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면 으레 하나씩 있는 헌혈의 집. 그리고 그 주위에 항상 한두 명은 보이는 헌혈권장요원들. 초록색 모자에 앞치마를 두른 이들이 다가오면 눈치껏 옆으로 살짝 피해보지만 미처 피하지 못해 팔을 붙들리는 사람들. 싫은 표정을 지으며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애써 팔을 뿌리쳐도 어쩔 수 없다. 길을 가다가 헌혈하라고 잡힌 적이 있냐는 질문에 김성희(20)씨는 열을 올리며 이젠 권장요원들이 무섭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친구랑 얼마 전 돈암동에 갔었어요. 헌혈의 집 옆을 지나가는데 권장요원이 헌혈하고 가라고 잡더라구요. 같이 간 제 친구가 키도 크고 덩치도 좀 컸거든요. 일이 급하기도 하고 날씨도 더워서 예의로 이따가 일 보고 다시 온다고 했지요. 거기까지는 다른 날과 별 다를 게 없었죠. 그런데 그 날은 그러는 거예요. 다시 안 올 거면서 거짓말한다고. 진짜로 다시 올 거면 지갑 맡기고 가라고. 정말 황당하더라구요."

잘못된 '신체발부 수지부모'


물론 대한적십자사에서도 시민들의 이러한 불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1998년 한국 갤럽의 '헌혈자 의식과 홍보효과 측정조사'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12%)이 아직도 자진해서 헌혈을 하기보다는 권유에 의해서 헌혈을 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헌혈권장원이 투입된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 헌혈 실적은 약 50%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대한적십자사에서는 권장요원을 투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국의 박은영씨는 권장요원들을 백화점의 점원들과 비교해서 말한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헌혈은 생소한 것이어서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도 선뜻 문을 열고 들어가질 못하죠. 백화점에서 어떤 물건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럴 때 점원이 다시 한 번 권유를 해주면 망설이던 물건을 사듯이 헌혈을 할까 말까 망설이던 사람들에게 한 번 더 권유를 하면 결국엔 하게 되는 이치랑 비슷하죠. 그래서 권장요원들이 필요해요."

그러나 외국의 경우 길거리에서 헌혈을 권유하는 경우는 없다. 미국의 예를 들어보자. 다른 것은 몰라도 헌혈의 수급량에 있어서는 선진국이 되지 못하는 곳이 미국이다. 그러나 미국 어디에서도 헌혈을 강요하는 권장요원들은 찾아볼 수 없다. 헌혈을 하는 절차도 한국 보다 까다롭다. 헌혈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1-888-BLOOD-88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헌혈의 집(ABC blood center)을 알아내서 예약을 해야 하고, 헌혈을 하는데 총 한시간 정도를 투자해야 한다. 번화가 어디를 가도 헌혈의 집을 쉽게 찾을 수 있고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는 우리 나라에 비하면 헌혈을 하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해야 하는 것이다. 헌혈 사업이 과히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미국도 이러한데 헌혈사업이 활성화되어 있는 나라들은 어떨까? 헌혈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꼭 뛰어난 경영인의 능력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그 뒤에 그 나라 사람들의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역시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몸을 온전히 하는 것이 효도의 시초이다'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효심은 미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이 미덕을 왜곡하여 해석하고 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들먹이며 피와 장기의 기증을 꺼려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조상들처럼 부모를 섬기는 마음에서 자신의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다. 이제 조상들의 가르침은 이기심으로 변해 버렸다.

박은영씨에 따르면 헌혈과 장기기증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정도는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일수록 심하다고 한다. "여러 캠페인을 통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의식을 바꿔 보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돼요. 부모가 헌혈하는 것을 막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녀들을 설득시키는데 어려움이 있지요. 부모가 막는 경우에 종종 숨기고 헌혈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사람들의 생각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변화를 위한 끊임없는 설득도 필요하다.

남산골 샌님의 억지

적십자의 기본원칙 중 하나가 '봉사'이다. 즉 어떤 형태로든지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순전히 자발적인 구호 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적십자는 늘 가난하다. 비록 돈의 부족으로 화려하지는 못하지만 TV나 옥외 전광판을 이용하여 공익광고를 하기도 하고 헌혈의 긍정적인 면에 대한 기사를 신문 또는 잡지에 싣기도 한다. 당장은 헌혈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안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격이 주어지는 초·중고생들에게 헌혈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시행 중이다. 가령 초등학생들에게 혈액원을 견학 시켜 피를 직접 보게 하고 피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준다던가 중고등학교에 배포할 계획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사람들이 헌혈에 대해 올바른 개념을 갖고 있지 못하고, 학교측에서도 타이트하게 짜여 있는 스케줄을 뒤로 하고 공부와 상관없는 프로그램을 쉽게 허락해 주지 않아 이러한 홍보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낳고 있지 못하다. 이에 대해 대한적십자에서는 자신들이 수익단체가 아니고 국가의 지원도 적어서 다른 기업들처럼 홍보에 막대한 돈을 투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비이기 때문에 일도 할 수 없고, 장사도 할 수 없고, 구걸도 할 수 없다면 결국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사업을 하는데도 돈이 부족하다면 벌 수밖에 없다. 적십자가 수익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글을 읽는 것 이외의 노동은 할 수 없다는 핑계는 남산골 샌님의 억지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윤을 남기기 위한 '장사'가 아니라 좀 더 효과적인 광고나 캠페인을 위한 '장사'는 필요하다.

언제까지 강요에 의한 '길거리 피 모으기'를 계속할 것인가. 1981년 정부는 국내 혈액 자급과 혈액관리의 적정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국가 혈액 수급 업무를 적십자에 위탁했다. 그 후로 우리 나라의 혈액사업은 꾸준히 발전하여 의약품 제조용으로 쓰이는 혈장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안정적 자급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성장이었다. 한국인들의 이기심과 돈을 핑계로 시민들에게 헌혈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심어주지 못한 적십자사의 오해로 헌혈에 대한 거부감이 아직도 팽배하다. 결국 현재 적십자는 주먹구구식의 사업을 하는 셈이다. 오늘 강요에 의해서 1명을 끌어들이는 것보다 내일 자발적으로 오는 2명을 끌어들이는 것이 더 남는 '장사'가 될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최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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