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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혜린 기자 | 승인 2020.05.17 19:02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남성 중심 사회를 비판한 여성이 있다. <이혼고백장>의 주인공, 나혜석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문학가, 신여성이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단발을 했다는 소식이 조선일보에 실릴 정도였다.

경기 수원시가 나혜석을 ‘독립운동가’로 홍보하면서 그가 또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핵심은 그를 독립운동가로 볼 수 있는지다. 나혜석이 살았던 시절에도, 현대에도 나혜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는 셈이다.

수원시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이었던 <수원 여성의 독립운동> 전시에서 수원 출신 나혜석을 ‘독립운동에 참여한 수원 여성’으로 소개했다. 근거는 나혜석이 1919년 3월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내용이다. 

나혜석은 1919년 3월 2일 이화학당 기숙사에 있었다. 지금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김마리아, 황애시덕을 비롯한 여성 11명과 함께였다.

그들은 3‧1만세운동 이후 여성의 만세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비밀리에 모였다. 나혜석은 개성과 평양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다.

모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기숙사 방에 있던 11명 전원은 3.5이화학당 만세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나혜석 역시 같은 이유로 체포돼 5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신한민보는 나혜석의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왜경 명고옥 여자미술학교 졸업생 나혜석 씨와 여자학원 대학부 출신 김마리아 씨 등은 방금 감옥 중에서 무쌍한 수욕을 당하면서 왜놈 검사의 취조를 받되 조금도 겁나함이 없이 용감 활발한 태도로 정당한 도리를 들어 항변하매….”

▲ 나혜석(출처=수원박물관 홈페이지)

일제는 “혐의 사실을 인정할 만한 증빙이 불충분하다”며 나혜석을 비롯한 이들을 5개월 후 면소 방면했다.

이 기록은 국가보훈처가 나혜석 서훈을 보류한 사유가 됐다. 국가보훈처는 “(면소로 인해) 적극적인 독립운동 참여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서훈 심사 결과를 밝혔다.
 
그러나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 관장은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이었던 김세환 선생도 증거 불충분으로 방면됐다. 같은 시기, 같은 이유로 잡혀간 나혜석이 면소 방면됐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의 행적이 불분명하다고 보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지적했다.

기계형 국립여성사전시관 전 관장 역시 “만세운동과 연루되어 실제로 5개월 정도의 수감생활을 했던 나혜석의 누락은 국가유공자 포상 심사기준이 완화된 상황과 비교해 보더라도 앞뒤가 맞지 않다”며 그를 독립운동가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규웅 문학평론가는 <나혜석 평전>에서 면소 방면의 이유를 “무거운 형벌을 내림으로써 조선인들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판결이었다”고 해석했다.

기 전 관장은 “3.1운동 이후 국내와 해외에서 다양하게 전개된 독립운동의 양상을 고려하여, 1920~30년대의 여성해방운동, 여성교육운동을 항일운동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 수원시가 조성한 나혜석 거리

나혜석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김우영과 결혼했다. 조선총독부의 외교관으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간 곳은 중국 안동현이었다. 나혜석은 이곳에 여자 야학을 설립해 조선 여성을 위한 교육 활동에 전념했다.
동아일보 1922년 3월 22일 기사는 나혜석의 행적에 대해 “우리 조선 여자계를 위하여 열심 전력하는 나혜석 여사는 여자야학을 설립하고 단독히 열성으로 교편을 집(執)한다”고 전했다.

신영숙 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소장은 나혜석의 여자 야학 설립을 “조선 일반 민중 여성에 대한 계몽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했다.
 
“동지가 아니면서도 의열단에 대하여 은근히 동정을 표하여 온 사람은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으며, 그 가운데 여류 화가로 이름이 높던 나혜석이 있다.” 박태원이 <약산과 의열단>에서 적은 내용이다.

나혜석이 안동현에서 보인 독립운동 행적은 여자 야학 설립에 그치지 않았다. 의열단은 1923년 조선총독부, 조선은행, 경성우체국, 경성전기회사 등 주요 기관을 폭파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영화 <밀정>의 배경이 된 ‘황옥사건’이다.

의열단 유자명은 황옥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혜석의 숙사에서 하룻밤을 쉬고…나혜석은 폭탄과 권총을 감춰 놓은 여행대에 ‘안동 영사관’이라고 쓴 종이쪽을 붙여 주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근현대 인물 한국사>의 저자 하성환 씨는 “폭탄을 실은 가방에 ‘일본영사관 부영사(외교관)’의 딱지를 붙여 반입했다. 목숨을 걸지 않고선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나혜석의 행적을 설명했다.

거사에 가담한 의열단원 유석현은 후에 “형을 살고 풀려났을 때 나혜석 씨가 다시 찾아와 내게 권총 두 자루를 전해주었다. 나는 거기서 그들의 우의와 민족 정신을 전해 받는 것 같아 그 감회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 회고했다.

만세운동, 여자 야학 설립, 황옥사건. 이런 활동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 나혜석’이 논란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뉴시스는 2020년 3월 2일 기사(수원시, ‘신여성 나혜석’ 독립운동가로 왜곡해 말썽)에서 나혜석이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에 출품‧입선한 사실을 문제 삼았다.

조선미전은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 일환으로 창설한 공모전이자 한국의 전통 미술을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한 관장은 “독립운동가 김복진 선생 역시 조선미전에 참여했다. 이를 문제 삼는다면 김복진 선생과 같은 분을 잃는다”고 지적했다.

신 소장은 나혜석의 독립운동 서훈이 논란이 된 이유로 그의 개인사를 꼽는다. 나혜석의 개인사가 업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에 걸림돌이 됐다는 얘기다.

황옥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뒤, 나혜석 부부는 7년에 가까운 안동현 생활을 청산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프랑스 파리. 세계 여행을 통해 서양화가로서의 견문을 넓히기 위함이었다.

김우영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나혜석의 여행 가이드를 맡아주도록 친구 최린에게 부탁했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나혜석이 최린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당시 김우영에게는 첩, 최린에게는 본처가 있었다. 그러나 불륜의 결과는 나혜석에게만 가혹했다. 모든 비난의 화살이 나혜석에게 돌아갔다.

김우영과 최린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나혜석은 가족도, 직업도, 지위도 잃고 말았다. 이에 저항하고자 <이혼고백장>을 썼지만 견고한 가부장제의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뉴시스는 기사에서 “수원시에서 (나혜석을) 독립운동가로 표기하고 책자까지 낸 것은 잘못됐다. 당시 가부장 사회에서 스캔들을 몰고 다닌 여성, ‘자유부인’ 정도로 평가하면 되는 것”이라는 한 연구위원의 평가를 인용했다.

그러나 신 소장은 “5개월간의 수감 생활, 여자 야학 설립, 독립운동 지원 등은 명백한 사실”이라면서 “(나혜석이) 서훈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한국의 가부장적 사고가 그의 불륜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이 작용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기 전 관장 역시 “나혜석의 이혼 이후의 행적은 신여성 스캔들 정도로 치부되면서, 독립운동 행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했다.

‘본적:미상, 주소:미상, 성별:여, 성명:나혜석, 사인:병사, 사망 장소:시립 자혜원.’ 나혜석의 죽음은 1949년 3월 14일 자 대한민국 공보처의 관보에 담겼다.

그는 신원 미상의 행려병자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이혼 이후 나혜석은 사회적으로 매장돼 행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국가보훈처는 1995년 “(이혼) 이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사유로 나혜석을 서훈 대상에서 제외했다. 2016년 나혜석 유족이 신청한 심사에서도 같은 결론을 냈다.

황민호 숭실대 사학과 교수는 논문(나혜석의 독립운동과 관련인물들)에서 나혜석의 이혼 이후 행적에 대해 “나혜석의 민족의식과 민족운동은 극단적인 사회적 편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서히 좌표를 잃어갔다”고 평했다.

김주용 동국사학회 편집위원은 “나혜석이 1930년대 이후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결과론적인 잣대로 나혜석을 재단하는 한 나혜석이 전개한 독립운동의 실상은 제대로 밝혀질 수 없을 것이다”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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