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무서운 지면을 본 적이 없다…11월 21일자 경향신문 1면에서는 퍽, 퍽, 퍽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는 추락, 매몰, 압착, 붕괴, 충돌로 노동자의 몸이 터지고 부서지는 소리다.”(소설가 김훈)

경향신문은 지난해 11월 21일자 1면을 노동자 1200명의 이름과 사망원인으로 채웠다. 2018년 1월 1일부터 지난해 9월 말까지 고용노동부에 보고된 중대재해 중 주요 5대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 김훈 작가는 광고도, 사진도, 설명도 없는 신문을 ‘무서운 지면’이라고 표현했다.

▲ 산재 사망자로 채운 경향신문 1면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의 죽음은 이제 새롭지 않다. 떨어지고, 끼이고, 깔리고, 부딪히고, 물체에 맞아 숨지면서 노동자는 단신으로 등장했다가 잊힌다. 최명선 민주노동 노동안전보건실장은 “너무 많은 사고가 벌어지니 시민도 불감증에 걸린다”고 지적했다.

끔찍하지만 익숙한 현실을 어떻게 공론화할까. 단신과 통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경향신문 취재팀은 노동자 죽음을 아카이브화하기로 했다. 한국기자상 공적설명서에는 이렇게 나온다.

“매년 1000명가량, 하루에 3명꼴의 노동자가 산재 사고로 숨진다는 통계 숫자는 사람들에게 추상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 한 명, 한 명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기록해보기로 했다."

기획은 데이터를 모으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했다. 현장에서 사고로 숨진 사례를 보여주는 자료가 필요했다.

취재팀은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하는 등 중대재해가 일어날 때 사업주가 고용노동부에 신고해야 한다는 법에 주목했다. 고용노동부가 취합하는 ‘중대재해 보고’와 산업안전보건공단이 발간한 ‘중대재해 의견서’를 입수해 산재 1305건을 모두 조사했다.

5명이 달라붙어 한 달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황경상 기자는 “의견서가 PDF 파일 형식이었고 파일 내부도 문자가 아니라 이미지로 돼 있었다”며 “문서를 하나씩 열어 스프레드시트에 옮겨 적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1년 9개월간 발생한 사고 1305건의 사망자 1692명은 한 명도 빠짐없이 경향신문 인터랙티브 사이트에 기록됐다. 사망자 1명은 사람 모양의 아이콘으로 표시된다. 클릭하면 자세한 정보가 나온다.

사고유형, 경위, 원인, 재해일시, 원청과 하청 업체명, 재해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그림. 마지막으로 행정조치와 송치의견을 통해 법적처리 결과를 전한다. 최 실장은 “숨진 노동자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인격이 있는 사람임을 확인시켜줬다”고 평가했다.

▲ 아이콘 하나하나가 사망자를 나타낸다. 사고유형에 따라 모양이 다르다. (출처=경향신문 인터랙티브 사이트)

황 기자는 1면을 노동자 이름과 사인만으로 채운 데에는 추모의도가 있다고 밝혔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직장안전보험위원회 본관 옆에 지난 100년 간 주요 산재 사망자의 이름과 사인을 명패 형태로 만든 기념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 방식의 1면을 기획했다.”

김동원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는 한 명 한명의 이름과 기호 뒤에 숨겨진 자본의 이름이 두렵다고 칼럼에서 밝혔다. 강한수 민주노총 건설노조 부위원장은 “동료들이 건설현장에서 많이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그 많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니 새롭게 다가왔다”고 했다.

사고에 대한 전수조사는 분석으로 이어졌다. 취재팀은 발생유형, 시간대, 연령, 숙련도, 업체규모, 발생 원인까지 통계를 냈다. 황 기자는 “허망한 사고들은 어떤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며 몇 가지 유형의 사고가 반복적으로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추락으로 인해 숨지는 사람이 하루에 한 명, 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람은 사흘에 한 명꼴이다. 5m 이하에서 추락사고가 가장 많이 일어나고, 초심자보다 고숙련 노동자가 많은 재해를 겪고, 공휴일 사고가 전체의 20%를 넘는다는 사실을 정리했다.

현장의 사연도 전했다. 취재팀은 부산 오페라하우스 공사현장에서 숨진 이동식 타워크레인 기사 박 모 씨(31)의 아내를 인터뷰했다. 김지환 기자는 “처음에는 고인의 아내 분이 인터뷰를 고사했지만 이후 마음을 바꿔 응하겠다고 연락했다”고 설명했다.

박 씨 아내는 원청인 한진중공업이 장례식장에 찾아와 산재처리가 어렵다며 합의를 종용했던 일을 털어놨다. 숨진 원인조차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고 언론보도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현실도 이야기했다.

황 기자는 해외사례를 담지 못해서 아쉽다고 했다. “산재발생 건수가 한국의 10분의 1 수준인 영국에 가봤다면 좋았을 것이다. 영국의 기업살인법이 실제 어떻게 집행되는지, 영국 건설현장의 안전관리가 어떤지를 담았으면 기사가 더 풍부해졌을 것이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경향신문 보도를 지난해 11월, 이달의 좋은 보도상 신문부문에 선정했다. 산업안전의 긴박하고 절실한 필요를 일깨웠고 온라인 시대의 뉴스편집은 어떠해야 하는지 좋은 사례를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정의당의 오현주 대변인은 논평에서 “우리 사회는 하루하루 노동자들의 죽음으로 깔린 레일 위에서 달려가고 있었다”면서 원청이 사고책임을 회피하는 사이, 노동현장에서 죽음은 필연적인 일상이라고 강조했다.

바른미래당 강신업 대변인은 “최소한의 안전수칙마저 지켜지지 않는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고(故) 김용균 씨가 매일 우리 곁에 2, 3명씩 있다는 얘기”라며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논평했다.

독자 최효재 씨(27)는 김용균 씨의 사망 이후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됐지만 이슈를 잊을만한 시점에 기사가 나왔다는 사실이 의미 있다고 말했다. 독자 백유빈 씨(26)는 “1면을 보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과 그 죽음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용균재단의 권미정 사무처장은 “(노동자가) 실수해서 떨어질 수 있지만, 왜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구조적인 문제는 잘 확인하지 않는다”며 사고 노동자의 95% 이상은 비정규직이며 질병이나 자살은 산재로 인정받기 어려운 현실을 언론이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계는 언론이 후속보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강한수 부위원장은 산재 사망사고 이후 처벌에 대한 보도가 여전히 부족하다며 책임지는 사람은 누구인지, 정확하게 책임지는지를 함께 짚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명선 실장은 “(산재 관련) 법이 있어도 처벌조항이 삭제되는 바람에 현장에서 변화를 기대하기가 힘들다”며 보완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 페이지는 지금도 업데이트되는 중이다. 새로 입수한 재해조사의견서를 바탕으로 기록된 사망자는 1692명에서 1748명으로 늘었다. 취재팀은 보고서를 입수하는 대로 사례를 추가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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