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코드 샾의 눈에 띄는 위치에는 어김없이 컴필레이션 앨범(compilation album) 코너가 있다. 여러 유명 가수들의 히트곡을 모아 놓은 이 앨범은 흔히 옴니버스 앨범이라고 불리우기도 하지만, 컴필레이션 앨범과 옴니버스 앨범은 기획하는 과정에서부터 차이가 있다.

컴필레이션 앨범은 말 그대로 이미 독집 앨범이 발매된 가수들의 곡을 선별하여 간단한 편집 과정만 거쳐 앨범에 싣는 것이어서, MR(master record)만 가져다 음향을 맞추는 정도의 작업만으로 제작이 끝난다. 반면 옴니버스 앨범은 자신의 독집 앨범의 발매 여부나 히트 여부에 관계없이 여러 가수가 참여하고, 이미 다른 앨범에 실린 노래를 그대로 재탕하는 것이 아니라 작곡부터 믹싱까지 모든 과정이 새롭게 이루어져 완성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옴니버스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한 명의 디렉터에 의해 제작되지 않은 경우도 있고, 컴필레이션 앨범에도 국내에서 독집 앨범이 발매되지 않은 가수의 곡이 실리기도 한다. 그러나, 옴니버스 앨범을 위해 노래하는 가수는 있지만 컴필레이션 앨범을 위해 노래하는 가수는 없다는 점에서 두 앨범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두 앨범 사이의 작은 차이야 어떻든, 이렇게 여러 가수들의 곡을 모아 놓은 앨범은 높은 판매량을 보장한다. 한국에서 컴필레이션 앨범의 붐을 주도한 EMI와 폴리그램(Poligram)의 합작품 <NOW 1집>은 국내에서는 60만장 이상,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전역에서는 2백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가요에 비해 외국 팝 시장이 작고 불황까지 겹쳐 정규 앨범의 판매량은 2만장을 넘기 힘들지만 컴필레이션 앨범은 5만장 이상 팔리는 경우를 흔히 본다.

국내 가요의 컴필레이션 앨범도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기는 마찬가지. IMF한파가 세차게 몰아치던 97년말 출시된 <명작 1집>(락레코드)은 12만장, 2집은 7만장이 팔리면서 국내 음반 업계의 컴필레이션 붐을 주도하고 있다. 락레코드 가요 담당자 이진영씨는 "가요에 관심이 적은 성인들이 많이 찾게 되면 국내 가요 시장 저변 확대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흔히 길보드 테이프라고 부르는 불법 편집 음반이 정식 음반으로 대체되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음반 회사 입장에서 보면 길보드 테잎 소비자가 정식앨범 소비자로 흡수되는 일은 긍정적 효과 정도가 아니라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신인 가수일수록 자신의 노래가 길보드에 오르길 바란다는 말이 있건 말건, 아무리 많이 팔려도 한푼 이익도 돌아오지 않는 길보드 테잎은 음반 회사 최대의 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뮤지션들도 길보드 테잎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는 음반 회사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은 컴필레이션 앨범에 관해서는 음반 회사와 완전히 한 목소리가 아니다.

"음반 회사들이 컴필레이션 앨범을 앞다투어 발매하는 것은 신인 가수들이 대중 앞에 나설 기회를 박탈하고 새로운 음악을 원하는 대중의 욕구를 무시하는 일입니다." 얼마 전 <Last Promise>라는 앨범을 발표한 신인 가수 '시현'씨의 말이다. 제작비가 적게 들고 그에 비해 판매량은 높은 앨범에 투자하는 음반 회사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때문에 새로운 음악에 대한 시도를 소홀히 하게 되면 뮤지션이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명 가수에게는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히트곡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히트곡이 그의 모든 음악적 기량과 철학을 말해 줄 수는 없다. 컴필레이션 앨범 때문에 유명해진 가수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한두 곡만으로 자신을 평가해버린다면 여간 서운한 일이 아닐 것이다. 97년 22만장의 판매고를 올린 <All My Loving>에 수록된 익스트림의 'More Than Words'는 잔잔한 포크 스타일 음악이다, 그러나 실제로 익스트림은 강력한 사운드를 주무기로 하는 메탈 그룹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더라도 컴필레이션 앨범이 음반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이 못된다. 소비자가 음악의 깊이를 느껴볼 기회도 없이 히트곡 위주로 휩쓸려 다니는 불쌍한 신세가 되기 쉬운 이유에서다.

음반 제작사는 '소비자 중심의 기획'이라는 말로 컴필레이션 앨범의 서비스 정신을 강조한다.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곡을 찾아 떠먹여 줌으로써 대중음악의 하향 평준화를 주도하는 '서비스 정신'에 대해 MBC 라디오 DJ 배철수씨는 그의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했다. "대중 음악은 반드시 대중적이어야 합니까? … 덜 대중적인 것도 많은 사람이 이해하기 시작하면 대중 음악이 되고 그런거 아닙니까?"

불황에 대비한 자구책으로 등장했던 '컴필레이션 붐'은 불황이 서서히 끝나 가는 최근에도 잠잠해질 기미가 없다. EMI의 마케팅 담당자 김혜영씨에 따르면 "앞으로도 NOW 시리즈를 비롯한 컴필레이션 앨범은 꾸준히 발매될 예정입니다. 판매량이 안정적인데 발매를 안 할 이유가 없죠."

컴필레이션 앨범 시장에 뛰어드는 음반사가 늘어나면서 단순히 '히트곡 모음집'에서 벗어나, 작년부터는 다양한 주제의 앨범이 나오기 시작했다. <LOVE ALWAYS>, <THIS IS ROCK BALLAD> 같은 장르별 모음이나, 요절한 가수들 노래 모음집 <추억>,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사운드 트랙<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등이 바로 그러한 예다. 작곡가 오현경씨(25)는 "그냥 편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드팝을 댄스뮤직으로 완전히 새롭게 편곡한 앨범같이 지금과는 다른 스타일의 앨범이 나오게 될 겁니다" 라고 말하고, 1년 후에는 지금의 두 배 이상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출시될 것으로 내다봤다.

음반사끼리 경쟁적으로 컴필레이션 앨범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지금은 판매량이 예전 같지 않다. 판매액의 약 40%를 판권 보유자, 작곡가, 작사가에게 로열티로 지급하는 것까지 고려하면 새로운 컴필레이션 앨범 기획만이 능사는 아니다.

"옛날부터 한 곡 때문에 앨범을 사는 사람들은 있어왔죠. 이런 사람들을 위해 싱글이 활성화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죠.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컴필레이션이 잘 나가는 이유는 싱글 시장이 작은 탓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오현경씨는 컴필레이션 앨범 붐을 싱글 시장이 자라나기 위한 발판 정도로 여겨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음반사의 '제작비 줄이기'와 소비자의 '좋아하는 음악만 골라 듣기' 사이에 가장 바람직한 절충안이 곧 마련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음반 시장은 자유 경쟁의 논리에 내동댕이쳐져 음악 하나를 만들고 들려주는 일에도, 또 그것을 듣는 일에도 기회 비용의 최소화를 요구한다. 음반 회사의 반짝이는 마케팅은 CD에 과자도 끼어주고 컵이나 책도 끼워주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결국, 뮤지션의 완결되고 정제된 메세지를 사는 것이 이익인지, '신세대 최신가요'의 합법적 버전을 사는 것이 이익인지 숨가쁘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일은 소비자들의 몫이다.

김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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