이나 심하면 호흡곤란까지 온다고 본다. 그럼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두통이 심하지 않고 코로나 19 확진 여부를 판가름하는 39도를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접종 유의사항 안내문

어머니가 걱정됐는지 병원에 전화해서 내 증상을 설명했다. 나는 누워서 ‘괜한 걱정을 하시네’라고 생각하며 대화를 들었다.

“백신 1차 맞고 그런 반응이 발생하면 코로나 무증상 확진자입니다. 지금까지 6000명에게 백신을 맞춰본 데이터상 100% 확신해요. 지금 즉시 코로나 검사받으러 가보세요.”

어머니와 나는 동시에 “네?”라고 외쳤다. 무증상 확진자라고? 뜻밖의 답변에 얼이 빠졌다. 접종 이상 반응일 수 있지 않은가. 의사는 100% 확신했지만 우리는 믿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서 부모님과 나는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을 검색했다. 같은 증상을 보인 사람이 꽤 있었다. 열이 39도까지 올라 타이레놀을 먹으니 3일 뒤 정상으로 돌아왔다거나, 40도 가까이 올랐음에도 푹 자고 일어나니 하루 만에 괜찮아졌다는 후기가 있었다.

나는 “설마, 에이 아니겠지. 의사 선생님이 과장하시는 걸 거야. 인터넷에서도 나 같은 증상의 사람이 많이 있고, 안내문에도 3일까지는 지켜보자 했으니 기다려보자”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몸이 괜찮아지길 기도하며 타이레놀과 해열제를 한 알씩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9월 27일 오전 7시. 열이 41도까지 올라갔다. 열이 생긴 지 3일째였다. 41도의 고열에서는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정신이 혼미하다.

아침부터 잦은 기침과 함께 종이컵 절반을 채울 정도로 피를 토했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아 의사 말대로 코로나 19 검사를 받기로 했다.

어머니 부축을 받으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서울 마포구보건소의 선별검사소로 향했다. 이른 아침인데 줄은 계단 3층까지 이어졌다. 30분간 기다려 검사를 받고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열은 41.7도까지 올랐다. 어머니는 오전 9시경 119에 전화해 고열이 있어도 진찰 가능한 응급실이 있는지 문의했다. 119에서 몇 군데를 알려줬다. 부모님은 전화를 돌렸다.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응급실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네 번을 걸었더니 연세세브란스병원이 전화를 받았다. “오실 수는 있는데 대기 환자가 너무 많아서 바로 진료는 불가능하고 6시간 정도 기다리셔야 해요.”

열이 40도가 넘어 생사가 걸렸는데 6시간을 대기해야 한다니….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서 대꾸할 기력조차 없었다. 어머니가 재차 물어도 답변은 똑같았다.

몇 시간을 더 헤매다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서울 은평구의 청구성심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다행히 환자가 적어 도착하자마자 검사실로 이동해 수액과 해열제를 맞았다. 그리고 코로나 19 검사를 비롯한 CT 정밀 촬영을 했다.

1시간 정도 지났을까. 의사가 부모님을 불렀다. “혈액검사와 CT 소견을 보니 피 염증 수치가 일반인의 수십 배가 나왔다. 폐 염증이 심각하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손상된 확진자의 폐와 유사하다. 일단 격리해야 할 것 같다.”

▲ 청구성심병원에서 찍은 폐 CT 사진. 양쪽의 까만 부분이 폐, 빨간색 표시가 코로나 19로 인한 염증이다.

부모님이 다시 물었다. 코로나 19일 확률이 얼마나 되느냐. 의사는 확신했다. “95% 이상입니다.” 그날 저녁, 병원에서 마련한 1인 격리병실에 입원했다. 확진 전이지만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야 했다. 급하게 입원하느라 옷을 챙기지 못했다.

침상에 누웠는데 의사의 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95%라는 숫자가 너무나도 불안했다. 죽고 싶어질 만큼. 코로나 확진으로 주변에 끼칠 피해를 생각하니 두려움과 죄책감에 더욱 그랬다.

“5%의 가능성에 걸어보는 거야. 그냥 계절성 독감이나 급성 폐렴일 수도 있겠지.” 나를 애써 안심시켰다.

9월 28일 새벽 3시.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에 일어났다. 그가 방호복을 입어서 꿈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장호림 환자, 코로나 양성반응이 나오셔서 지금부터 방호복을 입고 출입할 거에요.” 그렇게 간절히 빌었지만 양성판정을 받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적막감만이 병실을 채웠다. 무엇보다도 바이러스가 어디에서 옮겨와서 감염됐는지 의문이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걸린 거지? 근래 다닌 곳이라곤 집과 직장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걸릴 만한 장소가 없었다. 술집이나 카페 등 사람 많은 곳은 최대한 피하려 했다. 그런데도 걸리다니. 억울하다 못해 서러웠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아 누워서 창문 밖을 봤다. 새벽이었지만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그들을 보며 지난 3일간, 생과 사의 문턱을 넘나들던 시간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했다.

세상과 단절된 곳. 벽으로 가로막혀 움직이지 못하는 현실. 감옥이라도 들어온 듯, 한순간 변한 내 신세가 서글퍼졌다. 왜, 도대체 이런 불행이 일어났을까.

▲ 서울 마포구보건소에서 받은 메시지

9월 28일 오전 7시 30분. 전화기가 계속 울렸다. 서울 마포구보건소 직원과 영등포보건소 직원이 나의 이동 경로를 확인하려고 했다. 몸이 온전하지 않았지만 긴장감 때문에 비교적 멀쩡한 정신으로 전화를 받았다.

역학조사 질문은 크게 5가지였다. 나이, 성별, 직업, 1주일 동안 지인이나 가족 중 코로나 19에 감염된 사람과의 접촉 여부, 집의 애완동물 유무. 질문과 답변이 15분 정도 이어졌다.

마포구보건소의 심층 역학 조사관이 10분 뒤에 전화해서 마스크 쓴 사진과 쓰지 않은 사진, 22~27일의 카드사용 내역을 사진으로 찍어달라고 요구했다. 몸을 일으켜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조사관은 5일간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 전에는 14일 이내에 갔던 곳을 다 검사하지 않았는가. 이번에는 최근 5일 동안만 대상으로 했다.

혹시 잘못됐는지 몰라서 “저번 주 일정은 말씀 안 드려도 괜찮을까요?”라고 물었다. 조사관은 “아, 그거는 다음에 필요하면 다시 물어볼게요. 일단 22일 수요일부터 27일 월요일까지 이동 경로만 말씀해주시면 돼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시간대와 장소별로 세세하게 진술했다. 거짓말을 하면 처벌 대상이라지 않는가. 두통이 가시지 않은 채로 30분 동안을 씨름했다.

마지막으로 “혹시 어디서 감염됐는지 그런 부분을 알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이동 경로를 분석해보겠지만 글쎄요”라고 대답했다. 확진자를 접촉했거나 감염 매개체가 확실하면 예측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사회 곳곳의 무증상 확진자가 너무 많아서 정확히 짚어내기 어렵다고 한다. 확진자 이동 경로 조사에 구멍이 생길 우려가 있는 부분이었다. 마음은 답답했지만 더 물어볼 수도, 알아볼 방법도 없을 것 같아 전화를 끊었다.

이후에도 전화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국회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때라 영등포보건소는 물론 마포구보건소에서 계속 연락이 왔다. 전화가 올 때마다 일일이 다시 설명했다. 마포구보건소 직원에게 했던 말을 영등포보건소 그리고 마포구보건소의 다른 직원에게 했다.

답답한 마음에 “마포구보건소에도 얘기했는데 전달이 안 됐나 보죠?”라고 영등포보건소 직원에게 되물었다. 국회 담당자 전화번호도 잘못 인수인계되어 한동안 확인 전화에 시달렸다.

오후 1시쯤, 코로나 19 전담 치료병원인 서울 은평구의 서북병원으로 옮겨진다고 했다. 맛과 냄새를 느끼지 못해 생고무 같은 질감의 음식을 씹으며 기다렸다. 오후 2시가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간호사에게 물으니 확진자가 너무 많아 더 대기해야 한다고 했다.

간호사가 말동무를 해줘서 심심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희생과 노고가 너무도 감사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3시간을 더 기다렸다가 구급차를 타고 오후 4시 30분경 서북병원으로 갔다. 나를 담당했던 남자 간호사가 뒤에서 인사했다. 16일에 걸친 서북병원 생활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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