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 일요일. 서울 영등포구의 어느 거리는 중국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줬다. 길거리 간판이 빨갛고 분주하게 걷는 행인의 점퍼가 붉고 주인을 따라 나온 강아지의 옷마저 빨간색이다.

지하철 2호선 대림역 12번 출구부터 대림 중앙시장에 이르는 약 500m 거리에 한국 가게로 추정되는 간판은 다섯 개도 되지 않는다. 风仙麻辣烫(마라탕), 红中火锅(샤브샤브), 汉中药局(약국), 华人通信(핸드폰가게), 麒韵美发(미용실).

대부분은 중국인이 운영한다. 중국 음식을 즐기고 싶어 방문했다는 박채빈 씨(24)는 “중국어 간판이 많이 보이고 연변 사투리가 많이 들려 정말 중국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 대림역 근처에는 중국어 간판이 많다.

11월 초의 오후. 대림역 근처에는 중국의 향기가 가득했다. “양꼬치, 노릇노릇 잘 구운 양꼬치!” 다른 곳에서는 양꼬치를 전문 식당에서 볼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노점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羊肉串儿, 三个!(양꼬치, 세 개 줘요!)” 중년 남성이 노점 앞으로 다가가자 상인은 길거리에서 피운 숯불 위에 양꼬치를 굽고 중국 향신료인 ‘즈란’을 솔솔 뿌려 건넸다.

양꼬치 노점을 지나자 예닐곱 명이 줄을 선 다른 노점이 보였다. 행인이 북적이는 가게 앞으로 가자 손바닥크기의 냉면 덩어리 위에 계란을 풀고 소스를 발라 철판 위에서 구웠다. 냉면구이였다.

중국 교환학생 시절 기자가 학교 앞에서 자주 먹던 냉면구이와 쇼좌빙이 노점에는 중국어로 적혀있었다. 한국인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중국의 길거리 음식. 주문하는 이도, 만드는 이도 모두 중국인이었다.

▲ 노점은 숯불 위에서 양꼬치를 굽는다.

소연변(小延邊) 같은 대림역 근처의 골목. 20대 여성 4명이 식당을 들어서자마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메뉴판이 모두 한자였기 때문. 사전을 찾자며 핸드폰을 꺼냈지만 한자를 읽지 못해 검색조차 할 수 없었다.

빨간색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말이 통하지 않자 서로 10여 분 간 눈만 껌벅거렸다. 기자가 통역을 도와 음식을 주문했다.

대림에 처음 오면 거리의 간판에 한번 놀라고 가게에 들어가 다시 놀란다. 한국이지만 한국어가 통하지 않아서다. 대림의 공용어는 중국어인 셈이다.

▲ 음식점 메뉴는 중국어로만 표기했다.

대림역 인근에서 금은방을 35년째 운영하는 김선자 씨(65)의 가게에는 밥솥이 있다. 중국 음식과 향신료에 쉽게 적응할 수 없어서 김 씨 부부는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가게에서 밥을 해서 먹는다.

한국인을 대림역에서 이방인으로 만드는 요인은 중국의 맛과 향 때문은 아니다. 이 곳에서 자영업을 30년 넘게 하는 김은경 씨(56)는 양갈비와 마라탕 등 중국 음식을 좋아하고 잘 먹는다.

그러나 혼자서는 중국 음식점에 잘 가지 않는다. 가게를 가득 메운 중국인 사이에 덩그러니 남겨지는 기분이 좋지만은 않아서다. “중국 음식점에서 혼자 밥을 먹으면 꼭 외국에 나와 밥을 먹는 것 같다.”

▲ 배출 규정에 어긋나는 검정색 봉투에 쓰레기를 버렸다.

대림의 거리에는 한국어와 중국어가 병기된 쓰레기 무단투기 계도문이 곳곳에 보인다. 오후 4시. 쓰레기 배출 시간이 아니지만 담벼락 밑에는 규격 봉투가 아닌 일반 봉투가 쌓여있었다.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조차 2020년 5월부터 쓰레기 분리수거 제도가 정식으로 시행된 만큼 중국인에게는 쓰레기 분리배출이 익숙하지 않다. 음식물과 재활용 쓰레기를 봉투에 같이 버리는 이유다. 영등포구청은 무단투기 단속요원 30명 중 10명을 대림동과 신길동에 배치했다.

대림중앙시장 근처에서 40년 가까이 부동산을 운영하는 김화기 씨(67)는 몇 년 전 중국인에게 폭행을 당했다. 가게 앞에서 방뇨하던 중국인에게 주의를 줬더니 오히려 달려들었다고 한다. 김 씨는 “중국인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지만 한국에 온 만큼 한국의 공중도덕과 생활 질서를 따라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대림의 거리에 자주 보이는 쓰레기 무단투기 계도문

대림의 분위기가 이렇게 변한 이유에 대해 중국에서 귀화한 강일화 씨(39)는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대림에서는 중국에서의 생활 방식을 유지해도 된다는 편안함과 익숙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가래침을 뱉어도 이들을 제지하는 중국인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강 씨는 “대림이 고향의 맛과 풍경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인식되다 보니 주말만 되면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많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물론 한국과의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하는 중국인도 많다. 대림2동에서 근무하는 최재준 씨(24)는 “최근에는 한국과 중국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진 것 같다. 한국에 잘 적응해서 중국인인 줄 모를 정도로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중국어 간판이 늘어선 곳을 지나 영림초등학교 방향으로 1km 남짓 걷자 시흥대로를 따라 달리는 자동차와 한글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향신료 냄새도, 귓가를 울리는 중국어가 들리지 않는, 완전한 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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