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20228

오늘은 일요일, 아빠와 둘이서 창경원으로 소풍을 갔다. 엄마는 배가 굉장히 불러서 걷는 것도 힘이 들어 같이 나오지 못했다. '동생을 가졌다'고 하는데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결국은 며칠 전 배가 많이 아프다면서 병원에 가버렸다. 그 며칠 동안 혼자서 심심했던 나는 놀러 가자고 아빠를 졸랐다.

풀밭도 많고 동물들도 많고, 맛있는 것도 많은 창경원. 한 손에는 둥둥 떠오르는 풍선을 들고 다른 손에는 솜사탕을 들었다. 분홍색 솜사탕이 손과 입에 온통 묻어 끈적거렸지만 나는 마냥 즐겁다. 아빠와 단둘이 하는 데이트도 그렇고, 기분 좋은 초봄의 바람도.

창경원의 동물원 한가운데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하얗고 커다란 곰돌이가 있었다. 겨울 내내 보지 못했던 곰돌이의 이름을 부르며 곰 우리로 아장아장 뛰어갔다.

"백곰! 백곰! …어, 없어."

우리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백곰은 나이가 많이 들었거든. 힘들어서 멀리 가버렸어. 새 곰돌이를 데려와야 되는데 동물원에 돈이 없대."

나는 '아빠가 사오면 되잖아'하는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곰돌이는 백 원 짜리 삼양라면이랑은 다르지. 라면이 백 개, 천 개는 있어야 할 걸!"

흐엑, 곰은 굉장히 비싼 거구나. 아빠는 오는 길에 라면 두 개를 샀다. 엄마가 없으니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우리 아빠. 그런데 집에 오니까 안방에 엄마와 아기가 누워 있었다. 나는 반가운 엄마보다 처음 보는 신기한 아기에게 신경이 쓰였다. 아기의 꼭 감은 눈은 단추 구멍 같고, 빨간 얼굴은 찌그러져 있다. 못생겼잖아. 하지만…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

"너랑 꼭 닮았지? 동생이야!"

# 19820327

화사한 봄날씨의 주말. 하지만 아빠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집에는 아직도 몸이 좋지 않은 엄마와 하루종일 잠만 자는 동생, 그리고 나만이 덩그마니 남았다.

"아빠는 프로야구 개막전을 보러 가셨어."
"나도, 나도 데려가지."
"네가 가면 아저씨들한테 깔려서 다쳐. 이따 아빠 오시면 이야기 듣자, 응?"

볼을 부풀려서 골을 냈다. 프로야구가 뭔지는 몰랐지만 엄마는 아기랑 잠만 자고, 나 혼자 노는 건 이제 별로 재미가 없었다. 따라가고 싶은데. 요새 엄마는 책도 잘 읽어주지 않잖아!

"엄마가 조금 설명해줄게. 우리나라에 프로야구라는 게 처음 생긴 거야. 그래서 다들 좋아하면서 첫 경기를 보러 간 거고, 첫 경기가 MBC 청룡이랑 삼성 라이온즈였나? 야구팀이 여섯 개 생겼는데, 서로 싸우면서 이기려고 하는 거지."

그리고 엄마는 여섯 개 팀이 뭐더라, 하면서 손가락을 꼽았다. OB, 해태, 롯데, 삼성, 삼미, MBC…. 나는 토라졌다는 걸 보려주려고 바닥에서 뒹굴면서 건성으로 듣는 척 했다. 싸우면서 이기려고 하는 게 프로야구라.

저녁 뉴스에 나온 야구라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싸움과는 많이 달랐다. 녹색 잔디가 깔려 있고 네모지게 둘러선 사람들이 하얀 공을 던지고 받고 달리고 하는 거였다. 저런 거, 재미있나. 나는 공싸움보다 아빠가 야구장에서 가져온 말랑말랑한 오징어가 더 마음에 들었다.

# 19820427

어제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이른 아침 엄마 아빠는 신문 위에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세상 참' 하는 표정을 짓고 계셨다.

"미친 경찰관이 술까지 취하니까 정말 보통 난리가 아니야."
"수류탄도 있고 총도 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죽은 사람만 62명이라니. 그 동안 다른 경찰들은 뭘 한 거야?"
"어휴, 상상도 할 수 없어요. 마을 네 개를 완전히 박살내고, 마침 상가를 지키던 문상객들은 떼죽음을 당하고."
"이거 스물 일곱 밖에 안 된 젊은 사람이. 결국 자기도 폭사할 거면서."
"경남 의령, 그 쪽 사람들 너무 안됐다. 어쩌면 한 사람이 그렇게까지 할 수가 있어."

어제는 4월의 4번째 월요일이었고, 박살난 마을은 4개고, 가족 수는 44가구라고 했다. 4라는 숫자는 불길하다는 이야긴 들었지만 이런 우연이라니. 오붓하게 둘러앉아 이야기하고 있었을 가족들이 갑자기 총에 맞고 픽픽 쓰러졌다는 걸 떠올리면 너무 황당하고, 슬프다.

어린이날에 자전거를 사달라고 조르던 나는 미안해졌다. 일주일 남은 어린이날, 그 다음의 어버이날에 남은 사람들은 얼마나 슬플까? 아이를 잃은 엄마 아빠도, 엄마 아빠를 잃은 아이들도, 친구를 잃은 아이들도.

# 19820512

"장여인 광풍. 이거 며칠 째야? 도대체 가라앉을 줄을 모르네."
"건국 이래 최대라잖아요, 경제 사건으로는."

아빠는 아주 넌더리를 냈다. 내가 봐도 그 장여인이라는 아줌마는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 날이 없었다. 광풍이란 것도 좋은 의미는 아닌 모양이다. 언제나 고개는 푹 숙이고 시퍼런 쌀자루같이 생긴 옷을 입고 손목은 꽁꽁 묶인 모습이었다.

"이철희도 똑같이 나쁜데 왜 장영자만 물고 늘어지는지 모르겠다니까, 이 칼럼은 다 뭐야? '장여인 광풍'. 벌써 열 다섯 번째네."
"여자가 조신할 줄 모르고 함부로 나대니까 험한 꼴 당하는 거지. 육영수 여사는 얼마나 평판이 좋았어?"
"아니, 웬 조신 타령이에요? 조선 시대도 아닌데. 남자는 동네방네 나대도 되고?"

어리고 순진한 딸내미 앞에서 별 말씀을 다 하신다.

"엄마랑 아빠랑도 똑같아."

엄마 아빠는 움찔 하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엄마가 이마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조그만 게, 벌써 중간에 서는 것만 배워가지고. 그거 좋은 거 아냐!"

# 19821127

이불을 꼭 덮고 넷이서 나란히 누워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아빠에게 물었다.

"당신이랑 나랑은 전생에도 부부였을까?"
"글쎄. 그건 갑자기 왜?"
"한국 총각이 프랑스 아가씨한테 편지를 보냈대. 자기들은 전생에 부부였다면서. 결혼하자고."
"그래? 인생이 소설인 줄 아나. 웃기는 사람이네."
"그저께 결혼했는데? 프랑스까지 가서."

유재승 아저씨는 몇 년 전 꿈에서 금발머리 파란 눈의 여자와 결혼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단다. 전생을 믿고, 꿈도 믿고, 게다가 자기가 화성인이라고 주장하다니 조금 우스웠다. 그렇게 해서 찾은 사람이 80년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미스 프랑스였던 브리짓 언니. 과분해… 과분하다구.

"주고받은 편지만 수백 통이래."

엄마 아빠도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글자를 잘 읽을 수는 없었지만 엄마의 화장품 상자 안에 손때 묻은 편지봉투가 가득 들어있는 것을 봤었다. 좀더 자라면 모조리 읽어줄 테다 라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다. 언젠가는.

"근데 재미있는 게, 그 미스 프랑스가 이번에 여경 시험을 봤대. 너무 현실적이지. 남편도 직업을 가졌으면 한다는 거야."
"사람이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 뭐."

나는 구멍가게에 앉아 카운터를 보고 있는 화성인을 떠올리며 웃었다. 십 년쯤 지났을 땐 그 두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조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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