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뉴스통신진흥회가 주관한 제2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사업의 장려상 수상작입니다. <편집자 주>

지방 국립대에서 기계공학을 연구하는 이정훈 교수(가명·55)는 서울대 84학번이다. 신입생이 들어오면 선배가 후배에게 밥을 사고 책을 주던 시절이었다.

친해지면 선배들은 ‘드리블’을 시작했다. 후배를 시위로 이끄는, 전도행위와 비슷했다. 드리블이 잘 되는 후배는 선배를 따라 서클에 가입하고 시위에 참여했다.

이 교수도 학생 시위에 여러 번 나갔다. 경찰을 피해 같이 도망 다니면서 동료와 친해졌다. 그는 태권도 서클에 가입했다. 체육관으로 학우들이 피신하면 문을 막고 경찰과 대치했다.

그는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을 입학 초에 받았다. 많은 선배가 신입생에게 주는 책의 하나였다. 받자마자 단숨에 반절 넘게 읽었다. 민족의 역사라서 더 재미있었다. 해전사를 통해 역사에 흥미를 느낀 뒤에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역사책을 구해 읽었다.

홍익문고 박세진 사장(54)은 86학번이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노태우 후보에게 정권을 이양하던 시기에 대학 생활을 했다. 길을 걷기 힘들 정도로 학교 앞에 최루탄 가스가 가득했다. 동료들과 함께 ‘독재타도 호헌철폐’ 구호를 외쳤다.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정권이 이어진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박 사장은 “당시 공산주의에 관한 공부를 하는 모임이 많았다. 그런 의식 있는 애들이 해전사를 읽고 운동했다”고 말했다.

백일 울산과학대 교수는 학교에 가면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고 교련 훈련을 받았다. 학생 시절, 그는 빨갱이 얼굴이 정말 빨간 줄 알았다. 같은 피부색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정보가 통제됐다.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은 빨갱이로 간주됐다.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말도 돌았다. 술을 마시다 ‘김일성이~’ 말만 하면 술집 주인이 신고했다. 그럼 경찰이 남영동으로 끌고 가서 가혹 행위를 했다.

일본을 욕해도 안 되고, 미국을 욕하면 당연히 안 되는 시절. 그때, 1979년 10월 15일 해전사가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기 11일 전이었다.

해전사는 대학생의 역사의식을 교정하는 사실상의 교과서가 됐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1970년대에는 중고교와 대학에서 일제강점기를 배우지 못했다.

대학에서도 1919년의 3·1운동까지만 가르쳤다. 해전사가 나오자 386세대는 학교가 숨기던 ‘진짜 역사’에 눈을 떴다.

백 교수는 운동권 학생들이 학교에서 해전사를 읽었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안기부에 잡혀가는 일도 있었다. 판매가 금지됐지만 학생들은 몰래 구해서 읽었다. 학내 서클의 필독서였기 때문이다.

▲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해전사는 시대 흐름과 맞았기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경향신문이 출판인 5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꼽혔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해전사는 민족 자주적인 정신에 기반해서 통일된 민족관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글”이라며 “묻혀있던 우리 역사를 반듯하게 밝히는 책”이라고 했다.
 
한길사는 해전사 초판을 5000부 찍었다. 광고를 하지 않았지만 4500부가 순식간에 팔렸다. 김 대표는 “내가 잘 나서 그런 게 아니다. 독자와 시대가 해전사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부는 초판본을 판매금지하고 남은 책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한길사는 남은 500부를 용달차에 실어 보냈다. 김 대표는 책을 다시 살려보기 위해 관계 당국을 찾았다. 항의는 하지 못하고 “괜찮은 책인데 왜 판금 됐을까요?”라고 물었다.

여러 번 찾아갔다. 결국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 중인 임헌영 소장의 글을 빼고 일부 문장을 수정하는 조건으로 판매 허가를 받았다. 그 후 1980, 1990년대 필독서로 자리 잡아 2004년 재출간한 판매분까지 합쳐 40여만 부가 팔렸다.

김 대표는 “출판인의 임무는 우리 역사를 제대로 담아내는 책을 내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출판사가 재정적으로 어려워도 역사책을 계속 내는 이유다.

류상영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1980년부터 민주화가 시작됐지만 이후까지 암흑기가 지속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암흑기에서 조금씩 밝아오는 빛을 더 빨리, 더 밝게 하기 위해 조그마한 돋보기로, 잘못 알려진 사실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가 진실을 규명하지 않고는 진보할 수 없는 시대. 민주화가 되면서 조금의 틈이 생겼고, 해전사를 통해 비판적으로 사고할 기회가 생겼다. 왜곡되고 밝혀지지 않은 사실. 조그마한 조각을 맞춰 나가는 첫걸음이 해전사였다.

류 교수는 “시민들은 광주민주화 운동 이후에 미국이 더는 한국의 수호신이 아니라고 느꼈다. 해전사는 해방 전후의 과정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며 국제 정세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냉철하게 분석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해전사가 나오기 전에는 해방전후사 연구가 금단의 영역이었다. 해방 전후의 자료를 보기만 해도 빨갱이로 간주됐다. 해전사를 통해서 해방전후사 연구가 다양한 범주로 뻗어 나갔다.

박현선 이화여대 북한학과 초빙교수는 “해방전후사는 남북한이 함께 있는 한반도의 문제지만 (해전사가 나오기 전까지는) 대부분 남한 위주였다”고 설명했다. 북한에 대한 해방 전후사가 전무한 상황에서 해전사는 북한에 대한 역사 인식을 심어주는 첫 단추가 됐다.
 
해방 이후 공간에 대한 주체적 시각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해전사는 한국 전쟁의 책임과 식민지배에 대한 미흡한 과거 청산까지 다뤘다.

박 교수는 “해방 이후의 공간을 주체적, 민족적 시각에서 재조명한 책이다. 반공에 치우친 시각에서 민족 주체적인 시각으로 다시 점검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이종훈 한성학원 이사장은 해전사가 경제를 사회과학적으로 해석하는 이념적 틀을 제공한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지금은 경제학이 사회과학적 성격을 잃었다. 수식으로만 분석하는 계량경제학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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