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저널리즘스쿨 14기인 김윤정 백승연 양수민 이준엽 씨가 뉴스통신진흥회의 제3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수상작 <어느 날 우리 집이 무너진다면>은 2017년 11월 15일 발생한 포항 지진 이후의 3년을 다뤘다. 심사위원회는 “기존 보도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사건 그 후의 이면들을 좇았다. 주민이나 단체 간의 이견과 충돌·불협화음을 그들의 눈높이에서 보여줌으로써 지진 피해 이후 트라우마와 갈등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진흥회의 동의를 받아 수상작을 게재한다. 스토리오브서울 양식에 맞추면서 표현을 일부 고쳤다. <편집자 주>

2부. 지진의 깊이 - 사람들 사이에서

지진은 집과 사람들의 마음을 깊게 흔들었다. 주거 불안과 트라우마가 이재민 고통의 전부는 아니다. 보상을 둘러싼 시와의 갈등, 단체 안에서의 이견, 세간의 시선. 피해를 딛고 일어서는 과정에서 상처가 컸다. 지진은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았다.

‘포항 지진의 진상조사 및 피해구제 등을 위한 특별법’(피해구제법)이 통과되기 전까지 가장 오래 이어진 다툼은 소파(小破) 또는 완파(完破)의 판정이었다.

보금자리가 얼마나 파손됐는지에 따라 지원 규모와 범위가 다르다. 차이가 커서 납득 못한 주민이 시와 갈등을 빚었다. 김상자 씨를 비롯한 한미장관맨션 주민이 2년간 대피소에서 지낸 이유도 소파 판정을 받아서였다.

소파는 간단한 수리를 거쳐야 할 경우, 반파는 기둥을 3개 이상 바꾸는 등 큰 수리가 필요한 경우, 완파는 다시 지어야 하는 경우다.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은 반파 판정이 없다. 구조물이 절반 이상 파손되면 완파, 아니면 소파 판정을 받는다.

소파 항목은 2016년 9월 경주에 규모 5.8 지진이 일어난 뒤 새로 생겼다. 자연재해 중 지진 피해에만 적용되는 항목을 따로 만들어 2017년 6월부터 시행했다. 피해가 작아도 보상받도록 했다.

포항 지진이 일어나자 작은 피해라도 지원받을 수 있음을 알고 이재민이 적극 신고했다. 피해구제법 시행 전까지 개인 주택피해 5만 5000여 건이 접수됐다. 그 중 소파가 5만 4000여 건이다.

적은 피해라도 최대한 지원하려는 제도인데 대상이 많아지니 논란이 생겼다. 소파 규정이 ‘도덕적 해이’를 낳을 수 있다는 논문이 2018년 발표될 정도였다.

‘포항 지진 그 후, 피해와 보상의 간극’이라는 다른 논문에서도 포항시 흥해읍 주민이 그런 취지의 증언을 한다. “사실 집에 별 피해도 없는데 소파로 판정받아서 거의 공돈 100만 원 받은 사람들도 많아요. 보상금 나온 날 포항 롯데백화점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어요.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김상자 씨의 아들 송창용 씨는 LH 직원이어서 실태 파악에 참여했다. “당시 북구 일대에 크랙 하나만 있으면 다 100만 원씩 줬어요. 그런 집과 저희 어머니 집은 차별화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정부가 지급하는 재난지원금의 경우에 소파는 100만 원, 완파는 900만 원이다. 국민 성금으로 지급하는 구호금도 판정에 따라 액수가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소파는 철거지원과 임시 거주시설을 제공받지 못하지만, 완파는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소파의 범위가 넓다. 작은 균열만 있어도, 한미장관맨션처럼 큰 피해를 입어도 똑같이 소파 판정을 받았다.

대피소에서 지금까지 지내는 한미장관맨션의 김종덕 씨는 이런 농담을 했다. “강릉 산불을 보면서 집 생각이 나더라고요. 이미 집이 30% 타 버린 이재민은 소방관한테 (불 끄지 말고 놔두라고) 해야 하나? 어차피 30% 타건 50% 타건 못 사는 집인데.”

일부 시민은 판정 근거인 정밀안전진단이 급하지 않았는지 의심했다. 지진은 2018년 6월 13일 지방선거를 7개월 앞둔 시점에 일어났다.

송창용 씨는 실사 과정을 이렇게 전했다. “포항시에서는 사용 제한, 사용 가능, 사용 불가해서 건축사무소하고 뒤에 따라다니면서 육안으로 보고 스티커 붙이고. 이건 노란색 붙여, 이건 초록색 붙여…하시더라고요.”

이미선 씨가 살던 흥해 대웅파크맨션 1차는 처음에 소파 판정을 받았다. 외관만 훑은 첫 조사를 믿을 수 없어서 남편과 호미를 들고 아파트 땅을 1.5m씩 팠다. 땅이 단단히 언 겨울이었다. 지하 기둥을 30개 넘게 확인했더니 십자형으로 부서진 흔적이 여럿 발견됐다.

진단 이후 여진이 일어나고 건물이 더 손상됐다. 이미선 씨는 균열의 너비가 변하자 기록으로 남겼다. “이렇게 간격이 이날은 3.4(센티), 3.5 그다음 날은 5….” 김종덕 씨의 아파트는 2018년 10월 태풍 ‘콩레이’가 들이닥치자 물바다가 됐다. 큰 태풍이 오니까 바닥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 이미선 씨가 찍은 사진. 시간이 지날수록 기둥의 균열이 커졌다.

비대위는 포항시 결정을 검토해달라고 요구했다. 국토교통부가 포항시 편을 들자 비대위는 행정소송을 걸었다. 올해 대법원까지 갔지만 패소했다. 김상자 씨가 실의에 빠지고 건강이 악화된 시기는 1심 패소 직후였다.한미장관맨션 주민은 소파 판정을 뒤집지 못해 2년간 대피소에서 지냈다. 포항시와 주민이 참여한 한미장관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같은 회사에서 안전진단을 받았는데 결과가 정반대였다. 포항시는 건물 신축 당시인 1988년 설계 기준으로, 비대위는 현행 기준으로 진단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2년 가까이 이어진 다툼은 다른 국면을 맞는다. 정부조사연구단이 2019년 3월 20일 ‘포항 지진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지열발전소 물 주입으로 인한 촉발 지진’이란 결론을 내렸다. 피해구제법을 추진할 기반이 생겼다.

피해구제법은 등급판정이 아니라 증명된 피해 액수만큼 지원한다. 소파와 완파를 따질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등급을 따지지 않아도 되기까지, 혹은 그렇게 된 후에도 지진은 이재민을 흔들었다. 그 과정에서 마찰이 생겼다.

정치인, 공무원, 기자와 얼굴 붉힐 일이 잦았다. 같은 피해자끼리 서운해하기도 했다. 인간관계에 새겨진 상흔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다. 지진이 아니었으면 겪지 않아도 됐을 일들 때문에.

▲ 왼쪽부터 최경희 김홍제 김종덕 임종백 씨

한미장관맨션 비상대책위원회는 김홍제 씨가 처음 이끌었다. 지진 발생 초기부터 판정에 항의하고 원인 규명에 앞장섰다. 주민의 이주 대책도 요구했다. 포항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1심에서 패소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법원이 포항시의 재량권을 인정한 이상 판정을 뒤집기 어렵겠다고 느꼈다.

김 씨는 소송 대신 대피소 주민이 살 집을 찾았다. 2019년 8월, 한미장관맨션 주민도 임대 아파트로 이주할 수 있게 됐다. 포항시가 40가구에 4개월치 임대료 6000만 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김 씨도 임대 아파트로 들어갔다. 비대위원장은 그만뒀다.

자리는 최경희 씨가 채웠다. 그는 비대위를 그만둔 김 씨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대피소 대신 임대 아파트에 살아도 ‘내 집’은 여전히 금이 가고 망가졌다. 그럼에도 지도부가 사라지고 주민이 임대 아파트로 흩어지면서 동력이 약해진 기분이었다.

최 씨는 집을 깔끔하게 리모델링하고 들어온 지 9개월 만에 지진을 맞았다. 집이 깨지고 부서졌는데도 주민이 가만히 있어서 이상했다. “우리 얘기 좀 합시다.” 관리실 앞에서 모이자고 하자 몇몇이 나왔다. 이후에 조금씩 늘었다. 그런 과정에서 대표가 됐다.

최 씨는 한미장관맨션의 재건축을 정부에 요구한다. 현실적인 길을 찾아 나선 김홍제 씨와 내 집을 되찾으려 애쓰는 최경희 씨. 문제 해결을 놓고 두 사람의 생각이 달랐다.

비대위원장이 바뀌어도 일부 주민은 활동을 계속했다. 대피소 마당발을 자처한 김종덕 씨. 요즘 이런 생각에 잠긴다. “은하철도 999처럼 끝까지 영원히 가야 하나, 어느 역에서 적당히 내려야 하나.” 빨라도 5년이 예상되는 재건축 과정을 끝까지 지킬지, 은퇴 후 고향인 경산으로 돌아갈지 고민이다.

그는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 지진이 아니었으면 못 만났으리란 생각에 누구에게든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곤 했다. 보상 절차가 길어지면서 하나둘 떠났다. 모두 떠나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 김 씨는 그대로 남았다.

시간이 지나며 비대위 희생을 점점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비대위가 알아서 한다는 기대심리가 생겼다. 주민 동의를 구할 안건이 있어 총회를 모집했는데 대부분이 나오지 않은 적도 있다.

일부 주민은 총회 결과가 궁금하다며 김 씨에게 다음날 전화했다. 메신저로 공지하고 아파트 현관문마다 공지문을 붙였기에 허탈했다. “그런 데서 스트레스받으면 안 되는데. 어려워, 잊히는 것도….”

주민을 애써 모아도 불협화음이 나기 일쑤다. 비대위가 추진 중인 재건축‧재개발만 하더라도 생각이 모두 다르다. 특히 고령자 설득이 힘들다.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돈 들여 집을 다시 짓느냐”고 한다.

최경희 씨는 집회를 앞두고 주민에게 화를 낸 적이 있다. 집회를 하려면 인원이 많아야 한다는 생각에 불참금 징수 의견을 물었는데 어느 할머니가 “나는 나이도 많고 돈 못 낸다”며 막말과 욕설을 했다. 최 씨는 속이 상해서 언성을 높였다. “나이 많아도 집은 지키셔야죠.”

비대위는 2020년 12월 22일 해산하기로 했다. 대신 아파트 재건축을 추진하는 비대위를 새로 꾸린다. 지친 사람은 떠나고, 새로운 사람이 합류하도록 내린 결정이다.

처음 겪는 지진이었기에 포항시의 미흡한 대응으로 갈등과 혼선이 생겼다. 지진 발생 3일 후인 2017년 11월 18일, 포항시는 완파된 주택의 주민만 빼고 전부 귀가하기를 권했다. 시의원과 공무원은 금이 간 곳을 수리하고 벽지만 바른 상태로 다시 살라고 했다. 크고 작은 여진이 계속되던 상황이었다.

5일째인 11월 19일에야 대피소에 텐트가 설치됐다. 등록은 선착순이었다. 시청 버스를 타고 대피소로 향했는데 일부 주민은 선착순에 들지 못했다. 김종덕 씨 가족은 고령의 주민에게 순서를 양보했다가 빈자리가 없어 못 들어갈 뻔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외부인 출입을 막기 위해 명찰을 패용하도록 했다. 학생들이 명찰을 요청하자 공무원이 부모를 데려오거나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했다. 최경희 씨가 “애들이 갈 데가 없어서 대피소로 피난 온 상황이다. 부모는 당연히 일하러 갔고, 학생인데 신분증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자 명찰을 만들어줬다.

포항시는 대피소를 폐쇄하려 여러 번 시도했다. 2018년 1월 31일 한미장관맨션 주민은 서울에서 집회를 벌였다. 시청과 청와대 인근에서 정주권과 생활권을 보장해달라고 외쳤다. 그 사이에 포항시는 2월 10일자로 모든 대피소를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김종덕 씨는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던 시청 직원들의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포항시는 전시행정 하고 있구나. 항상 언론부터 노출하고, 결론부터 내놓고 주민들은 따라오도록 만든 거예요.” 철거 예정 하루 뒤인 2월 11일, 규모 4.6의 지진이 발생했다. 계획이 취소됐다.

▲ 주민들이 체육관 바닥에 드러누워 대피소 철거에 항의하는 모습

포항시 공무원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음을 알아달라고 했다. 보상 업무를 맡았던 안전총괄과 담당자는 힘든 점을 묻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재난 대응법이 풍수해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었어요. 주민의 피해를 법에 따라 보상해야 하는데, 관련 내용이 한 페이지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금액과 관련해 주민과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민복지과 담당자는 대피소 폐쇄 결정이 주민을 위한 판단이었다고 해명했다. 추운 날씨에 대피소에 머물도록 하기보다는, 이주할 집은 이주하고 수리할 세대는 수리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고 봤다. 여진이 일어나면서 결과적으로 비판 받을 수 있는 상황임은 인정했다.

부족한 인력에 고생이 많았다고도 했다. 2만~3만 세대의 생활을 안정화하기 위해 집집마다 피해 현황을 파악해야 했다. 새벽 3시까지 일하곤 했다. 낮에는 민원 전화를 받았다. 지금도 주민복지과는 대피소 안전을 위해 1명씩 24시간 교대로 당직을 선다.

그럼에도 포항시의 잘못으로 언론이 보도하면 비판을 받는다. 담당자는 취재팀에게 메일을 보내면서 다시 당부했다. “언론보도로 인하여 생각지도 않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도 있었습니다. 포항시와 이재민간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포항에는 피해자 단체가 둘이다. 포항지진범시민대책본부(범대본)와 포항11·15촉발지진범시민대책위원회(범대위). 아파트, 읍 단위 크고 작은 단체도 여럿이다. 결성이나 활동 중에 갈등이 생기는 이유다.

흥해지진피해대책위원회 임종백 위원장(61)은 초기부터 인공 지진일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2017년 12월 5일, 지진피해가 가장 심한 흥해를 중심으로 단체를 만들었다. 친구인 김홍제 한미장관맨션 비상대책위원장과 활동했다.

전체 시민이 한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생각에 2017년 12월 16일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당원이던 인사와 공동대표를 맡아 포항지진범시민대책본부(범대본)를 출범시켰다. 임종백 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원이다.

두 공동대표는 정부와 포항지열발전사업 주관사 넥스지오를 상대로 하는 소송을 놓고 의견이 달랐다. 임 위원장은 “인지대(소송 수수료의 일종) 10만 원만 내면 1500만 원 보상받는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는 인공 지진임이 밝혀지지 않아서 소송이 시기상조라고 봤다.

범대본이 정파적 메시지를 자주 내면서 민주노총, 환경단체, 시민단체가 참여에 난색을 보였다. 임종백 위원장이 ‘포항 지진 원인 규명’을 내걸고 집회를 할 때는 2018년 시장 선거 출마를 계획한 다른 공동대표가 명함을 돌렸다. 갈등이 쌓이면서 임 위원장은 범대본을 탈퇴했다.

인공 지진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2019년 3월 23일 새 단체가 생겼다. 포항11·15지진범시민대책위원회(범대위). 이강덕 포항시장, 서재원 시의회 의장, 박명재·김정재 국회의원, 장경식 도의회 의장을 비롯해 각계 인사가 출범식에 참석했다.
 
일각에서는 관변단체라고 비판했다. 포항시 의견을 관철하려는 ‘꼼수’ 아니냐는 의심도 있었다. 처음엔 임종백 위원장도 지진 대응의 경과를 알지 못하는 범대위를 미심 쩍어 했다.

그러나 다양한 분야의 단체 50여 곳이 참여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YMCA와 YWCA, 기독교와 불교와 천주교, 학계.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임 위원장과 한미장관비대위 김홍제 전 대표는 집행위원으로 합류했다.

범대위는 포항시와 협력하면서 도시재생에 같은 목소리를 낸다. 포항지진피해구제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10차례 이상 상경 시위를 하며 입법을 촉구했다. 범대본은 정부와 사업 주관사 넥스지오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 1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각자가 당한 지진이 다르고 뉴스에서 본 지진이 다르다. 북구와 남구는 차이가 있다. 가장 피해가 큰 흥해읍에서도 지진파의 방향에 따라 정도가 달랐다. 피해를 인정받고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상당수 주민은 ‘나를 지키는 건 나 자신뿐인지’ 계속 물어야 했다.

“국가가 할 수 있는 건 최소한이잖아요. 국가가 잘못했더라도 피해를 보상해줄 마음이 없어요. 그 국가가 누구냐면, 힘 있는 정치인들. 국가가 할 수 있는 건 최소한이고 국민이 각자 살길을 마련해야 한다. 그게 가장 빠르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최경희 씨의 말이다.

송창용 씨는 대화하다가 발끈했던 경험이 있다. 친구는 “북구 피해가 더 심하긴 하지만 우리(남구)도 피해를 입었으니 같은 기준에서 봐 달라”고 말했다. 송 씨는 어머니가 대피소에서 살며 투쟁하던 북구의 피해가 남구보다 훨씬 심하다고 생각한다.

신순옥 씨는 인터넷 댓글을 보면 속이 상한다. “남 속 터지는지 모르고, 서울 사람들 댓글 남긴 걸 보면 헌 집 뻗어놓고 새집 달라고 하는 줄 알아요.” 유난스럽다는 평가받은 이들은 누구일까.

‘핑크 아줌마’는 호미를 들었다. 네티즌이 핑크색 패딩을 입고 뉴스에 나온 이미선 씨에게 붙인 별명. 동영상에서 그는 땅을 판다. 살던 집은 대웅파크맨션 1차 아파트.

“안전정밀진단검사를 몇 번 나왔는데 이 사람들이 기둥을 제대로 검사를 안 했어. 다른 아파트는 계단으로 내려가면 기둥이 보이잖아? 우리 아파트는 기둥이 안 보여. 땅속에 묻혀있어. 근데 밖에서 이렇게만 본다고.” 이 씨는 아파트 상태를 점검하러 온 날을 이렇게 기억한다.
 
왜 이렇게 대충 검사하냐고 따졌다. 답을 듣고 허탈했다. “자기네들은 포항시로부터 용역을 받을 때, 기둥까지 없는, 속에 있는 기둥까지 검사하라는 돈을 안 받았다는 거야.”

그날로 남편과 함께 땅을 팠다. 불안해서 집에서 잠조차 잘 수 없는데 60년은 더 살아도 되는 튼튼한 아파트라는 시의 판단을 믿을 수 없었다. 무릎을 꿇고 옷에 흙을 묻혀가며 땅을 팠다.

“깊게 안 팠는데도 기둥이 V자로 깨져 있고, 철골도 이렇게 휘어있는데도 발견을 못 한 거야.” 기둥이 땅에 깊이 묻힐수록 튼튼하다던 포항시 주장과 정반대였다. 땅을 파니 금이 간 채로 쩍쩍 갈라진 기둥이 숱하게 나왔다. 30년 된 아파트 설계도까지 구했다.

“우리가 해야겠다. 직접 증명을 해내야 우리 집이 정말 불안해서 못 사는 그런 아파트라고 인정받을 수 있겠구나. 포항시에서 알아서 해주는 게 없었으니까.” 이 씨는 지진을 겪으며 깨달았다.

부부는 낮에는 아파트 땅을 파고, 밤에는 텐트에서 잠을 잤다. 깨진 기둥을 사진으로 기록했고 여러 통로로 호소했다. 포항시 국회의원, 포항시장, 국무총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오늘은 B동에 어디 어디 기둥을 팠습니다, 기둥이 이렇게 망가졌습니다. 편지를 한 달 넘게 보낸 거야.” 

▲ 김기재 이미선 씨 부부가 기둥을 확인하기 위해 삽과 호미로 땅을 파는 모습

부서진 기둥이 드러나자 포항시는 전문기관에 추가 정밀점검을 맡겼다. 2018년 3월 17일, 대웅파크맨션 1차는 완파(E등급, 불량) 판정을 받았다. ‘즉시 이주’ 결정이 나왔다. 아파트 기초 기둥 43곳 중 18곳이 잘려 끊겼거나 금이 가는 등 중대결함이 발견됐다는 이유. C등급(보통) 판정이 두달만에 뒤집혔다.

일각에서는 이 씨를 두고 유난이다, 우겨서 팔자 고치려고 한다고 말했다. 취재팀이 만난 어느 시민은 “지진으로 로또 맞은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지진은 로또였을까? 이 씨는 지진 전에 치킨 장사를 했다. 딸과 함께 2호점을 따로 운영할 만큼 잘 됐다. 지진 이후에는 장사를 접었다. 매출이 급격히 줄었고 아파트 문제로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없었다.

일상은 새로운 일로 채워졌다. 컴퓨터를 배우고 아파트 사진과 서류를 꼼꼼히 정리했다. 문 닫은 가게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한다. 휴대전화에는 지진 관련 사진, 연락처, 음성메모가 빼곡했다.

그는 하루에도 전화 수십 통을 주고받는다. 대웅파크맨션 1차 아파트가 완파 판정을 받고도 철거되지 않아서다. 매매가 7000만 원에 리모델링비 2000만 원을 들여 입주하고 5개월 만에 망가졌는데 시는 4500만 원만 보상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평생 죽을 때까지 살려고, 내 모든 걸 바쳐서 장만한 집이란 말이야.”

취재팀과 만났을 때, 그는 공공근로를 하느라 얼굴이 검었다. 이빨이 10개 넘게 빠졌다고 했다. 대상포진도 두 번 앓았다. 지진 직후인 2018년에는 피부가 하얗고 치열이 튼튼했다.

▲ 이미선 씨의 2018년 모습(왼쪽, 출처: 2018.11.16. [뉴스타파 목격자들] 포항 지진 1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과 현재의 치아 상태

고려대 이진한 교수(지질학과)는 포항 지진이 지열발전소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을 지진 당일, 뉴스에서 제기했다. 흥해지진피해대책위원회(흥해대책위) 임종백 위원장이 인공 지진의 심증을 강하게 가진 이유다.

당시만 해도 지열발전소가 지진을 초래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드물었다. 시민 대다수는 경주 지진에 영향받은 여진, 혹은 자연재해쯤으로 여겼다. 국가를 상대로 우겨 봐야 소용없다는 반응도 많았다. 어느 지역 정치인은 왜 주민을 선동하냐며 손가락질했다.
 
임 위원장은 김홍제 한미장관맨션 비대위 전 위원장과 함께 인공 지진이라고 목청 높였다. 장날이면 시장을 찾아 마이크를 잡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포항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로 호소했다. “학자들은 포항 지진이 유발 지진이라고 말합니다. 청와대 가시면 정부조사단 구상해서 원인 좀 밝혀주십시오.”

임 위원장은 자료를 차곡차곡 모았다. 2017년 12월 윤영일 당시 의원은 지열발전소 때문에 포항에 소규모 지진이 63차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임 위원장은 근거자료를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윤 의원은 난색을 나타내다가 자료를 보냈다. 임 위원장은 ‘포항 EGS 프로젝트 미소진동 관리방안’ 보고서를 공개했다. 지열발전소를 운영하는 넥스지오가 지진을 인지하고도 물 주입을 밀어붙인 정황이 나온다.

포항지진정부조사연구단이 만들어질 때는 강하게 압박했다. 서울대 교수들이 조사단에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할까 걱정했다. 지열발전소 컨소시엄에 서울대가 참여했기 때문이다. “사고 낸 사람이 조사에 참여한다고 하면 누가 믿습니까?”

연구단 구성이 마무리되자 이강근 단장을 만나 “당신들이 포항 지진 원인을 제대로 밝히지 않으면 세계 과학계의 미아가 된다. 학자적인 양심을 가지고 밝혀 달라”고 당부했다.

정부조사연구단은 포항 지진이 지열발전으로 촉발됐다고 2019년 3월 20일 결론 내렸다. 자연재해가 아니라 정부 책임임이 밝혀지면서 피해자를 위한 특별법 움직임에 힘이 붙었다.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며 제기했던 인공 지진설은 정부가 인정한 정설이 됐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범대본 등의 SNS에는 임종백 위원장을 비난하는 글이 종종 올라왔다. 기생충 같은 XX들, 너희는 뭐 먹고 사냐, 목소리는 크지만 해결하는 건 없다…. 생업을 포기하고 나섰기에 마음 아팠다. 명예훼손 소송을 벌이면 원인 규명 목적이 흐려질까 참았다.

임 위원장은 2018년 6월 13일 지방선거에 시의원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김홍제 전 위원장은 이야기한다. “친구지만 냉정하게 보면 순수 지진 외에도, 지방선거에 출마할 생각도 있었겠죠. 어쨌든 이후에도 열심히 했으니까. 사람이 그런 욕심은 뭐 다 있잖아요.”

원인규명 활동을 나름대로 선거운동과 분리했다고 임 위원장은 말한다. 열심이었던 이유가 진실을 좇는 정의감이었건, 정치적 공명심이건, 아니면 둘 다였건 간에 그는 인공 지진일 수 있다는 여론을 만드는 데 역할을 했다.

피해구제법이 2019년 12월 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포항 시내 곳곳에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범대위에서도 환영 메시지를 걸었다. 갈등을 봉합할 계기가 되리라 기대해서다.

김홍제 씨는 포항 지진을 소재로 하는 소설을 구상 중이다. “저는 포커스가 사람이에요.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어차피 재난은 일어날 수 있는 건데, 지진 이후에 주민이 분열하고 부딪혀 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싶어요. 사람이 사는 세상, 사람이 중심이잖아요.”

사람.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지진 피해자들은 사람에게 입은 상처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힘들 때 의지하고 회복을 도운 존재도 사람이었다.

한밤중의 대피소에서, 끊이지 않는 최경희 씨의 기침 소리에 옆 텐트 사람은 “기침 많이 해도 된다. 걱정하지 말고 몸 관리 잘하라”며 오히려 걱정했다.

김종덕 씨에게는 같은 아파트 살면서도 이름과 얼굴을 몰랐던 스쿠버 강사가 찾아와 직접 잡은 문어를 대접했다. ‘핑크 아줌마’ 이미선 씨는 하루종일 주민들의 민원을 들어주며 끈끈해졌다.

트라우마가 심했던 최호연 씨는 구미에서 멀리까지 도우러 왔던 상담가 덕에 조금 나아졌다며 이렇게 말했다. “공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못 돕는 부분이 많거든요. 저는 그럼 가만히 들어주는 게 도와주는 거라 생각해요. 들어주기만 해도 도움이 엄청 되거든요.”

김종덕 씨는 서울에서 내려간 스토리오브서울 취재팀에게 포항을 구경시켜 줬다. 동해안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흥해의 너른 황금빛 들판. 지진 전에는 허수아비 축제가 열린 곳이다.

그는 외지인이 잘 모르는 곳이라며 영일만 근처의 ‘포토 스팟’에 사진을 같이 찍었다. 취재팀이 즐거워하자 웃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오늘처럼 웃으면서 살아야 돼. 살아있으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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