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들어서는 잘 떠오르지 않는 아나운서가 있다. KBS 정미정 아나운서(33). 명함도 없이 "기억하고 싶으면 그냥 이름 석 자만 기억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그는 토요일 아침 '도전! 주부가요스타'을 진행하고 있으며 얼마 전까지는 금요일 심야에 '남북의 창'을 맡았다. 인기 쇼 프로그램이나 패션 잡지, TV 광고 등에서 연예인 만큼이나 자주 접할 수 있는 다른 아나운서들과 달리 그의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그러나 화려한 오버그라운드 아래의 언더그라운드, 시청자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언론 운동을 이야기할 때면 그는 언제나 맨 앞줄에 서 있다.

여자 아나운서만 보는 오디션

이전에는 뉴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아나운서들은 요즘 들어 활동 영역이 훨씬 넓어졌다. 보도 교양 프로그램은 물론 연예 오락 프로그램, 심지어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아나운서를 기용한 광고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아나운서의 저널리스트로서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죠. 영역이 넓어졌다는 건 달리 말하면 본래의 기능이 퇴색되었다는 거예요. 아나운서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제는 저널리스트의 기능에서 만능 엔터테이너의 기능으로 무게중심이 바뀌었죠."

저널리스트보다는 엔터테이너를 자처하듯 쇼 오락 프로그램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아나운서 이야기에 그는 "사람마다 나름의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나운서 중에도 그런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MBC 손석희 아나운서 하면 저널리스트로서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죠. 누군가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미정 아나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언론 운동가이다. KBS 방송국 노동조합의 여성중앙위원회에서 위원직을 4년째 맡고 있으며 여성특별위원회에서는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에서 주최하는 행사에도 빠지지 않는다. 98년 여름 언노련 주최의 언론기금마련푸른음악회에서는 사회도 맡아보았다. "처음에는 여성운동 차원에서 시작했어요. KBS는 대표적인 공기업이고 여성의 지위가 비교적 높다고 인정을 받는 사업장인데도 여전히 차별적인 요소들이 많죠."

"'남북의 창'을 할 때 남자 아나운서가 국장으로 발령 나고 다른 데로 옮기고 하면서 세 번 바뀌었어요. 그런데 세 번째 바뀔 때 나에게는 통보도 없이 여자 아나운서를 새로 뽑겠다며 오디션을 하더군요. 가서 따졌죠. 다방 마담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나를 바꿔야 할 이유를 세 가지만 들어봐라. 실력이 모자란다면 누가 남북 문제에 대해서 공부를 더 많이 했는지 시험을 보자."

자신의 일도 문제였지만 여자 아나운서에게만 오디션을 보게 하는 사고방식에도 화가 났다. "남자 아나운서는 안 보는 오디션을 여자 아나운서는 왜 봐야 하나. 여기 입사했다는 것은 방송인으로서의 자격을 이미 검증받은 거다. 미스코리아 뽑듯이 그런 오디션이 말이 되느냐. 그러고서 결국 그 프로그램에서는 물러났죠."

얼마 전 MBC 뉴스데스크에서 김은혜 기자를 앵커로 기용한 데 대해서도 할 말이 있었다. 인물과 사상 7월호에 실린 문화연구가 조종흡씨의 글 '여성 앵커에 관한 또 다른 시각-MBC 김은혜 앵커 등장의 의미'에는 반박문을 쓸 생각도 했다. "남자 앵커들은 전부 기자를 앉히면서, 김은혜 기자 하나를 앉혀서 평등을 보여준다니 그건 허구죠. 사실 MBC에서 여성의 지위는 KBS보다 약해요. 페미니즘을 상업적으로 팔아먹는 거죠."

내 이미지는 언론 운동가

"제가 부드러워 보이지만, 냉철하고 밤샘 회의에도 끄떡없고 한 번 말하기 시작하면 엄청 심하게 말해요. 사람들이 저를 여자라기보다는 동지로 바라봐 주지요." 무슨 일에든 적극적인 그에게 최근의 방송 파업이 남의 일일 수는 없었다.

지난 7월 13일 개혁적인 방송법 제정을 위한 방송 노조의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불법파업이라는 회사측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례 없는 노·정 합의를 얻어내고 28일 파업을 철회했다. 그러나 보름만인 8월 11일 검찰은 갑작스럽게 파업 지도부 6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같은 날 임시국회에서는 방송법 통과가 부결되었다. 갑자기 등을 돌린 정부에 대해 노조는 재파업 결의를 준비 중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통합방송법 5대 요구사항의 핵심은 방송의 독립이다. 현재 100% 개인 소유가 가능한 상업방송 지분을 축소하고, 공영방송사 사장을 뽑을 때 검증 단계를 거치도록 하고, 노사 공동의 편성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방송의 독점과 권력화를 막기 위한 요구들이다. "한마디로 민주적인 방송법이에요. 방송의 자본산업화를 막기 위한 장치가 주조를 이루죠. 편성위원회 같은 경우는 경영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서 회사에서도, 정부에서도 반대했어요."

노조가 파업에 들어가자 회사측은 프로그램 진행자를 모두 비조합원으로 교체했다. 그런데 KBS 9시 뉴스를 진행하다 교체된 김종진 앵커는 며칠 후 다시 뉴스진행을 맡았고, 아침뉴스광장의 홍기섭 앵커도 마찬가지였다. "김종진, 홍기섭 앵커를 노조에서 제명할 방침이고,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구속된 것도 후유증으로 남아요."


그러나 이번 총파업에서는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이 더 많다.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민주적인 방송법을 위해서라는 사회적인 이유였어요. 실리적인 의도가 아니라서 조직원들을 이끌어 내기가 힘들었죠.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정치 파업이었고, 처음으로 노·정 합의를 이끌어 냈죠. 사회 개혁적인 명분을 가지고 파업을 시도했다는 것이 성공적인 면이에요."

"우리끼리 해서 우리끼리 따내면 된다는 단위 노조로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단위별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느끼면서 또 노동전문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그러면 이제 산별노조로 가는 거죠. 이번에 필요성은 충분히 알게 되었고." 방송과 관련된 산업들, 외부 프로덕션부터 음향 조명 등 모두를 아우르는 대산별 노조는 당장은 어렵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그는 언론 산별을 들었다. "언론 노조도 어떻게 보면 언론 산별이죠. 기존의 틀을 좀더 강화하는 거예요. 역량을 갖추고 배가하는 거죠."

앞으로의 세기는 연대의 세기라며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빨래터 문화라는 게 있어요. 어떤 집단에 들어가면 남자는 그 안에서 최고가 될 수 있나 없나를 재어보지만 여자는 그들과 어울릴 수 있나 없나를 재어보죠. 이제는 여성의 리더십이 필요한 세상이 되어야 해요. 지금은 남자들의 권력이 나를 안 키워주니까 언더그라운드로 전향할 수밖에 없죠." 스스로를 언더그라운드 아나운서라 칭하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나처럼 용감하게 싸우고 독하게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10년 안에는 더 좋아질 거예요. 우리 아이들에게는 훨씬 나은 세상이 되겠죠." 요즘은 언더그라운드가 비상하는 시기이다. 가요계에서도 화려하기만 한 오버그라운드보다는 내실 있는 언더그라운드가 주목받는 세상이다. 10년을 바라보며 힘차게 살아가는 정미정 아나운서도 그래서 믿음직하다. 그가 날개를 활짝 펼칠 그 때를 그려본다.

조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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