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남성전기노동조합 교육선전부장을 시작으로 1980년부터 노동운동과 진보 정치에 몸담았다. 진보적 사명은 그에게 필연적이었다.

기자와 9월 10일 만난 심 의원은 자신의 소명이 생긴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교육자란 목표가 뚜렷해 데모에도 잘 안 어울렸어요…그런데 결국은 시대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죠.”

심 의원은 1978년 서울대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등 읽고 싶은 책을 숨어 읽으며 민주화에 눈을 떴다. 학생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고 ‘대학문화연구회’에 참여했다.

그는 학회에서 활동하다 여학생 차별을 경험하자 1980년 서울대 최초로 여학생 조직을 만들었다. 서울대 사범대학 총여학생회다.

대학 2학년 겨울방학에 했던 공활은 노동운동을 하는 계기가 됐다. 심 의원은 당시 느낀 점을 이렇게 회상했다. “공장에서 본 삶은 완전히 딴 세상이었죠. 교육자로서 가장 먼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심 의원은 1980년 재봉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장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입사한 대동전자에서는 임금과 식사 개선을 요구하다 해고됐다. 노조 활동 단속이 심하던 때라 일자리를 자주 잃었다.

두 번째로 취업한 남성전기에서는 노조 교육선전부장을 맡았다. 노래 가사를 ‘오르고 또 오르고 자꾸만 오르는 물가’라고 개사해 부르고 다니다가 해고됐다.

그 후 1980년대 최대 규모 봉제 공장이던 대우어패럴에 재취업했다. 오후 8시까지 잔업을 마치고 새벽까지 노조 활동 계획을 세웠다. 학출(학생 출신 노동자) 신분을 숨기기 위해 ‘김혜란’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서울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1985년 6월 24일 구로동맹파업이 시작됐다. 심 의원은 어린 노동자가 끌려가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잡히면 간부가 위장 취업자라는 이유로 파업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일간의 파업이 끝나자 집시법 위반 등 9개 혐의로 수배가 떨어졌다. 후배들이 잡혀가 심 의원이 어디에 있는지 추궁당하고 고문받았다. 그는 자서전 <난 네 편이야>에서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때는 진보 외길을 묵묵히 걷는 게 보답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했던 김준희 씨는 심 의원을 이렇게 떠올렸다. “저희를 지도하고 심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죠. 우리 구동파 사람들은 심 언니가 우리한테 줬던 도움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의심도 없어요. 우리를 인간답게 살게 해준 사람입니다.”

▲ 농성 중인 대우어패럴 파업 노동자들(출처=오픈아카이브)

심 의원은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를 만들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 생긴 노동조합 조직이었다.

민주노총을 만드는 데도 역할을 했다. 1년 동안 준비위원회에서 일하고, 금속노조 사무처장으로 일했다. 심 의원은 금속노조에서 활동하며 산별노조 교육을 위해 전국으로 출장을 다녔다. 아이를 키울 때도 주말마다 금속노조 사무실이 있는 부산에 갔다.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어느 날, 집을 나가기 전에 아들의 뺨을 어루만졌는데 자는 줄 알았던 아들의 볼에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심 의원은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엄마로서 미안함을 묻고 단상 위에 섰다.

정치인 삶은 2004년 시작했다. 제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1960년 제5대 총선 이래 진보 정당이 원내에 처음 들어갔다.

길을 바꾼 심 의원에게 기자들이 “얼마나 이념이 투철했으면 반평생 노동운동을 했나”는 질문을 자주 했다. 심 의원이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했던 이유는 이념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에 아직 변화가 오지 않아서였다.

▲ 민주노동당 시절의 심상정 의원(가운데)과 보좌진(출처=심상정 의원실)

김형탁 전 정의당 부대표는 정치를 시작한 심 의원을 이렇게 평가했다. “노동운동도 잘했는데 정치를 그렇게 잘할 줄은 아무도 몰랐죠.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심 의원은 제17대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 들어갔다. 오건호 전 보좌관은 노동운동을 했던 심 의원에게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했다. 심 의원은 “국회는 국가 권력을 다루는 것인데 경제와 재정을 모르면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냐”고 했다.

정치인으로서 부족한 부분을 열심히 배웠다. 오 전 보좌관, 손낙구 민주노총 정책국장과 오전 6시부터 경제와 금융을 공부했다.

국회 입성 다섯 달 만에 큰 성과를 냈다. 심 의원은 재정경제부 국정감사에서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해 1조 8000억 원 규모의 손실을 낸 사실을 밝혀냈다.

양당 체제가 굳건한 국회에 민주노동당이 진입했기에 의원들은 유달리 큰 책임을 느꼈다. 단병호 전 민주노동당 의원은 이렇게 회상했다.

“국회가 주는 역할에 대한 중압감이 굉장했고 하루하루 살얼음 강 건너는 마음이었다. 지금 우리의 행동과 말 하나가 진보의 역사와 노동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항상 고민하고 생각해야 했다.”

심 의원은 2007년 대통령 선거에 처음 출마했다. 첫 마디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열겠습니다”였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2011년 부당해고를 당하자 심 의원은 해고 철회를 촉구하며 30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였다. 3년 후에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9일간 단식 농성을 했다.

심 의원은 2012년 ‘삼성 백혈병 피해자 증언대회’를 개최했다. 이듬해 ‘S그룹 노사전략’ 문건을 폭로했다. 삼성그룹의 무노조 경영 실태가 드러난 사건이다. 삼성은 2019년 81년간의 무노조 경영을 포기했다.

심 의원은 2012년부터 ‘가습기 살균제 사건’ 피해자를 만나며 공론화에 힘썼다. 지난해에는 정의당 의원들과 함께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촉구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였다.

법 제정을 위해 29일간 단식 농성한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단식 농성을 할 때) 도움을 굉장히 많이 받았죠…같은 생각,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함께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심 의원은 내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며 1호 공약으로 ‘신노동법’을 발표했다. “노동은 인간을 인간답게, 사회를 사회답게, 공동체를 공동체답게 만드는 원천”이라고 말했다.

단 전 의원은 “노동운동을 하면서 가진 노동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노동법이 제대로 만들어져서 대선을 통해 사회적 쟁점이 되고 질 높은 노동 환경들을 만들어가는 데 기초가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 심 의원이 대선 1호 공약을 발표하는 모습(출처=심상정 블로그)

기자가 대선 출마 이유를 묻자 심의원은 이렇게 답했다. “모든 국민이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만드는 게 핵심 이유입니다. 경제가 선진국 수준이 되었다고 시민의 삶도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번 대선은 이런 점을 시민이 자문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입니다.”

심 의원은 10월 12일 정의당 대선 후보로 최종 선출됐다. 그는 수락 연설에서 자신과 정의당의 승리가 곧 시민의 승리가 되도록 남은 열정을 모조리 쏟아붓겠다고 밝혔다.

“사랑하는 당원 여러분, 우리는 20년 동안 오직 시민이 더 나은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당당히 싸워왔습니다. 늘 시대정신의 알람을 울리고 미래를 열어왔다고 자부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 모든 자부심과 열망을 안고 새로운 출발선에 섰습니다.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나아갑시다. 온 힘을 다해 민심의 바다로 달려갑시다. (중략)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의 대전환에 마지막 길목에 서 있습니다. 전환의 정치로 위대한 시민의 시대를 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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