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론사 시험을 2년 6개월 정도 준비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학교의 언론고시반에서 다른 학생들과 같이 공부했고 졸업한 뒤에는 혼자 공부했다.

동아일보에 1990년 6월에 입사했는데 1988년부터 시험을 치르면서 연습용인 논술과 작문은 1편도 쓰지 않았다. 이런 얘기를 하면 많은 학생이 놀란다. 논작을 전혀 준비하지 않고 필기시험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궁금해 한다.

비결 아닌 비결은 일기다. 거의 매일 썼다. 중국 송나라 시대의 문인 구양수(歐陽修)가 글을 잘 쓰기 위해 삼다(三多)를 강조했는데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에서 일기로 다작을 실천한 셈이다.

일기와 논작 시험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주제를 갑자기 정해서 쓴다는 점이다. 일기 내용을 오전부터, 하루 종일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 밤에 일기장을 펴자마자 쓴다.

논작 시험이 같은 방식이다. 지원자는 시험장에서 주제를 받고 바로 써야 한다. 일기에 담을 내용을 몇 시간 고민하지 않듯이 논작에 넣을 내용을 몇 시간 고민할 수는 없다.

두 번째는 손으로 종이에 쓴다는 점이다. 일기 주제를 정하면 잠시 생각한 다음에 필기구로 일기장에 옮긴다. 논작 시험도 마찬가지. 주제에 대해 잠시 고민한 다음에 필기구로 원고지에 옮긴다.

손으로 쓰는 글과 컴퓨터로 작성하는 글은 다르게 보인다. 필기구를 잡고 손으로 종이에 쓰니까 논작 시험에서 필체가 중요하다. 내용이 비슷하면 필체가 채점에 영향을 준다. 악필을 고치지 않으면 불리하다. 일기장에 꾸준히 쓰면 필체가 좋아진다.

나는 일기를 쓰면서 하루를 정리했는데 다양한 형식을 시도했다. 논작 시험을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많은 도움이 됐다.

일기는 독백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고, 무엇을 느꼈는지를 떠올리며 썼다. 나의 일상, 나의 전부를 있는 그대로 옮겼다.

일기는 논작이었다. 신문을 읽고 방송을 보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주제를 사설과 칼럼처럼 만들었다. 자료를 찾아서 정리한 다음에 쓰지 않고, 주제를 정하고는 그냥 정리했다.

일기는 기사였다. 나의 하루, 또는 당일 뉴스에서 하나를 골라 스트레이트나 기획처럼 썼다. 친구와 밤새며 이야기하다가 일기장을 펴고 인터뷰하는 식으로 쓰기도 했다.

일기는 편지였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실망을 누군가에게 전했다. 대상은 다양했다. 나, 가족, 친구, 언론인과 정치인, 역사 속의 인물.

일기는 대자보였다.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기록했다. 때로는 논리적으로, 때로는 격정적으로 표현했다.

대학생이 되면서 일기를 거의 매일 썼다. 이런 습관이 하루를 정리하고, 사고의 폭을 넓혀 나를 성숙하게 만드는데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

언론인 지망생의 카페 ‘아랑’을 보면 이해하기 힘든 글이 가끔 올라온다. 논작을 같이 준비하는 스터디에서 남의 글을 베끼는 학생을 문제 삼는 내용이다.

스터디는 왜 같이 하는가?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 자기가 모르는 점을 다른 지망생에게서 배우기 위해서다.

다른 지망생의 글과 지적을 통해서 자기 글을 발전시키려고 스터디를 같이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스터디를 같이 하는 다른 지망생의 글에서 방향, 구성, 표현을 참고하고 활용하는 일이 왜 문제가 되는가?

누군가 애써서 찾고 정리한 내용을 다른 지망생이 시험에서 활용하면 모두의 글이 비슷해진다. 같이 망하는 길이라는 지적은 맞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 자기만의 자료나 관점이나 표현을 스터디에서 공개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구양수의 삼다(三多)는 실천하기 쉽지 않다. 오늘 주제는 많이 쓰는데 일기가 가장 좋다는 내용이었다. 논작 시험과 공통점이 많으니 바로 실천하기를 권한다. 일기장에 필기구로 쓰자.

세월이 지나면 일기는 소중한 기록으로 남는다. 대학생의 일상, 20대의 꿈과 고민, 취준의 고단함과 성취감을 모두 담은 공간. 나는 젊은 시절의 일기장을 지금까지 간직한다. 재산목록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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