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수 전 인천시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7월 15일 오전 10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호성빌딩 10층. 캠프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기다리면서 사무실을 둘러봤다. 입구부터 내부까지 사진이 가득했다. ‘미션 파서블’ 문구와 함께 웃는 모습이 많았다. 벽면에는 상패가 보였다. 의정대상, 자랑스런한국인대상, 위촉패, 감사패, 공로패. 그가 지나온 길이었다.

▲ 기자와 안 전 시장이 인터뷰하는 모습

- 젊은 시절이 궁금하다.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정치인의 꿈을 품게 된 계기가 있나.
“아주 어려서부터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가 한 반에 열 명쯤이나 될까 하는 그런 학교였다. 그러니까 국민학교 분교를 다녔다. 충남 서산 이북면의 이북국민학교. 공부를 잘하니까 반장을 했다. 그때가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나도 대통령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사나이가 큰물에서 놀아야 된다고 해서 경기고로 갔다. 재수를 했다. 들어가니 동년배보다 나이가 좀 많았다. 장남인데다가 어렸을 때 공부 잘한 데다가 좀 덩치도 컸다.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에서 CEO를 했다. 재세산업이라는 회사에 다녔다. 1976년부터 약 4년간 했다. 무역회사인데 당시에는 무역이 스타트업이었다. 경기고 선배, 동창 등 5명이 창업을 해서 회사 규모가 컸다. 약 1조 이상. 지금으로 보면 10조 정도 더 된다. 그런데 부도가 나서 1년 쉬다가 동양그룹에 들어갔다. 거기 가서 투자, 금융을 했었고 선물이라고 해서 첨단적인 기법이 동원됐다. 그러면서 창업 투자 회사를 분사해서 CEO로 일했다. 다음에는 정보통신인데, (손으로 원을 그리며) 이만한 전화기를 차에다 싣고 다니면서 일했다. 정부에서 셀룰러 폰, 무선 전화 시스템을 확장하는 데 민간 부분에서 협업하는 역할을 했다. 전에는 전화기가 다 유선이었는데 선이 끊어져서 오는 게 굉장히 혁명적인 변화였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전국에 시스템 망을 깔고 이것이 회사나 개인한테 넘어가는 과정에서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기술은 미국에서 왔지만 내가 민간 사이드에서 정보통신부하고 협업해서 일했다. 15년간 기업에서 첨단적인 일을 하다가 1996년부터 정치권에 들어왔다. 10번 출마해서 5번 당선되고 5번 떨어졌다.”

- 후보님의 키워드가 리더십, 창의성, 혁신. 이렇게 정리가 될 것 같다.
“세계인명사전에 소위 저명인사를 보면 70%가 장남일 거다. 지금은 하나밖에 안 낳으니까 다 장남일 텐데, 옛날에는 장남이 될 확률이 10~15%밖에 안 됐다. 애들이 많으니까. 우리 집만 해도 7남매다. 장자 상속의 문화도 있었지만, 임금도 장자부터 오지 않나. 장자가 저명인사가 될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는 걸 의미한다. 장남으로 태어나는 것은 일단 리더십의 필요조건을 갖추는 거였다. 나는 일정 부분 소년소녀가장인 셈이다. 과거에는 장남이라는 게 (리더십의) 요인 중에 하나라고 봤다. 그 후에는 본인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어떻게 훈련을 받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발명하는 거나 그런 건 혼자 노력하면 되지만 리더십은 여러 사람 사이에 있을 때 거기서의 지도자, 이끌어나가는 리더로서의 자질이다. 나 같은 경우를 보면 장남으로서 집 안에서의 리더십이 있었고, 학교 다니면서 반장이라든지 이런 걸 하면서 책임감과 어떤 비전을, 작지만 나름대로 미래에 대해서 단체나 조직에서 해야 할 일을 제시하고 이끌어나가고 그랬으니까. 그래서 (리더십은) 그런 아주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 안 전 시장의 캠프 사무실 입구

- 대학 시절에도 리더십을 발휘했던 활동이나 경험이 있나.
“내가 사실 고등학교 때 데모를 주도했다. 정치적인 행위인데 당시에 고등학교는 데모를 많이 안 했을 때고 대학은 엄청나게 많이 했는데, 일종의 학생운동처럼 하던 때였다. 그러면서 대학, 대학원 시절에도 사회의 어떤 시사성 있는 문제가 있을 때 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의사 표출을 하기도 했다.”

- 대학교를 조금 늦게 입학했다. 20대 초반은 어떻게 보냈나.
“고등학교 때 데모를 했기 때문에 대학 선택의 제한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적인 면에서 먹거리에 대해서 기본인 인프라를 깔아준 반면에 정치적으로는 독재 체제를 했었다. 인권에 대한 제한도 있었던 거였다. 그래서 가고 싶은 대학을 고등학교에서도 잘 써주지도 않았고 집안도 어려워서 시골로 내려갔다. 3년 동안 어부 일을 했다. 시골에서 벌어서 서울 생활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입주 과외를 뛰고 이러는 게 힘들었다. 3년간 배를 타거나 잡부처럼 일하면서 지냈는데 그런대로 돈을 좀 모았다. 여유가 좀 생긴 상태에서 대학을 들어갔다. (서울에서는 돈 벌려고) 맥주 홀의 웨이터도 했다. 무교동에서.”

- 젊은 시절에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뭔가.
“매일매일 생활이 부딪히는 생활이었다. 쌀이 일주일 후면 떨어진다. 그런데 그 후에 대한 대책이 없는 거다. 이러면 굉장히 불안한 거다. 고정 수입이 없는데 학업은 학업대로 해야 하고 이런 여러 가지. 과거에는 고정된 직업이 없었다. 우리가 대학교 졸업 후 대기업이 성장을 빠르게 하면서 직장이 많이 생겼다. 증권을 해서 당시 돈으로 거의 10억을 벌었다. 증권이라는 건 굉장히 획기적인 일이다. 돈을 벌기가 어렵게 돼 있다. 지금도 젊은 친구들도 증권 혹은 코인 같은 것을 많이 하는데 돈을 벌 확률은 5% 미만이다. 나는 그때 파도를 잘 탔다. 증권에 대한 어떤 메커니즘을 이해해서 개인적으로 굉장히 성공적인 걸 했다. 그때는 상당히 여유 있게 살았다. 정치하면서 돈을 다 써버렸다. (웃음)”

- 힘든 시절을 버텨오는 데 힘이 됐던 좌우명이나 영향을 준 사람이 있나.
“뭐든지 해결해 나갈 수 있다라는 생각을 했고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에 버텼다. 장남인데 동생들 데려다 놓고 내가 벌지 않으면 아무도 벌 사람이 없었다. 물론 시골에서 부모님이 어떻게 해서 돈을 벌어서 보내기도 했지만, 아무리 적게 써도 기본 생활이 필요한데 그거를 해결해야 할 책임감 때문에 부정적으로 ‘이거 안 된다’ 이런 거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무조건 부딪혀야 했고 지금 과거로 돌아가면 똑같이 살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자신이 없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

▲ 안 전 시장의 경기고 재학시절

- 부딪혀야 한다는 마인드가 인천시장 시절에 여러 대규모 사업을 추진한 힘이 된 건가.
“도전 정신이 있었다. 좌우명이 뭐냐 물어보길래 ‘나는 실패가 두렵지 않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 송도나 인천대교를 얘기하니까 하는 말이지만 안상수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다. 송도만 하더라도 전부터 앞바다를 매립해서 인천 땅을 넓히자는 얘기가 나왔었다. 인천 시민, 인천 정치권에 제시했지만 된 게 없었다. 시장이 돼서 경제자유무역법을 김대중 대통령 때, 통과시키고 노무현 대통령 때, 지정받아서 추진했다. 1000만 평 정도를 매립해서 도시를 건설했다. 청도를 발전시키려니까 대학교를 유치하는 게 제일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그래서 서울대 정운찬 총장에게 얘기했더니 이과 부분을 이전할 수 있다고 돼 있었는데 총장이 그만뒀다. 그래서 연세대를 접촉했다. 정창영 총장이 동의해서 2005년 10월에 만나서 여러 가지 검토를 했다. 2006년 2월에 MOU를 맺는데 총장하고 나를 제외하고 다 반대했다. 학생, 동창회, 학부모, 교수진, 이사진이 다 반대했다. 우리 세계적인 연세대학이 웬 시골에, 학생 등록금 받아서 왜 그런 데다 투자하냐고 했다. 당시에 연세대 이사장이 방우영 씨였다. 조선일보 회장이셨다. 방 회장을 설득시키겠다고 헬리콥터를 탔다. 둘이 소방 헬기를 타고 거기 갔다. 연세대 자리가 2006년 2월에 가보니까 바다였다. 이사장이 “아니 웬 바다에다가 학교를 짓는다는 거야. 더군다나 4년 안에”라고 했다. 그래서 사인만 해주시면 나중에 처리하겠다고 했다. 학교는 5~6층 건물이기 때문에 1년이면 다 짓는다. 인프라 구축에 2년 걸린다. 그래서 2010년, 4년이 됐다. 3월에 개교했다. VIP가 많이 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 이희호 김대중 대통령 부인이 오셨다. 인천시장인 나와 김영삼 전 대통령, 방우영 이사장, 연세대 신구 총장이 점심을 먹었다. 앉자마자 조선일보 방 회장, 그러니까 연세대 이사장이 “내가 기자 생활을 50여 년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 이후에 가장 추진력이 높은 사람이 안상수 시장입니다” 이렇게 얘기했다. 그랬더니 김영삼 전 대통령이 “내가 안상수를 15대 때 공천해서 정치 시작했는데 아주 잘해” 이렇게 얘기했다. 헬리콥터 타고 봤던 바다가 4년 후에 학교가 돼서 개관했으니까, 깜짝 놀란 거다.”

▲ 안 전 시장의 캠프 사무실

- 이화여대와도 인연이 있다. 장학금 후원을 했다.
“와이프가 이대 출신이고 이대에서 박사도 받았다. 이대 교회도 같이 가고 그랬다. 일요일에 대강당에서 예배를 봤다. 꽤 여러 차례 갔었다. 그런데 아내가 1999년에 쓰러져서 11년 정도를 의식 없이 침대에서 생활했다. 머리 뇌출혈이 와서 수술했는데 의식 없이 투병하다가 2010년 10월에 운명했다. 4~5년 정도는 어렴풋이 의식이 좀 있었다. 눈으로는 대화하고 말은 못 했다. 손발을 못 쓰니까 간병인이 도와줬다. 시장을 그만두니까 2개월 내로 운명했다. 우리가 애가 없다. 그러니까 남는 게 없었다. 결혼하고 10여 년만에 아파트를 샀다. 자식이 없고 이러다 보니까 완전히 세상에 왔다가 그냥 무로 돌아간 거였다. 그래서 뭔가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해서 아파트를 이대에 기증하기로 생각하고 전화를 했다. 개교기념일인가 큰 행사 때, (기부) 사례라고 (학교에서) 발표했고 그걸 기자가 정리해서 쓴 것 같다.”

- 2030 세대의 주거, 일자리 문제를 많이 언급했다. 청년 문제에 관심 갖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사실 젊은이들한테 너무 희망 절벽이다. 연애도 하고 친구들이랑 술도 먹고 그러다가 결혼도 하고 또 아기도 가지고 하면서 인생이 흘러가는 건데, 완전히 절벽에 있는 거다. 다들 2030을 위해서 다 한다고 그런다. 말은 대책이 안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빵하고 집이다. 인천에 갯벌을 막아서 송도를 개발했듯이 논을 활용해서, 1억 평 정도를 개발해서 7000만 평을 청년에게 무상으로 임대를 해서 4차 산업 창업이라든지, 4차 산업에 관련되는 비즈니스를 하도록 클러스터를 만들어주자는 거다. 목표를 일단 약 30만 개 정도의 스타트업. 그렇게 하면 약 200여만 명의 일자리가 생긴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또 그들의 능력에 맞는 그러한 비즈니스를 하도록 공간을 무료로 제공해 주는 거다. 거기다가 집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 나머지 3000만 평에 아파트 100만 채를 건설하는데 평당 500만 원 가능하다. 그렇게 하면 청년이 첨단 일자리에서 일하면서 약 1억 5000 정도, 30평 정도 되는 아파트에 살고, 한 2000만~3000만 원만 보증금, 계약금 내고 돈 벌어서 갚고 그러면 되니까. 새로운 꿈의 도시가 된다고 보는 거다. 우리나라의 논이 약 24억 평 된다. 그중에 1억 평이면 4~5% 정도면 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광주광역시 옆에 3000만~4000만 평, 혹은 김해나 부산 이런 데 1000만~2000만 평. 강원도나 경기도 북부 이런 곳, 말하자면 대도시와 연결이 되는 곳. 대도시로 프리웨이로 20~30분 걸리게 해서 시너지 효과가 나도록 연계시키는 것. 안상수 아니면 못한다.”
 
- 대통령이 되어 궁극적으로 원하는 국가의 모습이 있나.
“당장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고,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 전체로 봐서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공정해서 누구나 불평불만 없이 사는 사회가 좋다. 큰 틀에서는 남북 교류를 확대하고 통일로 가는 길도 모색하면서 세계 속에서 미국과의 결맹, 자유 우방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우리 국민, 젊은이가 활기차게 사는 나라가 돼야 하는 거다.”

- 당내 경선 후보로 가장 먼저 등록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나.
“내 정책을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 한다. 간단하게 공짜로 돈 천만 원 준다고 하면 말이 쉽다. 아, 그럼 천만 원이라도 받아먹지, 그러면 눈이 딱 가는데, 내 정책은 설명을 아무리 짧게 해도 3~5분이라 이게 아주 난제다. 그냥 청년 일자리를 논 1억 평으로 200만 개 무료 창업하게 하고, 또 옆에다가 평당 500만 원짜리 아파트 100만 호를 공급하겠다, 이렇게 하면 되는데 ‘아유 저 자식 또 거짓말하네’ 이렇게 된다. 다른 사람은 아무런 근거 없이 얘기한다. 나는 육하원칙에 맞는 근거가 있다. 송도국제도시를 갯벌을 막아서 개발했듯이 논으로 하겠다, 밭을 이렇게 해서 일자리를 만들겠다 이렇게 하면 되는데. 경선에서 8강이나 4강 안에 들어가면 그때는 좀 쉽다. TV 토론이나 이런 데서는 설명을 해도 들을 테니까 다 똑같은 비중으로. 근데 언론에 얘기하고 그럴 때는 어렵다. 사실은 내가 대통령 출마한 이유 중 하나는 이준석 때문이다. 그가 대표가 된다고 생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개월 만에 대표가 돼 버렸다. 그래서 저런 돌풍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안상수를 아는 사람조차도 없고 대통령에 출마하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몇 사람만 가지고 맨날 똑같은 얘기 하지 않나. 그 사람들은 화장실 간 것도 쓰는 신문도 있는 거 같다. (웃음)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국가를 위해서 표현하고 그래도 상당히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하는데 나는 잘 될 것이다 생각한다. 왜냐면 결국은 진실은 이기는 거니까. 그래서 줄기차게 끝까지 내 인생이 그랬듯이 끝까지 가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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