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혹은 모호함

진실게임을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다면 진실만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이다. 기어이 질문에 대답 못하고 벌주를 마시는 이유는 드러낼 수 있는 진실의 이면에는 항상 숨겨야 하는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터부에 대한 본능적인 욕망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철저히 은폐된다. 폴라 X의 레오 까락스 감독은 바로 그것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자 한다. 누나와 남동생 간의 정사 장면을 배우들이 연기가 아닌 실제로 행한 것도 일상 속의 진실을 추구하려는 감독의 의지를 반영한다. 물론, 그 역시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의 화면 속에 과연 얼마만큼의 진실을 담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한계를 지녔지만 말이다.

 

진실은 어둠 속에서 밝혀진다

다큐멘터리 같은 흑백 화면 속의 전투기들은 논밭도 마을도 묘지도 무차별한 폭격으로 파괴시킨다. 이미 죽은 자들의 묘지에까지 폭탄을 퍼붓는 광경에서 폭력의 극치를 보았다는 감독이 보내는 인간성 상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일까, 아니면 잔인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보고일까? 여기까지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면 이어짐보다는 단절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너무나 이질적인 화면이 이어진다. 찬란한 석양 속에 빛나는 대저택의 한가로운 정원.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속에 나올 법한 햇살이 내리쬐는 언덕 위에 반짝이는 금발의 연인, 피에르와 루시가 있다. 둘은 어떤 고통과 부끄러움도 모른 채 풍요를 누리던 태초의 연인처럼 행복해 보인다. 단, 피에르가 긴 머리의 유랑인 여인이 나오는 꿈을 꾸기 시작한 뒤로 생긴 미묘한 감정의 동요가 불안할 뿐. 그러던 어느날 밤 피에르는 드디어 꿈 속의 여인 이자벨과 만나게 되자 집요하게 뒤를 쫓아가 묻는다.

" 당신 누구야?"

" 피에르… 넌 내 말을 믿어야 해. 난 네 누나야. "

그녀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흐느끼듯 그들의 출생에 얽힌 진실을 토해낸다. 부모의 과거에 대한 어두운 진실을 대한 피에르는 두려움과 혼돈이 뒤섞인 괴로움을 겪는다. 결국, 금단의 과일을 따먹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처럼 피에르는 이자벨과 함께 어둠을 찾아 떠난다. 그 순간, 금기를 깨고 선과 악을 알게 된 인류에게 영원한 원죄의 굴레가 씌워진 것처럼 추악한 진실을 알고자 하는 피에르에게도 파멸이 예정된다.

"난 평생을 기다려왔어. 내가 처한 현실을 벗어나게 되는것을…"

피에르는 알라딘이라는 필명을 쓰는 베일에 싸인 인기작가였다. 컴퓨터의 어휘 사전에서 멋들어진 단어를 골라 쓰는 젊고 유능한 작가. 그러던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여인까지 버린 채 떠난 이유가  뭘까? 레오 까락스 감독의 85년도 작 <나쁜 피>의 주인공 알렉스도 전직 금고털이였던 아버지의 의문사를 대하고 어떤 연유에서인지 길을 떠난다. 그 역시 자신을 신봉하다시피 사랑했던 여인마저 뒤로 한 채로. 자신을 이루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났던 두 사람이 가장 벗어나고 싶어했던 것은 어쩌면 아버지의 죄, 그들의 근본에 흐르는 나쁜 피였다.

" 난 진실을 몰랐어…. 내 이면의 삶을 채우고 있는 진실, 알려진 것 보다 더 추악한 진실을…. 이제는… 쏟아지는 화산처럼 진짜 진실을 쓰고 싶어. 하지만 난 아직 준비가 안되었어."

파리에 도착한 뒤 함께 갖은 고초를 겪으며 간신히 잡은 허름한 호텔방에서 피에르가 이자벨에게 이렇듯 두려움이 앞선 기대와 포부를 밝힌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먼저 진실을 말하는 것에 따르는 희생이 얼마나 큰지를 처절하게 경험한다.

세상 밖에서…

이자벨의 어린 조카의 죽음을 계기로 피에르 일행이 거처로 옮긴 곳은 사회주의 집단 공동체를 연상시키는 기괴한 곳이었다. 기계와 금속 부품들이 가득한 공장같은 건물 안에 문만 달면 개인의 공간이 확보되는 똑같은 방들이 줄지어 있다. 그리고 공장의 기계가 돌아가는 소음같은 음악 연주에 몰두하는 사람들. 귀마개를 한 채 지휘자만 올려다 보며 자신이 맡은 소리만을 맹목적으로 내는 이들에게 그들이 완성해낸 음악은 어떤 의미일까? 그곳에 방을 마련한 직후 피에르는 이자벨의 무릎에 안겨 자조적으로 말한다.

"너에게 뭐든 다 주고 싶었는데 난 가진게 없었어."

"우리가 함께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해? "

그러나 이렇게 위로하던 이자벨로 점점 폐인이 되가는 피에르를 자신을 탓으로 돌리며 괴로워한다. 그녀가 첫 번째 자살을 기도하기 직전에 남긴 한마디.

"피에르, 난 네 행복을 다 빼앗았어. 그래도 네 친구니?"

이자벨은 진실만을 말했고 피에르는 그 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약했다. 진실 폭로, 근친상간, 살인.. 모든 금기를 행한 피에르는 파멸로 치닫는다. 두 번째 자살에 성공한 이자벨의 죽음은 그들이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누가 보자고 그랬어?

유난히 영화가 시작되고 뒤늦게 입장한 관객이 많았던 영화. 좌석을 거의 메웠던 사람들은 영화가 끝나자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돈 물어내라 그러자', '아이 짜증나', '웬일이니', '정말 화난다'. 선정적인 선전문구에 끌려 투자한 6000원과 1시간 40여분의 시간이 아깝다는 건가. 솔직히 폴라 X는 졸라 X(안) 야했다. 물론 가위질 된 부분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외설 시비를 몰고왔던 실제 정사장면도 섹스를 자연스러운 일상 중 하나로 묘사하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라고 한다. 어쨌든 초반 관객 동원에 성공한 이 영화에 대해서 말하는 백인백색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김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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