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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2022 (4) 예비후보 ② 안상수는 누구인가
이세희 기자 | 승인 2021.08.01 20:29

 

파란색 정장과 분홍색 넥타이. 안상수 전 인천시장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는 패션에 관심이 많다. 최용묵 수행비서는 “양말이랑 신발도 맞춰서 신는다”고 했다. 몇 년 전부터 밝은색 옷을 입었다. 당의 분위기를 밝게 하기 위해서다. 2008년에는 앙드레김 패션쇼 모델로 섰다.

안 전 시장은 국민의힘 소속. 2002년부터 2010년까지 인천시장을 지냈다. 재임 당시,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경제자유구역법을 통과시켰다. 송도국제도시를 개발하기 위해서다. 사업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송도는 갯벌이 있는 바다였다. 안 전 시장은 거기에 도시를 만드는 방법을 설명했다. 구역을 정하고 둑을 쌓는다, 고무파이프를 이용해 바다 밑의 진흙을 빨아들인다, 진흙을 구역 안으로 옮겨 쌓는다…. 바다에 통항로가 생겨 일석이조라고 했다.

▲ 안 전 시장이 앙드레김 패션쇼에 모델로 등장했다.

안 전 시장은 송도에 연세대 캠퍼스를 유치하고 싶었다. 2005년에 정창영 연세대 총장을 만나 설득했다. 2006년에 MOU를 체결했다. 안 전 시장과 정 전 총장 외에 모두 반대했다.

고 방우영 전 조선일보 회장이 연세대 이사장이었다. 안 전 시장은 그를 설득하려고 같이 헬리콥터를 탔다. 하늘에서 바다를 내려다봤다. 바다에 학교를 세우겠다고 했다.

안 전 시장은 방 전 회장이 했던 말을 회상했다. “아니, 웬 바다에다가 학교를 짓는다는 거야. 더군다나 4년 안에….” 안 전 시장은 서명만 해주면 하겠다고 했다. 자신감으로 방 전 회장을 설득했다. 2010년에 개교했다. 4년 만에 해냈다.

정 전 총장은 송도가 중국 상해처럼 되길 바랐다. 동아시아의 중심도시. 연세대 캠퍼스를 유치하면 가능하다고 믿었다. 반대가 있었던 것은 “(일부 구성원이) 장기적인 이익보다 단기적인 어려움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안 전 시장을 떠올렸다. “천문학적인 규모의 건설사업을 수행하면서도 조금도 부정이나 비리를 찾을 수 없었다. 송도의 각종 건설사업은 안 전 시장을 비롯한 당대의 한국인이 성취한 위대한 업적이다.”

강범석 전 인천 서구 구청장은 1995년에 안 전 시장을 처음 만났다. 강 전 구청장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2002년부터 6년간 비서실장으로 지냈다.

그는 안 전 시장과 일하면서 힘들기도 했다. “말을 하면 바로 밀어붙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추진력이 있었다. 일하는 속도도 빨랐다. 하지만 항상 결과는 맞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 황당할 정도로 큰 그림을 많이 그렸다.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그림을 그리면서 시의 미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천에서 처음이었다. 성공해서 훌륭했다기보다는 ‘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라고 영감을 줬다.”

▲ 안 전 시장과 오바마 전 대통령

소희섭 제이엔씨푸드 본부장은 송도에 산다. 센트럴 파크가 송도의 자랑이라고 했다. 송도 중심에 공원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믿을 수 없었다. 안 전 시장이 지도에 원을 그리고 말했다. “여기는 공원이야.”

반대가 많았다. 상업 지역을 만들어야 돈이 됐기 때문이다. 소 본부장은 공원이 조성되자 이렇게 생각했다. “이 양반이 진짜 혜안이 있구나!” 지금은 특별보좌관으로 안 전 시장을 돕는다.

안 전 시장은 사무실에서 젠틀맨으로 통한다. 배병인 홍보팀장은 불만이다. “성격이 젠틀하셔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한다”고 했다. 다른 후보는 경쟁자 약점을 꺼내 치열하게 싸우는데, 안 전 시장은 사이다 발언을 못 한다고 했다.

최용묵 수행비서는 안 전 시장의 캠프에서 회계 업무를 담당한다. 친구 아버지를 통해 인연이 닿았다. 안 전 시장이 ‘꼰대’일 줄 알았지만 반대였다. 최 비서는 그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같이 일할수록 편견이 깨졌다.

안 전 시장은 2030세대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청년이 돈이 없어 연애, 결혼을 원해도 못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현 사회가) 젊은이들한테 너무 희망 절벽이야. 딱한 노릇이지.” 대책을 고민하다가 청년에게 일자리와 집을 만들어주자고 결심했다.

▲ 안 전 시장의 중학교 시절

그도 중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과외, 신문 배달, 찹쌀떡 판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로 내려갔다. 3년 동안 배를 탔다. 어부로 일하면서 돈을 모았다. 사글세가 아니라 전셋집. 책도 사볼 수 있었다.

서울대 사범대 체육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원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서울에서는 반지하 집에 살았다. 동생들과 작은 단칸방에서 생활했다. 장마 때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자는데 비가 새어 들어왔다. 그는 영화 <기생충>을 언급했다. 자신이 겪은 현실이라고 했다.

성기훈 전 한국초등체육학회 회장은 안 전 시장과 체육교육과 71학번 동문이다. 그는 “(정치하려면) 말을 잘해야 하는데, 대학교 때부터 언변이 좋았다”고 했다.

▲ 안 전 시장의 서울대 졸업식

안 전 시장은 충남 태안군에서 태어났다. 매일 1시간 정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이북국민학교(현 이북초등학교). 한 반에 열 명쯤 되는 시골 학교였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어느 날 절에 갔다 오더니 싱글벙글 웃었다. 스님이 큰아들(안 전 시장)은 특별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큰아들을 도시에서 공부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인천의 친척 집으로 보냈다.

안 전 시장은 명문 학교였던 인천중과 경기고에 진학했다. 경기고 입학시험 전날이었다. 친척 형이 서울에 살았다. 시험 날 바래다준다고 해서 친척 집에서 잤다.

형이 늦잠을 잤다. 안 전 시장은 30분을 뛰어서 고사장에 도착했다. 문이 잠겨 있었다. 직원은 안타까워 들여보냈다. 땀에 젖어 시험을 치렀는데 1점 차이로 떨어졌다고 했다. 학업에 열정이 있어 재수를 했다.

경기고는 큰 자산이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경기고 동문과 창업을 했다. 제세산업이었다. 회사는 1조 원 이상의 규모였다. 안 전 시장은 기획조정실장으로 일했다. 이상우 전 제세산업 회장은 “(안 전 시장이) 능력이 있고 뚝심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20년간 기업인으로 일했다. 1995년 11월경에 김영삼 대통령에게서 새로운 제안을 받았다. 청와대 수석실에서 연락이 와서 만났더니 15대 총선에 나가보지 않겠냐고 했다. 안 전 시장은 처음에 거절했다.

그러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을 떠올렸다.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한다는 의미. 오랜 기간 경영을 공부했으니 세상에 펼쳐보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인천 계양·강화갑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9년 재보궐선거에 당선돼 정치를 시작했다.

인천중 동문 김형철 씨는 안 전 시장이 정치한다고 하자 깜짝 놀랐다. 중학교 때는 조용한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진취적으로 변했다고 했다.

▲ 가족사진

안상혁 성균관대 영상학과 교수는 안 전 시장의 막냇동생이다. 그는 안 전 시장을 ‘액팅 파더’라고 표현했다. 안 전 시장은 7남매 중 장남이었다. 어머니는 큰형만 챙겼다. 동생들은 큰형이 먹다 남은 음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 안 교수는 둘째 형이 많이 억울해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 전 시장은 동생들을 아낌없이 도왔다. 안 교수가 유학 갈 때 비용의 대부분을 지원했다. 안 전 시장은 도움을 받으면 잊지 않았다. 돈을 벌면서 크고 작은 기부를 했다. 인천시장 시절에는 월급 일부를 인천 사회복지모금회에 기부했다.

2011년에는 아파트를 이화여대에 기증했다. 5억 원 상당이었다. 사연이 있었다. 안 전 시장은 1982년 39세에 결혼했다.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병상에 있었다. 어느 날 주치의가 중매해 주겠다고 했다.

안 전 시장은 자서전 <문제는 경제다>에서 아내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표현했다. “눈빛이 초롱초롱한 사람. 목소리가 낭랑하고 옷매무새가 깔끔했던 사람. 지혜롭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 아내는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 출신이었다.

▲ 안 전 시장과 투병 중인 아내

결혼하고 1년 반쯤 지났다. 아내가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모야모야병’이라고 했다. 희귀병이었다. 안 전 시장은 최선을 다해 간병했다. 1년 정도 지나자 기적처럼 회복했다. 하지만 의사는 자녀를 가지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고 했다. 자녀가 없는 이유다.

안 전 시장은 아내와 돈을 벌어 결혼 10년 만에 아파트를 장만했다. 경기 안양시 관양동의 44평 아파트였다. 1999년, 아내가 또 쓰러졌다. 뇌출혈로 수술을 했는데 잘 안 됐다.

이번에는 1년이 아니라 11년을 병상에 누웠다. 의식이 거의 없었다. 말을 못 해 눈으로 조금씩 대화했다. 2010년 안 전 시장이 인천시장 임기를 끝냈다. 2개월이 지나지 않아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안 전 시장은 당시를 떠올리면서 눈을 찡그렸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식도 없고 너무 허무해. 세상에 왔다가 그냥 무(無)로 돌아간 거잖아요.” 아내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이화여대에 아파트를 기증하겠다고 했다.

‘정경임 글로벌 인재 육성장학금.’ 학생 1~2명에 전달된다. 안 전 시장은 “자식 학비 대주는 것 같은 심정으로 한다. 그게 마음의 위안이 된다”며 웃었다. 아내에게 못한 말은 자서전에 글로 남겼다. “당신은 별이 되어 내 가슴에 박혀 있다.”

안 전 시장은 선거에 10번 출마했다가 5번 낙선했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났다. 젊은 시절 가난해서 무조건 해내야 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밀어붙이는 힘의 밑거름이다. 그는 힘들 때마다 생각했다. 무엇이든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기자는 안 전 시장과 안 전 시장의 주변인을 직접 만나고 통화했다.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안상수는 한다면 한다. 안 전 시장은 항상 그들에게 결과물을 보여줬다.

안 전 시장은 7월 15일 당내 경선 후보로 가장 먼저 등록했다.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공정해서 불평불만 없는 사회”를 꿈꾼다며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기자님, 청와대에서 만나요.”

▲ 인천 송도의 센트럴 파크

기자는 7월 20일 인천 송도에 갔다. 오후 4시 센트럴 파크. 평일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여성이 운동을 하길래 말을 걸었다. 주말에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작은 숲으로 둘러싸인 산책로. 바닥이 보이는 호수. 그 위를 떠다니는 배. 센트럴 파크는 2009년 생겼다.

호수 위의 다리를 건너다가 노인을 만났다. 이용갑 씨(86)는 공원이 생겼을 때부터 이곳을 찾았다. 약 12년 전. 그때부터 하루 두 번씩 나와 운동했다. 공원의 나무가 아주 작았는데 이 씨는 지금 한참 올려다본다.

그는 안 전 시장이 대규모 사업을 많이 했다고 얘기했다. “(센트럴 파크도) 그분이 있을 때 했죠. 이거 대단한 거예요. 얼마나 넓어요.” 이 씨는 공원이 생기기 전에 산에 올랐다. 나이가 들자 힘이 점점 빠졌다. 이제 지팡이가 없으면 오래 걷지 못한다. 그래서 공원이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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