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뉴스통신진흥회가 주관한 제2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사업의 장려상 수상작입니다. <편집자 주>

취재팀은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을 읽은 20대가 있는지 알아봤지만 열에 아홉은 제목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저자였던 교수에게서 배운 학생들은 책 이름을 수업시간에 몇 번 들었지만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고 찾아보지도 않았다.

해전사를 읽은 대학원생 이정균(27) 씨는 그들의 반응에 동감했다. 읽은 사람이 독특하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이 씨는 역사를 좋아해 해전사를 찾았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책이며 아버지 세대의 교과서였음을 전해 들었다. 그는 이념에 따라 책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해방전후사에 관심을 가졌던 386세대 중 일부는 해전사를 비판하는 책을 2006년 출간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다. 해전사 저자들은 재인식을 어떻게 평가할까.

류상영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재인식을 학문 연구가 아닌 정치적 프로젝트로 봤다. 재인식 저자들이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고 색깔론에 빠져 시야가 좁아졌다고 했다.

그는 해전사도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인정했다. “(해전사는) 당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막 공개되기 시작한 미군정시대의 정보보고서, 국무성 문서를 성급하게 소개하고 해석했다.”

류 교수는 해전사에 부족했던 자료를 재인식이 포용적 시각에서 보충했다면 지성의 발전에 기여했겠지만 정치적 흐름이 반영돼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고 설명했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재인식을 편집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재인식을 한길사에서 출간했다면 좋았을 것이라 말했다고 밝혔다.

“이것이 옳고 저것은 틀리다는 태도는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재인식을 배척할 필요는 없지만 이영훈 교수의 제안은 거절했을 것이다.” 재인식이 가진 ‘우리가 맞고 다른 건(해전사) 틀리다’는 태도는 옳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완범 한국학연구원 교수와 신형기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해전사 저자이면서 재인식 저자다. 이완범 교수는 “해전사 저자나 재인식 저자나 각각 다른 배경의 지식과 상황을 가진 학자일 뿐”이라며 “정치적 성향을 책으로 구분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학자라면 하고픈 말이 있을 때 언제든 자기 글을 새 책에 기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해전사를 쓰면 좌파고 재인식을 쓰면 우파가 아니라는 의미다.

신형기 교수는 2000년대 초, 민족주의 개념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고민하면서 해전사의 민족적 시각을 비판하기 위해 재인식 저자로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는 재인식에 붙여진 ‘뉴라이트’라는 단어에 동의하지 않았다.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는 재인식이 새로운 자료를 활용한 해석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9년 소련을 방문하자 옐친 대통령은 6.25 자료를 한국에 넘겨줬다. 재인식은 이를 통해 시대를 새롭게 해석했으므로 학문의 성장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완범 교수는 “현 청년세대가 정치에 관심이 없어 보일지라도 동성애 결혼, 페미니즘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지성의 진보를 보인다”며 “이런 이슈야말로 새로운 세대의 지성이고,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이다”고 평가했다.

류상영 교수도 1980년대보다 더 발전된 지성의 출현을 기대했다. 시간이 흐르면 발전된 책과 이론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발전한다면 2020년에도 해전사와 같은 역사 해설 교과서를 기대할 수 있을까. 저자들은 사회과학서적이 설 곳이 줄었다고 입을 모았다.

백일 교수는 “서점에 갈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고 했다. 사회를 분석하는 서적이 대부분이던 1980년대와 달리 현재는 출세나 돈 버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주류다. 베스트셀러도 기업경영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다. 해전사 2탄을 적극 지지하는 이유다.

▲ 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해전사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해전사 2탄 출판은 어렵다고 했다. 21세기 들어서 주목할 사회문제가 다양해 시대요구가 하나의 주제로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현대사가 복잡해져 해전사에 연결될 내용이 많아 한 책에 담기 어려워졌다고 했다.

무엇보다 독자들이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찾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책을 내기 어렵다. “이제 책 1000부도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한길사의 인문사회고전 ‘Great Books’ 시리즈가 전화비도 안 나오는 사업이라고 김 대표는 한탄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독자의 부재’를 걱정했다. “해전사 2탄을 작성할 학자는 충분하다. 지성이 성장해도 학생들이 책을 찾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 알려지지 않는다.”

작년에 한길사가 출간한 와다 하루키 교수의 ‘러일전쟁’은 2판까지 찍었다. 과거사 청산 문제, 그리고 일본의 수출규제 같은 한일갈등이 독자의 관심을 끌면서다.

이정균 씨는 해전사가 21세기에 객관적인 역사 인식 및 분석 용도로 쓰이기는 어렵다고 본다. 386세대에게는 해전사가 경이로운 책일 것 같았다. 그러나 이념 지향성이 강하고 내용이 부정확하거나 폐기된 이론이 너무 많다고 느꼈다.

“역사는 다른 책으로도 충분히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아무도 영어를 두꺼운 하드커버의 ‘성문영문법’으로 배우지 않듯이 말이다.”

이 씨는 해전사를 통해 실제 역사를 배우기보다는 이제는 586이 된 386세대의 대학 시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2030세대와 586세대는 앞으로 한 세대를 함께 해야 하므로 서로 겪지 못한 문화를 책을 통해 알아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해전사 저자는 청년세대가 해전사 독서를 넘어 해방전후사를 탐구하며 민족주의적 시각을 갖기를 바랐다.

박현선 이화여대 초빙교수는 “현재의 분단 상황과 남북 관계, 남남갈등은 해방전후사에서 기인했다. 해방 전후의 역사 공부를 통해 현재 상황의 구조적 모순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훈 한성학원 이사장은 해방 전후사 공부를 통해 민족적 역사의식의 중요성을 깨닫는 동시에 식민지 과거사청산에 타산지석으로 삼을 부분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해외에서는 지속적으로 해방 전후사를 탐구주제로 주목한다”고 말했다. 일본 NHK 프로듀서가 해전사 책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이종석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역사 공부와 더불어 민주주의에 관한 탐구를 청년세대에 당부했다. “오늘날 경제발전으로 풍족한 상황에서 내 몸을 바치는 희생정신까지는 필요 없지만, 국가의 흐름이 어디로 가는지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

김언호 대표는 앞으로도 사회과학서적이 미래를 이끌어갈 지성인을 키우리라 확신했다. 해전사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는 윤이상 작곡가의 말을 인용했다.

“오늘 우리가 해내고 있는 것은 우리 혼자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가을바람이 불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것이지만, 민족문화는 저 푸른 하늘 창공처럼 존엄하고 엄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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