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럼버스 기념탑

스페인은 반도 국가이다. 지형과 문화 그리고 민족성이 한국과 비슷한 느낌마저 든다. 한국과 북한의 남녀 마라토너가 우연히도 스페인에서 개최된 국제대회에서 각각 일본 선수와 1, 2위를 다투다 금메달을 땄다.

주인공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의 우승자인 황영조 선수와 1999년 세비야 세계육상대회에서 깜작 우승한 북한 선수 정성옥 선수이다. 세비야는 스페인의 남서부 도시로 이슬람 문명의 잔영이 서린 플라멩코의 본고장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중심도시이다.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390㎞, 바르셀로나에서는 남서쪽으로 892㎞ 떨어졌다.

바르셀로나를 여행한다면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선수가 달렸던 1992년도 올림픽 마라톤 코스를 살펴볼 만하다. 출발점은 조용한 어촌도시 마타로이다.

이곳에서 시작해 해변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38㎞ 달리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기념탑이 나타난다. 필자가 묵었던 호텔 델마도 이 마라톤 코스 옆에 위치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상쾌하게 달릴 수 있다.

하지만 4㎞를 남겨두고 몬주익의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여기부터는 꾸불꾸불 돌아서 오르는 언덕길이다.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향하는 마지막 150m는 경사가 높아서 잔인한 마라톤 구간으로 유명하다. 황영조 선수를 포함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완주한 상당수 마라토너가 결승점을 통과한 후 들것에 실려 나갔거나 경기장에 누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게임의 피날레인 마라톤 경기는 1992년도 8월 9일 저녁 6시 30분에 시작봤다. 이날 평균온도는 27도였고 마라톤이 시작될 때는 23도로 다소 더위가 식었다. 하지만 한 여름의 아스팔트 지열은 그대로 남아 마라토너에게 상당히 위험한 기후조건이었다.

이 마라톤에 72개국 110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한 나라에서 최대 3명까지 참가할 수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의 톱 8 마라토너 중 우승자 포함해 상위권 7명이 참가했다.

일본 선수로는 서울 올림픽에서 4위를 했던 나카야마 다케유키와 1991년도 세계 선수권 챔피언인 다니구치 히로미가 참가했다. 또 한명의 일본 선수는 모리시타 고이치, 세계 육상계의 주목을 받는 다크호스였다. 이에 맞서는 한국 선수는 황영조, 김완기, 김재룡으로 마라톤 한일전 양상이다.

▲ 바르셀로나 마라톤 코스

바르셀로나 마라톤은 그래서 특별했다. 필자를 포함한 한국의 베이비 붐 세대는 20세기 전반부와 중반부, ‘세계 최고로서 일본(Japan as Number One)’이란 그들 부모 세대의 집단적 기억과 콤플렉스를 물려받았다.

그런데 황영조 선수가 마지막 구간에서 일본 선수와 치열하게 다투다가 세계를 제패했다. 한국인이라면 이러한 스포츠 경기 관전을 통해 집단 심리적인 식민지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를 털어버리는 계기가 됐다.

황영조 선수는 마타로에서 출발해 34㎞까지 같은 코오롱 소속 김완기 선수와 모리시타, 그리고 전년도 세계 챔피언인 다니구치와 선두그룹을 형성했다. 그런데 다니구치가 급수대에서 물병을 받다가 넘어져 선두권에서 멀어졌다.

평지의 거의 마지막 지점으로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4㎞ 정도 떨어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기념탑을 달릴 때는 모리시타와 거의 같은 선상에서 달렸다. 황영조 선수가 이곳에서 스퍼트를 해 치고 나갔다. 경사길인 몬주익 언덕을 오르면서 모리시타와의 차이가 조금씩 더 벌어졌다.

▲ 결승선을 지나고 들것에 실려 나간 황영조 선수

올림픽 경기장에 들어선 황영조 선수는 트랙을 돌면서 관중의 환호에 두 손을 흔들며 잠시 화답했다. 모리시타가 스타디움에 들어섰을 때 이미 경기장 트랙의 3분의 1바퀴를 앞섰다.

황영조 선수가 경기장 코너를 돌아 결승점으로 뻗은 트랙에 들어서면서 승리의 신호로 팔을 높여 불끈 쥔 두 주먹으로 하늘을 쳤다. 결승선을 통과했다. 기록은 2시간 13분 23초이다. 모리시타는 22초 뒤진 기록으로 은메달리스트가 됐다. 3위는 우승자와 37초 뒤진 독일의 프라이강 스테판이다. 110명의 선수 중에서 87명만이 완주했을 정도로 힘들었던 경기였다.

황영조 선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쓴 손기정 선수에 이어 한국인으로 두 번째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56년 만의 쾌거다. 올림픽 공식 기록으로는 대한민국 첫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이다.

1992년 8월 9일 저녁에 우연히 이 경기를 미국에서 됐다. 당시 미 중서부 매디슨에 위치한 위스콘신대의 이글 하이츠라는 기혼자 숙소에서 후배 집에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은 후였다. TV 스크린에 일본 선수와 나란히 달리는 황영조의 얼굴이 나타났다.

경기 해설자는 선두인 두 선수의 보폭과 올리는 다리 각도를 분석했다. 황영조 선수가 더 좋아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러한 해설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일본 선수를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몬주익 언덕을 무사히 오른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 경기장에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지중해의 햇살과 아스팔트 지열로 붉게 익어있었다.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다리 각도가 무너지지 않은 채로 달렸다. 우리는 TV 앞에서 숨을 죽였다. 결승점을 통과했다. 우리는 기뻐 날뛰며 서로를 껴안았다.

황영조 선수가 모리시타를 앞서기 시작했던 콜럼버스 기념탑은 다섯 분야로 나뉜다. 맨 꼭대기에는 콜럼버스 조각상으로 왼손에는 항해 지도가 들려있다. 오른손은 바다를 가리킨다.

대서양이 아니라 지중해를 가리켜서 콜럼버스의 손가락이 어디를 향하느냐는 논쟁이 일어나곤 한다. 콜럼버스의 고향인 이탈리아 제노아를 가리킨다는 가설이 있다. 정설은 바다를 가리키다 보니 서쪽의 대서양이 아닌 동쪽의 지중해를 향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기념탑의 전체 높이는 60m이다. 조각상만의 길이는 7.2m이다. 밑에는 기둥이 있는데 길이가 40m이다. 기둥 아래에 받침대가 있다.

콜럼버스가 그의 대서양 항해를 지원한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라 여왕 부부에게 알현하는 모습을 포함해 이러한 회화를 얕게 조각한 플린쓰(Plinth)가 기념탑을 둘러싼다. 아래 바닥을 베이스라 한다. 이곳 난간에 두 마리씩, 사방으로 여덟 마리의 사자가 허리를 들고 머리를 꼿꼿이 세워 기념탑을 지킨다.

남남북녀인가. 한국이 남자 마라톤에 강하다면 여자는 북한 마라톤이다.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이후 7년이 지났다. 이번에는 세비야 세계육상대회에서 북한 여성 마라토너가 깜작 우승했다.

그때까지 정성옥 선수는 국제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 선수였다. 화장하지 않은 푸석푸석한 얼굴에 어느 나라 선수인지 나타내는 표시마저 없었다. 그는 페이스메이커였다. 그런데 그냥 내달려서 우승자가 됐다.

은메달리스트인 이츠하시 아리와 결승점까지 치열하게 경합했다. 거의 동시에 결승점을 통과했을 뿐이다. 우승 기록은 2시간 26분 59초이다. 이츠하시보다 3초 앞섰을 뿐이다.

대박은 그다음에 터졌다. 정성옥 선수의 우승 코멘트가 북한 전역을 뒤흔들었다. 아바이 수령 동지가 “결승지점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해서 마지막 힘을 내서 그의 따듯한 가슴에 안겼다”고 말했다. 북한은 당시 ‘고난의 행군’의 긴 터널을 통과해야 했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의 회고에 따르면, 아사자만도 100만 명에 가깝게 추산된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 우승 소식을 듣고 통 크게 화답했다. 북한 선수가 국제대회에서 받은 상금은 국가에 헌납해왔다. 김 위원장은 전례를 깨고 우승상금 5만 달러를 정성옥 선수가 쓰도록 허가했다.

또 황해도 해주 출신인 그를 평양으로 끌어올려서 보통강 구역의 최고급 아파트와 벤츠 S550을 우승 선물로 주었다. 북한 운동선수 최초로 공화국 영웅과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았다. 금의환향할 때 대대적 길거리 환영까지 받았다. 하루아침에 북한의 신데렐라가 됐다.

정성옥 선수의 우승은 체제 붕괴 직전에서 벗어나기 위한 북한의 선전물로 활용됐다. 고려 시네마가 제작한 영상에서 정선수는 “장군님을 그리며 달렸을 뿐”이라고 밝혔다. 본인은 단지 “장군님의 거룩한 보폭에 내 작은 걸음을 따라 세우며” 달렸다 한다.

필름을 보면, 2등의 이츠하시는 마라톤 코스 내내 정성옥 선수와 바짝 붙어서 달렸다. 경기 후 그는 정성옥 선수가 내는 쇠 숨소리에 기가 눌려서 도저히 추월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 정성옥 선수의 세계 마라톤 우승을 다룬 북한 필름

수차례에 걸친 남북 정상의 만남과 북미회담으로 한반도에도 평화의 봄이 찾아오는 듯했다. 지금은 코로나19 팬데믹과 최근의 긴장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모양새이다. 대한민국이나 북한이나 어느 정치체제든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시해야 한다.

서로 갈등적인 사항에 대해선 시시비비를 정확히 가려서 풀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어업 지도선 공무원이 북한해역에서 사망한 사건의 진상이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루빨리 시시비비가 가려져야 한다. 그래야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평화적 남북 통합을 위한 대화를 진행할 수 있다.

황영조 선수와 정성옥 선수의 쾌거에서 볼 수 있듯이 남북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해야 한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최소한의 사회문화적 연결 끈을 놓지 말자. 세계 마라톤 우승과 같은 스포츠 쾌거를 상호 공감하며, 스포츠 교류를 지속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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