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뉴스통신진흥회가 주관한 제2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사업의 장려상 수상작입니다. <편집자 주>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 1권에서 6권에는 49명이 저자로 참여했다. 책 발간 후 40년이 지났다. 이들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1권부터 4권까지, 네 번 이름을 올렸다. 주로 해방 후 문학에 대해 썼다.

1권이 나오던 날, 임 소장은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 중이었다. 1979년 감옥에 들어가 1983년 출소했다. 해전사 판금이 해제되고 재출간된 1980년에 임헌영 소장의 원고가 빠진 이유다.

그는 한평생 민족문제를 연구했다. 임 소장은 “내가 걸어온 길은 해전사를 썼다고 달라지지 않았고, 안 썼다고 해서 달라지지도 않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임 소장의 또 다른 직업은 문학평론가다. 그는 근대 이후에 가장 중요한 지식인 집단이 문인이라고 했다. 정치학, 역사학과 같은 학문이 없던 시절, 문학이 이를 대신했다.

“문학은 청년이 역사의식이나 민족의식을 갖도록 하는 유일하고 가장 대중적인 장르였다. 시, 소설, 평론을 통해 (청년이) 계몽됐다. 광복 후에 문학인이 글을 쓰고, 시를 읊으며 (민족의식이) 퍼졌다.”

이종훈 한성학원 이사장은 국내 최초로 한국경제론을 집필한 경제학자다. 1970년대, 반일 감정으로 인해 대부분의 학자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 이사장은 아내와 자녀를 두고 먼 타지로 갈 수 없어 도쿄대에 갔다. 이 선택이 전화위복이 됐다.

“6년 만에 박사학위를 따고 한국에 왔다. 그때만 해도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이 없었다. 내가 거의 처음이었다. 덕분에 KBS에서 1년 동안 ‘일본경제의 이해’라는 강의를 할 수 있었고, 속된 말로 유명해졌다.”

박사학위를 1978년에 받고 귀국해서 다음 해 해전사 1권의 저자로 참여했다. 그는 ‘미군정 경제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 썼다. 일본은 나쁘고 미국은 좋다는 가치 판단에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안사에 두 번 불려갔다. “잘못한 건 없으니까 불러서 겁만 줬다. 아침 일찍 가서 밤 12시까지 붙잡아놨다가 내보냈다.”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전 동아일보 사장)도 1권의 저자다. 그는 ‘분단의 배경과 고정화 과정’에 대해 썼다. “아마 1권에서 내 글 하나만 예외적일 것이다. 내 글은 상당히 우파 보수적인 글이다.”

그는 해전사에 타의(他意)로 참여했다. 1권이 나오던 당시, 한길사 대표와 친분이 있었다. 김 교수는 자신의 저서 일부를 활용하면 좋겠다고 한길사가 요청해서 허락했다고 한다.

▲ 해전사 저자들.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이종훈 한성학원 이사장, 이종석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이완범 한국학연구원 교수, 백일 울산과학대 교수, 박현선 이화여대 북한학과 초빙교수

해전사 1권은 1979년 나왔다. 2권부터 6권까지는 1985~1989년에 출간됐다. 4~6권의 저자는 1권을 보며 자란 ‘해전사 세대’다. 지성의 성장이었다. 꾸준히 같은 분야를 연구한 경우도 있고 아예 다른 길을 개척한 경우도 있다.

류상영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4권에서 해방 전후의 청년단체에 주목했다. “청년단체는 가장 거칠면서도 당시 시대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정치현장에서 행동대로 있으며, 그러면서도 변절자가 아주 많다.”

그는 해전사 집필이 이후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해방전후사를 연구했던 경험이 한국 현대사를 보다 폭넓고 비판적으로 보는 계기를 줬다고 했다.

백일 울산과학대 유통물류학과 교수는 79학번이다. 부마 민주항쟁, 10.26 박정희 암살, 12.12 군사쿠데타, 서울의 봄을 대학에서 보냈다. 학교는 2년도 못 다녔다. 휴교가 잦았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서울까지 소문이 났다. 1주일 정도 있다가 소식을 들었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죽이나.”

그는 한국의 경제와 정치가 나아갈 바에 대해서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언제까지 식민지에 있을 수 없어서 해전사 6권에서 ‘해방 전후 사회경제사의 쟁점’에 대해 썼다.

백 교수는 경제학자로서 ‘함께 상생할 수 있는 시스템’에 관심이 많다. 모든 대립 밑에 흐르는 문제는 결국 ‘밥그릇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에게 경제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제시하는 이유다.

고창훈 제주대 명예교수는 4권에서 ‘4·3 민주항쟁의 전개와 성격’을 집필했다. 처음부터 4·3사건에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제주대 교수로 임용되자 역사적으로 치유되지 않은 채 고통받는 이들이 보였다. 연구자로서 책임감이 들었다.

그는 실천을 중요시한다. 해전사를 집필하고 같은 해인 1989년 제주도민들과 함께 ‘제주4·3연구소’를 설립했다. 고 교수는 <논어>에 나오는 말을 인용했다. “실천에서 힘이 나오면 글을 쓰는 것이다.”

5권의 주제는 북한이다. 이종석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 지도집단과 항일 무장투쟁’에 대해 썼다.

그에게는 실사구시가 중요하다. 책을 쓰기 위해 일본 총독부의 자료를 모았다. “해전사를 보면 알겠지만 북한 자료가 아니라 일본 자료를 인용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믿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젊은 학자들이 모여 1987년 재야학술단체인 ‘한국정치연구회’를 만들었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북한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어려워서 ‘지역 국가’라고 부르고 연구하던 시절이었다.

2000년대 초반, 학생들은 이 수석연구위원의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를 보지 않고서는 북한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는 북한을 꾸준히 연구한다.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북한을 평가하는 일. 현재도 지키는 연구 신념이다.
 
박현선 이화여대 북한학과 초빙교수는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재야학술단체인 한국사회과학연구원(한사연)에서 연구를 했다. 매주 저녁에 스터디를 하고 시위가 있으면 함께 나갔다.

“빨간색 표지의 책만 가지고 다녀도 검문하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 이런 공부를 했다는 건 개인의 안위보다는 사회적인 이슈에 이바지하겠다는 공공의식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박 교수는 5권에서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기의 여성 정책’에 대해 썼다. 해전사 전권 중 유일하게 여성에 초점을 맞췄다. 대학 4학년 때 여성학 수업을 듣고 다시 태어났다고 느꼈다. “여성학을 알고부터는 모든 것을 여성의 눈으로 보게 됐다. 세계관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가 대학원을 다니던 당시, 여성이나 가족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정치나 지도자 문제에 비해 쓸모없는 분야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박 교수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3배는 더 잘해야 했다고 말했다.

여현덕 조지메이슨대 석좌교수는 해전사 3권에서 ‘8·15 직후 민주주의 논쟁’을 썼다. 지금은 4차 산업혁명 전문가가 됐다. 다보스 포럼에서 일했고 경영 분야와 기술혁신을 연구한다.

그는 해전사를 집필하던 때에서 조금 시야가 넓어졌을 뿐, 지난날의 문제의식은 그대로라고 말했다. “좌절하지 않는 인간의 투혼과 진보하는 역사를 향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

여 교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격동의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생존하고 발전하느냐는 인문학적 탐구는 당시의 시대적 갈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해전사와는) 얼핏 다른 분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지평과 문제의식 위에 그대로 서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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